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를 직접 기획하고 구성했다. 동기가 무엇이었나.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다. 몇년 전부터 전시를 열고 싶다는 마음은 계속 들었다. 예전보다 나아졌다지만, 분장감독과 분장팀이 현장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영화 제작자, 연출자, 배우들도 많다. 지난 30년 동안 현장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으며 분장의 예술성을 강조하고, 이 일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했는데 가끔은 여전히 자존심 상할 때가 생긴다. 4~5년 전에는 여러 미술관에 전시를 제안하기도 했는데 다 반려됐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다시 기획안을 들춰보면서 ‘더 늦으면 안되겠다. 힘이 있을 때 무조건 하자. 그냥 하자. 하고 싶으니까 하자’라는 마음이 들었고 바로 몸을 움직였다. 30년 동안 분장 일을 한 것도 대단한 목적이나 원대한 꿈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매 순간 그냥 해왔던 것 같다.
- 작품마다의 분장 과정을 남겨놓은 미모스(송종희 분장감독이 설립하고 운영 중인 분장 스튜디오.-편집자)의 작업 노트 등 꾸준히 남겨둔 기록 덕에 완성된 결과물로 보인다. 각 전시품의 해설도 직접 쓴 것인가.
다 직접 썼다. 지난해부터 에세이 한편을 쓰려고 준비 중인데, 그 과정에 적어둔 내용들이 큰 도움이 됐다. 20년도 더 전의 작품들도 있어 기억이 안 날 줄 알고 걱정했는데, 쓰다 보니 생생하게 떠오르더라. 미모스의 작업 노트는 함께 일한 동료들의 자료까지 취합해서 쌓아온 기록이다. 사적으로는 작업 기록을 계속 쌓아두고 있었는데, 체계적인 기록은 2011년 <은교> 때부터 시작했다. 작업 중에 계산해보니 분장팀 5명이 총 1만4천 시간 이상을 이 작품에 쏟았더라. 이런 기록을 본격적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의상이나 미술은 옷과 소품이 남을 수도 있지만, 분장은 사람의 얼굴과 몸에서 지워지는 순간 끝나지 않나. 우리가 직접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리겠다는 마음이 덜컥 들었다.
- 전시물을 살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실패’의 기록도 가감 없이 적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은교> 때 1년을 준비한 1차 테스트를 12시간 치른 후, 그 결과물을 보고 “그런데 나는 기술에 매몰되어 인물을 잃어버렸다”라고 깨달았다는 내용이다. 지금껏 송종희 분장감독의 기술적인 혁신은 종종 강조되어왔다. <은교>를 포함해 <나의 독재자>에서 김일성의 대역 성근(설경구)을 만든 특수분장, <마스크걸> 주오남(안재홍)의 탈모 가발 등이 대표적이겠다. 이번엔 그러한 성과가 있기까지 마주한 실패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 그 태도의 문제를 묻고 싶다.
난 점쟁이가 아니다. 창의적인 사람도 아니다. 이해력도 빠르지가 않다. 그저 노력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인물을 오래 생각한다. 그럼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탁상공론만 거치다가 현장에서 고꾸라진 뒤 원점으로 돌아갈 때도 있고, 내 욕심에 일을 그르친 적도 많다. <집으로 가는 길> 촬영 첫날이었다. 뭐라도 좀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전도연 배우의 얼굴에 기초화장도 많이 올리고 여러 레이어를 쌓았다. 그런데 사실 현장에서는 배우의 얼굴 상태가 최대한 가벼워야 한다. 피부 상태가 깨끗해야 이후에 다른 작업을 하기에도 좋고, 화면에는 분장한 것 같지 않은 상태가 나오니까. 그걸 알면서도 욕심이 앞섰고, 뒤늦게 내 실수를 깨달은 뒤에 아차 싶었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뿐이다. 너무 죄송하다고 싹싹 비는 거지 뭐. (웃음) 다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고 솔직하게 말한 다음에 얼른 다음 단계를 밟아야 한다. 누구나 이런 실수를 할 수 있고, 현장에서 지탄받을 수도 있다. 경력과는 무관한 것 같다. 살아 있는 사람, 생명체를 다루는 일이기에 너무도 많은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는 자기만의 확신과 고집만은 지녀야 한다.
- 살아 있는 생명체를 다룬다는 말이 인상 깊다. 사람의 몸은 매분 매초 달라지니, 그것을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분장사의 근본적인 업일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사람과 하는 일이다 보니 인간관계도 중요할 듯하다. 연출자보다도 배우와 더 긴밀하게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종이기도 하다. 업계에서 워낙 유명한 마당발이고, 전시 사전 행사에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감독·배우·관계자들이 다녀갔다. 비결이 무엇인가.
