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의 각 시 제목들에는 대부분 ‘그’라는 지시관형사가 달려 있다. 그 파란 차, 그 당나귀, 그 염소, 그 구조물, 그 아파트와 같은 식이다. 그러니까 실재하는 파란 차의 보편성, 실제 염소를 정의할 때 설명하는 말, 우리가 아파트 하면 떠오르는 공통적인 성격 같은 것은 이 시집에서 그다지 중요치 않다. 시인 김유림이 본 파란 차, 시인이 본 구조물, 시인이 설명하고자 하는 아파트, 시인이 본 시점의 바다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시집 제목처럼 이 시집의 시들은 모두 시인이 탐구한 새로운 단어의 설명, 시인이 만든 세계의 단어 사전과도 같다. 시집에 대한 소개글 중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경관의 발명’에 대한 글이 무엇보다 적절한 예시이다. 곰브리치는 “알프스의 경관은 산맥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회화보다 앞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발견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알프스를 그린 회화가 있었기에 알프스의 풍경이 발견됐다라는 주장이다. 그 산이 거기 있었기에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이 있었기에 그 산이 증명됐다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주장에는 불가역적인 설득력이 있다.
시인의 시 중 <그 음악>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음악은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에 나온다. 그 영화는 1997년작으로 한국의 미술작가 김범의 영상 작업 <검은 테이프 위를 달리는 머리>(1991)와는 6년 차이가 난다.’ 그 영화와 그 음악이 원래 존재했더라도 시인이 그 영화를 보고 그 사실을 깨닫고 그 영상 작업을 보고 알았는지의 사실 여부가 이 시에서는 더 중요하다. <그 맥도날드>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맥도날드가 있을 것이다. 처음 내가 버거를 먹은 맥도날드, 내가 처음 해피밀을 받았던 맥도날드가 다르다. 시인에게 ‘그 맥도날드는 그 롯데리아와 달랐다’. 그렇다면 이 시집은 세계의 모든 것들을 시인 나름의 기억으로 재조합하고 기록한 것이니 시인 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을까. 시인이 세계를 제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재구성한 이 시들은 그래서 독자를 낯선 길에 지도도 없이 떨어트려 헤매게 한다. 낯선 골목에 갑자기 버려져 헤매는데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왕수학학원과 앨리스문구점과 방방과 담벼락과 정문과 후문이 있었던 그 동네의 맥도날드를 왠지 알 것만 같고, 안에서부터 열리는 진정한 ‘그 벽장’을 본 것만도 같다. 재구성, 재탐구, 시인이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대로 탐구한 것처럼 독자였던 나도 ‘그 연필’을 들고 나만의 세계를 탐구하고 싶어진다.
그 바다그 바다는 의미를 잃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그 바다에 대해 쓰려고 해도 그 바다는 거부하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딱딱하게 굳어 그 잡지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어째서 잡지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