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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차가운 전쟁, 뜨거운 이미지, 분열된 세계 - 21세기 미디어가 전쟁을 재현하는 방식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사이버펑크의 대부 윌리엄 깁슨은 기술적 진보의 점진적 확산을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지진은 진원지부터 먼 곳까지 시차를 둔 채 퍼져나간다. 사후적으로 지진의 형태를 조사할 수는 있지만 각자 느끼는 건 자신의 공간에 한정된 체험일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산다고 믿지만 실은 속한 지역과 집단에 따라 다른 시간을 산다. SF 작가처럼 말하자면, 우리는 각자의 타임머신을 타고 있다. 하지만 이 파편적인 체험을 넘어, 관계된 모든 이들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모으는 사건도 있다. 전 인류에 어떤 식으로든 크고 작은 상흔을 남기는 비극, 바로 전쟁이다.

미디어 홍수의 시대, 공론장은 여전히 유효한가

2026년 3월14일, 현대철학의 흐름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 위르겐 하버마스가 세상을 떠났다. 공적 공간에서 대화와 토론의 중요성을 역설한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을 마주하며 비로소 지금이 21세기라는 걸 실감한다. 하버마스가 주창한 공론장 개념과 의사소통 행위는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까지 현실 정치 속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모색하는 등대가 되어주었다. 앞으로도 공론장은 민주주의사회 질서를 위한 중요한 철학적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필요에 의해 피어난 하버마스의 낙관적 바람은 어쩌면 진즉 과거가 되어버린 통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자각한다. 오늘날의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하버마스가 강조했던 합리적 대화와 공적 토론은 유효할 것인가. 설사 의지를 가지고 방향을 잡더라도 이미지의 홍수로 탁해진 공론장이 여전히 작동할 수 있는가.

공론장의 대전제는 투명성이다. 서로 다른 의견이 누군가의 의도로 지워지거나 편집되는 일 없이 동등하게 노출될 때 대중의 집단지성이 그것을 판별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낙관과 선의가 깔려 있다. 따라서 20세기 미디어의 역할은 이 불투명성과 폐쇄성을 해소하는 것에 집중한다. 권력이 가리고 있는 사실을 드러내고, 고발하고, 보여줌으로써 대중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미디어의 기능도 보이지 않는(혹은 은폐된) 것을 최대한 자세히, 훼손 없이 알려주는 쪽에 집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미디어다. 20세기 말에는 정보가 평등해지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이미 당도한 미래가 널리 퍼질 때, 미래는 예측의 범주를 종종 벗어나기도 한다. 인터넷이 정보의 투명성과 평등을 보장하지 못했던 것처럼, 기술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많이, 제대로 보여주면 공론장에서 제대로 토론이 가능할 것이라던 기대와 달리 정보의 과잉은 도리어 실제를 압도할 위험을 내포한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정보의 폐쇄와 통제를 우려했지만 21세기의 미디어는 정반대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정보는 자극과 쾌락으로 넘쳐났고, 통제할 수 없는 이미지 과잉이 우리를 홍수처럼 집어삼켰다. 2003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중은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못한 충격을 경험한다. 전쟁이 TV를 통해 안방으로 생중계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파괴, 폭력의 순간을 가장 안전한 곳에서 관람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정보의 투명성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미디어 비평가 닐 포스트먼은 그의 저서 <죽도록 즐기기>에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에 의해 파멸될까봐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에 의해 파멸될까봐 두려워했다”고 평했다. 끔찍하고 두려운 전쟁이 미디어를 통해 생중계되는 현실에 대중은 충격을 받았지만 곧 익숙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익숙하고 좋아하는 것의 형태로 쉽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 미디어는 정보를 얼마나 투명하게 자세히 보여줄 수 있는지에 집착한다. 마치 그것이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고 정당하게 부여받은 사명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공론장의 거리 감각을 간과했다. 대중은 여전히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하나의 정보로서 습득한다. 이 순간 정보가 재현되는 방식은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리얼리티의 공식을 따른다. 각자의 현실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최대한 사실에 가까운 감각으로 즐기는 것. 다시 말해 유희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인지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당사자의 일로 다가오진 않기에 안전한 곳에서 구경 하는 감각. 그곳이 끔찍할수록 이곳의 안전함을 확인받는 왜곡된 관찰. 말하자면 편향되고 선택적인 공감의 문제를 고민해봐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공감과 몰입을 넘어, 보편적 정의를 찾아