항상 상대를 섬기는 마음으로 일한다. 내가 약자라는 표현은 아니다. 내 정성을 들여 배우의 몸과 마음을 다 아우르며 상대하는 것이다. 분장팀, 의상팀, 연출자까지 배우를 온전히 섬기고 보호하고 편안하게 해줘야만 작중 캐릭터가 영화에서 놀 수 있게 된다. 온전한 인물이 된다. 배우들이 현장에 오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분장차다. 그날 배우의 몸과 마음 컨디션이 어떤지, 기분과 상태가 어떤지를 일차로 확인할 수가 있다. 분장팀의 업무에 그런 일이 필수인 것은 아니지만, 나는 되도록 그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서 분장차에서 내보내려고 한다. 다들 알지 않나. 어느 날 아침에 어머니가 유독 따뜻한 얼굴로 인사해주면 그날 하루는 왠지 가볍고 기분 좋을 수밖에 없다. 배우의 얼굴뿐 아니라 감정까지 분장하는 분장사가 되고 싶달까. 예전에는 배우들과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 편이 좋았는데, 지금은 그들을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는 쪽이 좋다. 누구나 잠시 마음이 궁핍해질 때가 있는데, 그 허함과 경직을 최대한 풀어주고 싶다.
- 언제부터 그런 변화를 맞이하게 됐나.
글쎄. 한 10년 정도? 40대 후반쯤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변한 것 같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아마 나이가 주는 혜택인 것 같다.
- 전시 얘기로 돌아가면, 전시장 구성을 직접 짰다. 어떤 분위기를 원했나.
이곳이 원래는 가죽 공방이었다. 가죽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면서 되레 고급스러워지지 않나. 그런 면이 큰 메시지로 다가왔다.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화이트룸으로 바꾸기보다 방 테두리나 곳곳에 있는 나무색이나 오래된 흔적을 고스란히 남겼다. 개인적으로는 분장 일이 누군가를 탐구하여 품위를 남기는 작업이라고도 생각해왔기에 더 적합한 공간인 듯했다. 1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아트페어에 간 적이 있는데, 내 취향이 젊었을 때와 달라졌음을 느꼈다. 투박하고 소박하더라도, 강렬하지 않더라도 천천히 시간을 기록한 작품 앞에서 괜히 더 머물게 됐다. 숭고함을 느꼈고 작가를 더 알고 싶어졌다. 나도 이렇게 시간을 기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싶어졌고, 그 마음을 이번 전시의 주제로 가져왔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객들, 관계자들, 그리고 분장 일을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유익한 기록과 시간의 축적이 전해지길 바란다.
- 전시물을 보면 분장의 레퍼런스도 많이 기재돼 있다. 평소 어떤 곳에서 영감을 받는 편인가.
영화로 한정한다면, 절대적으로 각본이다. 분장사는 배우가 인물로 변하기 전에, 글로 먼저 그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글이 주는 무한대의 상상력에 기대서 최대한 머릿속으로 배역의 이미지를 떠올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 회화, 음악, 자연 등을 참고하는 정도다. 콘티나 예시 이미지를 먼저 보면 상상력에 딱 벽이 생긴다. 각본을 보면서 밑줄치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수첩에 메모하면서 생각을 뻗어가는 아날로그적 작업이 가장 편하고 재밌다.
- AI가 발달하며 디에이징 등 스크린 속 얼굴을 변모시키는 기술이 발전 중이다. 분장사의 일과 어떻게 연결될까.
대체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대하는 일이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피의 온도와 현장의 기온을 확인해서 다시 분장하고, 지금 연기에 가장 적합한 감정을 입혀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도 유지해야 하고. 이 직관과 대인관계 능력을 AI가 대체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아직은. (웃음)
- 30년 넘게 이 일을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사전 행사 자리에서 한 감독이 끝없는 ‘자기 구원’을 원동력으로 언급한 것이 기억난다.
나에겐 호기심이다. 매번 다른 배우의 얼굴, 다른 이야기들, 다른 관계들을 접하면 모든 게 다 새롭게 보이고 재밌다.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어진다. 이번에 박종현 감독의 <모둡>이라는 오컬트영화에 참여하게 됐다. 30년 만에 오컬트영화는 처음이다. 평소에 무서운 걸 잘 못 보는 사람이라 걱정이 좀 된다. (웃음) 어떤 방식으로 오컬트의 질감을 구현해야 할지 또 공부해야 한다. 관련 영화도 많이 봐야 할 것이고, 오컬트 장르의 핵심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게 재밌다. 스스로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면 절대 못할 일이다.
- 또 어떤 배우는 앞으로의 30년을 응원했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가 너무 거창하다면, 말을 바꿔서 어떤 상태가 되어 있고 싶나.
글쎄, 30년 뒤면 80대인데 현장에 있을 수 있을까? (웃음) 감사하게도 그럴 수 있다면 여전히 ‘감각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현장에서 먼저 찾아주는 그런 사람.
- 왜, 이번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속 70대 후반의 메릴 스트리프도 현장에서 여전히 감각적이지 않았나.
세상에, 나도 그렇게 늙으면 좋겠네!
<송종희 영화 분장 30년: 반복과 절제로 쌓아올린 시간의 기록>
장소 연희갤러리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706-5
기간 2026년 6월20일~8월9일 주최 미모스(MIM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