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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衝)동과 충(揰)돌과 충(衝)격 - 영화 <충충충> 리뷰

사이키델릭한 오프닝 시퀀스. 유충이 알에서 태어나는 이미지와 고등학생 용기, 지숙, 덤보가 생일 파티를 벌이는 모습이 포개진다. 바글거리는 바퀴벌레들, 그보다 더 많은 발과 더듬이가 꼼지락거리면, 세 사람도 그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케이크의 촛불을 불고 술래잡기, 불꽃놀이를 한다. 영화 <충충충>은 갓 태어난 벌레의 이미지와 주인공 세 캐릭터를 번갈아 비추고, 이중인화로 겹치고, 네거티브화하고, 액자화한다. 그러면서 보는 이들에게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연출을 맡은 한창록 감독은 이들을 벌레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유보한 채 영화를 더듬어간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벌레가 사라지고 세 친구가 학교에 모이면 ‘1. 충(衝)동’이란 부제가 붙은 첫장이 시작된다. 세 사람의 관계는 선명하게 다가온다. 키가 작고 가난한 고등학생 용기는 친구 지숙을 좋아한다. 지숙은 용기의 마음을 알지만 받아주지 않는다. 둘 사이의 관계를 잘 아는 덤보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는 이성애엔 관심이 없는 퀴어다. 이 삼자의 관계는 무리지어 다니는 친구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호모 소셜하게 그려낸 <파수꾼>보다 훨씬 복잡하다. 용기는 지숙에게 마음을 다하는 만큼, 다른 도시로 이주해 자신을 방임하는 어머니와도 친밀하게 연결되길 원한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잘 닿지 않는다. 지숙은 극단적으로 마른 몸을 추구하는 ‘프로아나’다. 식욕억제제 ‘나비약’을 먹으며 상습적으로 먹은 걸 게워낸다. 덤보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이용해 온라인에서 여성인 척 사람들을 속이는 ‘넷카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 덤보는 불안을 느낀다. 왕가위 감독이 <타락천사>에서 광각렌즈로 인물들을 왜곡해 담아냈듯, <충충충>은 세 인물을 일그러뜨리며 감각적으로 옮긴다.

세 사람의 묘한 균형이 무너뜨리는 건 많은 학교 배경 영화가 그러하듯 전학생이다. ‘금수저’에 “피지컬이 지리는”(덤보의 표현에 의하면), 팔로어 10만명을 가진 청소년 국가대표 유도선수 우주(정수현)가 전학오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무너져내린다. 특히 지숙이 우주에게 빠진 게 발화점이 되었다. 지숙과 우주는 성적인 관계를 맺지만, 우주는 지숙을 금세 내쳐버린다. 영화의 중간지대 ‘2. 충(揰)돌’에 이르면, 영화는 지숙과 용기가 우주에게 복수를 준비하는 서사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 충돌은 단순히 물리적 부딪힘이 아닌 디지털 세계에서 촉발된 대규모 고속의 부딪힘이란 점이 의미심장하다. SNS를 통한 폭로 자료를 수집하고, 딥페이크 영상을 제작하여 유포하는 등 온라인에서 출발한 적대는 현실 속 인물의 인격 말살로까지 이어진다. 그리하여 맞이한 최종장인 ‘3. 충(衝)격’. 인물들은 물리적 충격을 향해 내달린다. 그 끝이 무엇인지 자신들도 알지 못한 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영화 <충충충>의 차별점은 디지털 환경과 인물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서사가 긴밀하고 유려하게 얽혀 있다는 데 있다. 서사면에서 보자면, SNS 시대에 시선을 받는 자의 위악과 지켜보는 자의 관음증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데까지 갈등 수위를 높였다. 형식 면에서도 누구의 시선인지 알 수 없기에 CCTV의 시점숏처럼 느껴지는 풀숏과 스마트폰 카메라로 확대 촬영한 거친 이미지를 영화에 틈입시켜 관객의 불안감을 높인다. 우리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멀리 떨어진 것을 쉽게 보고, 바로 눈앞의 것조차 더 확대해 보려는 기이한 욕망을 품게 되었다. 지숙이 나비약을 구하러 간 신에서 멀찍이 떨어져 지숙을 담다가 줌아웃하는 풀숏은 서로를 감시하듯 바라보는 시대상을 무의식 차원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 용기와 우주가 충돌하는 액션신은 같은 학교 학생들이 손에 쥔 스마트폰 카메라로 지나치게 확대돼 표현된다. 특히 앞뒤 맥락을 지워낸 스마트폰 이미지는 현실을 무력화하고 충격만 남긴다.

그러나 <충충충>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 선을 긋지 않는다. 연속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디지털 영상들은 때때로 진실을 포착하기에. 영화 <충충충>은 폐허가 된 학교와 아이들을 비추며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덤보가 촬영한 용기의 영상을 영화의 온점으로 삼으며 이를 강조한다. 영상 속 용기는 텀블링을 여러 번 시도하던 끝에 성공해내곤 주먹을 꽉 쥔 채 “나도 할 수 있어”라고 흥분해 외친다. 그 외침 끝에 용기는 많은 감정이 담긴 울음을 터트린다. 늘 절망하고 패배감에 빠져 있는 듯 보였던 용기는 실은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존재였음을 마지막 영상은 증명한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은 과장과 위악을 일삼기도 하지만, 카메라는 종종 진실이 반짝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하기도 한다.

<충충충>은 분명 관객에게 강한 에너지를 전하는 영화다. 보통 이런 결의 영화는 다 보고 난 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와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로 나뉜다. <충충충>의 경우는 후자였고, 그런고로 영화를 재관람하였다. 신기하게도 바퀴벌레의 이미지 때문에 반감이 들었던 생일 파티 중인 세 사람의 몸짓이 순수하고 우정어린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다른 시선을 섞지 않고 용기와 지숙, 덤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면 어땠을까. <충충충>은 이에 대해 말하고 싶어 많은 걸 화려하게 덧붙였던 게 아닐까. 용기를 그의 학업 성적, 가정형편과 등치시키지 않고, 지숙의 신체를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하지 않으며, 덤보의 성정체성을 어떤 기준선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들 자체로만 바라본다면. 바퀴벌레 이미지를 즉각 이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사진제공 엣나인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