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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극한의 불안, 가상의 교감을 실현시킬 때 - <프로젝트 헤일메리>, 라이언 고슬링의 터닝 포인트가 되다

“전 세계가 당신만 믿고 있어요.” 유럽우주국 사무관 에바 스트라트(잔드라 휠러)의 말에 느리게 눈을 끔뻑이는 중학교 과학 교사. 줄무늬 티셔츠, 금테 안경을 두른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가 마냥 미덥진 않지만 에바의 말대로 지구의 운명은 그의 손에 달려 있다. 태양의 수명을 위협하는 미생물 아스트로파지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헤일메리호에 탑승해 지구를 구할 방책을 찾아낼 유일한 인간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온갖 사고 현장을 누비던 스턴트맨 콜트(<스턴트맨>)의 잔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 라이언 고슬링이 더벅머리의 분자생물학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영화화를 확정짓고 그레이스 역에 라이언 고슬링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히 갈렸다. 과연 그가 엉뚱한 너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보이는 한편 그를 상상하며 소설을 읽을 때 근사하게 잘 어울린다는 독자들도 존재했다. 이러한 엇갈린 반응은 라이언 고슬링이 자기 영역을 구체적으로 구축해둔 연기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연기력이나 개성이 부족하다며 문제 삼는 게 아니다. 1997년 <프랑켄슈타인과 나>로 데뷔한 지 30여년, 라이언 고슬링은 현재까지 약 30편의 영화 필모그래피를 쌓아올렸다. 한해 평균 영화 한편을 촬영해온 셈인데 신기한 건 그에게 어울리는 장르를 꼽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트북> <블루 발렌타인>등 로맨스의 현실과 판타지 양측을 과감히 오가다가도 돌연 <바비>의 켄이 되어 대상화된 남성으로서 인형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의 대표 캐릭터, 대표 이미지를 과연 무엇으로 일축할 수 있겠는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그레이스는 라이언 고슬링의 익숙한 얼굴을 끄집어낸다. 코미디, 액션을 강조한 <스턴트맨><그레이 맨>같은 최근작보단 2010년대 중후반의 필모그래피, <라라랜드><퍼스트맨>의 정서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케이가 드러낸 정체성을 포괄하는 인물로서 말이다. 당연하게도 라이언 고슬링은 10년 전 자신의 연기를 전혀 동어반복하지 않는다.

감정을 숨긴 채로

수년간 우주선체에 잠들어 있던 그레이스는 모든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나 혼란스러워한다. 헤일메리호에 동석한 동료들은 전사했고, 혼자 남겨진 그는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론적 질문 앞에 고민하던 그는 점차 기억을 되찾고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상기한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라이언 고슬링은 그레이스를 두고 ‘불안’이란 한 단어로 일축했다. 그레이스를 연기하기 위해선 자신이 지닌 “불안과 자기 불신을 키워나가는 형태로, 그런 인간성을 지닌 사람을 떠올리면서 연기를 해나갔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라이언 고슬링은 러닝타임 내내 그레이스의 저변에 깔린 불안을 흘려보낸다.

불안이 내재된 우주비행사 캐릭터는 일찍이 <퍼스트맨>의 닐 암스트롱을 통해 라이언 고슬링이 구현한 바 있다. <퍼스트맨>은 최초로 달에 착륙한 인류 영웅의 성취보다 그의 복잡한 이면에 집중하는 영화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그리움, 훈련 과정에서 사망한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닐 암스트롱의 내면에 뒤섞여 있다. 그러나 닐은 라이언 고슬링이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라 봐도 무방하다. 매사 무감한 듯 무표정한 채로 그는 국가가 부여한 임무 뒤에 숨어 완벽에 가까운 영웅을 가장한다. 그가 가장 솔직해질 수 있었던 장소는 모든 것이 부재한 우주에서뿐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라라랜드> 이후 차기작 <퍼스트맨>의 닐 암스트롱 역에 라이언 고슬링을 재차 섭외한 것 역시 한때 의외의 선택이라 거론됐다. 그러나 <라라랜드>의 결말부를 떠올려보자. 재즈 바를 빠져나가는 미아(에마 스톤)에게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미묘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대사 대신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감정을 미세하게 조절할 줄 아는 라이언 고슬링의 능력을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일찍이 알아본 것은 아닐까.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그레이스의 전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에바의 설명으로 그가 부양할 가족도 반려동물도 없음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이 그가 헤일메리호에 오른 유일한 과학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 말은 그레이스에겐 간절히 살려야 할 소중한 존재가 없다는 의미다. 그레이스가 감각하는 본질적 외로움과 공허함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케이의 그것과 일면 유사하다. 케이는 인간과 레플리칸트 사이의 중간자이자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다. ‘껍데기’로 불리며 주어진 임무만 수행하던 케이가 결말부에 스스로의 결정으로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살리고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은, 자신을 실패자라 명명하며 헤일메리호에 오르길 거부하던 그레이스가 로키를 돕기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자처하는 형태로 나아간 변화와 오버랩해볼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 2049>

막힘없이 수학 공식을 써내려가고 미생물을 배양하는 과학자 라이언 고슬링은 누군가에겐 영원히 적응할 수 없는 외형일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배회하면서 불안에 잠식된 채로 의연함을 가장하는 라이언 고슬링은 이미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왔다. 그리고 그레이스에 이르러 라이언 고슬링은 마침내 교감을 시도하는 한 외로운 과학자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오직 그레이스, 라이언 고슬링에 의해서만 존재 가능한 세계다. 외계인이자 그레이스의 친구 로키는 현장에서 실제 퍼핏으로 구현됐다. 그런 로키가 실재하고 로키와 그레이스가 소통한다는 가정을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가, 상황에 대한 그의 신뢰가 선행되어야 했다. 우주의 선체라 가정한 세트장 안에서 그레이스의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과 불안, 외로움을 홀로 표하면서도 가상의 동료와의 관계를 완벽히 받아들이고 그려내야만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라이언 고슬링은 주어진 임무를 무사히 수행해냈다. <라라랜드> <퍼스트맨> <블레이드 러너 2049>, 그 밖의 다른 필모그래피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라이언 고슬링은 이번에도 대사 대신 미세한 표정과 눈물 맺힌 눈으로 클로즈업신을 가득 채운다. 하나의 장르와 캐릭터로 규정할 수 없기에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라이언 고슬링의 모든 강점이 낯선 너드의 얼굴로, 헤일메리호의 단일한 우주비행사가 되어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