심리학자 폴 블룸은 <공감의 배신>을 통해 공감에 덧씌워진 긍정적 인식을 해체하며 질문한다. 공감은 정말 도덕적인가. 자신과 가까운 이들, 집단, 공동체에 우선적으로 향하는 선택적 공감은 사적 감정으로 공론장의 투명성을 저해한다는 설명이다. 차가운 전쟁을 안전한 곳에서 재현하는 지나치게 선명한 미디어, 이미지의 홍수는 내 편과 네 편,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감정적 호소로 이어진다. 이라크전 이후 기술 발전에 힘입어 세계는 또 변모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우리는 끔찍한 이미지를 지나치게 자세히, 그리고 생생하게 전달받는 중이다. 이제 어떤 전쟁영화도 유튜브 영상보다 가깝게 그 순간들을 재현할 순 없을 것이다.

이윽고 2026년 3월 미국의 이란 공격 이후 본격적인 미디어 전쟁의 변화를 감지한다. 수많은 정보가 정리되지 않은 채 넘쳐나고, AI 가짜 뉴스가 양산되며, 뉴스로 뉴스를 덮는다. 그리하여 아무리 생생한 정보와 이미지도 백색소음처럼 뭉개져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이라크전이 전쟁의 생중계로 인식을 전환시켰다면 우크라이나, 이란으로 이어지는 전쟁은 대중을 지치고 질리게 만드는 중이다. 시각적 거리, 정보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여기에는 내 일이라는 당사자의 실감이 부재한다. 역설적이지만 자세할수록 더 멀어져 끝내 대상화되는 분열의 이미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이 실감할 수 있는 먼 곳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상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소소한 분쟁, 내 손톱 밑의 가시다. 그건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다. 다만 이미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공론장은 순식간에 쓰레기 같은 정보들로 불투명해진다.

1999년 다르덴 형제가 <로제타>를 들고 칸영화제의 문을 두드렸을 때 우리는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다르덴 형제의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포착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포장하지 않으며, 덜 보여주는(혹은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관객의 각성과 참여를 이끌어낸 윤리를 바탕에 둔 영화 형식이었다. 아마도 20세기의 다르덴 형제는 ‘여기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하는 것으로 영화의 몫을 다했다고 믿었던 것 같다. 21세기의 다르덴 형제는 변했다. 2015년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다르덴 형제는 미학적으로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너무 많이 간섭하고, 설명하고, 가르치려 든다.

나는 이제야 뒤늦게 다르덴 형제를 응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다르덴 형제는 많이, 제대로 알려주는 것으로는 더이상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후 본인들의 연출 스타일을 수정한 것이 아닐까. 시대의 필요에 따라 수행 방식을 바꿔온 적극적인 탐색자였던 다르덴 형제가 21세기에 들어서서 고민한 것은 지진(난민, 전쟁, 사회문제 등)의 진원에서부터 이곳(관객)까지의 간격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자세한 정보, 더 많고 빠른 영상, 너무 가까운 이미지로 넘쳐나는데, 왜 굳이 재현의 영화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기도 하다. 영화는 현미경의 일이고, 개인이 실감할 수 있는 작은 파도의 첫 물결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대중영화는 그 방편으로 손쉽게 공감과 몰입의 언어에 의탁하기도 하지만 길은 하나가 아니다. (가까운) 집단에 대한 과도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가 분열의 촉매로 활용되는 오늘날, 우리는 정보만 제공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진실을 발견하는 경로로서의 영화적 행위의 필요성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재현의 홍수에 가려져 미처 도착하지 못한 사실의 조각을 찾아 나서는 것도 좋겠다.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갑게. 대체로 가깝고 편하고 익숙한 것보다는 불편하고 낯설고 번거로운 것들이 공동체를 병들지 않게 지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