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희박한 빛의 강렬함, 영화 <미명> 리뷰

통속적 이야기를 둘러싼 형식의 미가 도드라진다. 여기서 말하는 미란 시각적 화려함이나 정형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명>의 겉면은 소박하다. 전작 <희망의 요소> <절망의 요소>와 일정 부분의 작법을 공유하는 모양새다. 되도록 통속적이고 간명한 줄거리의 골자, 이야기의 세부를 이미지와 사운드로 갈음하는 연출자의 태도, 소규모 프로덕션에 따른 날것의 투박한 화면 질감까지,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 위에서 보아야만 꿰뚫어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미명>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한명의 독립영화 감독이 이처럼 자기의 세계(관)를 우리에게 똑바로 인식시켰다는 점에 있다.

한 화목한 부부가 <미명>의 주연이다. 실제 부부인 이원영 감독 겸 배우와 임정은 프로듀서 겸 배우의 연기는 픽션보다 논픽션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들은 서로를 챙기고, 잘 알아주고, 누가 봐도 아껴준다. 그러나 남편(이원영)이 불의의 사고로 아내(임정은)를 잃으면서 픽션이 힘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다. 이 상실의 시기에 한국은 12·3 비상계엄이라는 이례적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집 안에 틀어놓은 TV뉴스에서는 계속하여 비상계엄 관련 소식이 흘러나오며 모종의 불안감을 가중한다. 사회적 사태와 개인적 사건은 인과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진 않지만,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마주했다는 무거운 대기가 스크린 전반에 퍼진다.

남편이 잃은 것은 아내뿐만이 아니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자, 남편은 목소리를 잃는다. 병원에서도 별다른 해결책을 내주지 못하고, 전공 분야에 관련한 몽골의 전통 가창 ‘흐미’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으려고도 하지만 쉽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기계에 적어서 AI 음성으로 전환하는 것만이 소통의 방법이다. 말로 투정을 잘 부리던 성격의 표현력, 몽골 역사를 연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지루한 말주변도 모두 사라진 셈이다. 즉 개성과 직업적 능력을 포함한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가 <미명>이다.

불분명함을 찍는 영화

그럼에도 희박한 빛이 이 남자에게 비친다. <미명>(微明, The Glimmering)이라는 제목의 뜻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세계가 짙은 어둠에 휩싸일수록 작은 빛은 평소보다 더욱더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어둠에 빨려 들어가 있던 남편 앞으로 아내의 혼령이 희미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모호한 형태지만 너무도 강렬한 빛의 현시다. 직시할 수 없고, 관객도 명확한 형태로 볼 순 없으나, 분명히 아내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발코니의 통창에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다. 가시적으로 불명확하더라도 아내를 절절히 그리워했던 마음으로 본다면 무엇보다도 눈부신 빛의 굴절이다.

<미명>은 사람의 마음이 빚어낸 빛 외에 모든 것이 불분명한 희박함의 영화다. 통상적 숏의 사이즈나 앵글을 거부한 숏들의 연쇄는 이런 저런 시공간의 논리를 흩트리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설정들이 그 원인의 규명을 거부한 채 속속들이 자리를 보전한다. 혼령이라는 존재의 원천은 물론이거니와 사건 사이의 이음매도 퍽 허전하다. 거칠게 말할 때, 영화의 주안점을 줄거리와 플롯의 개연성과 인과관계로만 본다면 그 가치가 희박해지는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미명>이 영화로서 손에 쥐는 어떠한 가능성의 문제에 있다. 아내의 혼령을 유리창 위 빛의 굴절로만 볼 수 있다는 영화 내부의 엄밀한 규칙은, 달리 말해 현실에 불가한 어떤 현상이 빛의 논리에선 가능해진다는 의미와 같다. 빛의 논리란 결국 영화라는 매체의 문제, 카메라의 원리와 능력이라는 범주와 결부한다. 넓게 비교하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1966)이나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의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2010)처럼 카메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이미지의 진실을 갈구하는 작품이 <미명>인 것이다.

그 진실의 원동력이 오로지 하나,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마음이란 점이 <미명>의 아이러니를 완성하는 핵심이다. 형식적이고 초현실적이며 모호한 영화의 표면이 꽤 진부하고 직관적인 이야기 위에서 더욱더 강한 빛을 발한다. 이 모순이 종래에 접하기 어려웠던 긍정적 괴리감으로 작동한다. <미명>을 감상한 뒤 느껴지는 감흥이 형식의 조형미에서 오는 것인지, 그것 아래에 있는 이야기의 진정성에서 오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결론에 다다를 때 <미명>의 마력을 불가피하게 인정하게 될 것이다.

소리의 내러티브

<미명>은 이원영 감독이 꾸준히 언급하는 것처럼 소리의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영화다. 예를 들어 아내의 혼령이 찾아올 때 흐르는 어느 가요의 허밍은 가사가 사라진 멜로디의 부스러기만을 흩뿌린다. 헨젤과 그레텔이 쫓던 빵가루와 같이 단서와 신호로만 존재하는, 글로 온전히 옮겨 적을 수 없는 소리의 부피가 <미명>을 주조하는 것이다. 노래뿐만이 아니다. 인물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먹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 면도하는 소리, 눈이 와 바삭거리는 나뭇가지의 소리, 12·3 비상계엄의 정체를 밝히는 뉴스 아나운서의 소리, 부부의 일상적인 대화 소리, 흐미와 남편의 흐느낌 등 <미명>의 주된 흐름은 소리에서 발생한다. 소리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살피는 듯하다.

중요한 소리가 하나 더 있다. “지금 여기 있다면 센서 등을 켜줘.” 남편이 허공에 대고 계 속하여 내뱉는 대사다. 아내의 혼령을 다시 부르려는 것이다. 물론 직접 발화하진 못하고, 기계음의 음성을 빌린다.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기이한 말이다. 사람의 체온을 인식하는 센서 등이 육체 없는 혼령에 의해 켜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는 기실 <미명>이 얼마나 소리의 역능에 의지하는지 알려주는 징표다. 우리가 죽음 너머의 세계를 총체적 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다면, 그 경로는 만지고 느끼는 촉감의 문제, 보고 보이는 시각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더, 들리고 부르는 청각의 영역에 주로 자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요의 허밍, 센서 등이 켜지는 소리, 자신의 말에 감응하는 상대의 소리가 인식되었을 때 부재는 비로소 존재로 변한다. 그다음에야 모호한 빛의 형상은 아내의 모습으로 마음의 상에 맺히게 된다. 이러한 전제로 <미명>을 감상한다면 영화의 마지막에 제시되는 어떠한 사진의 이미지가 무슨 의미인지 고심할 수 있을 것이다.

<미명>이 사운드디자인에 큰 미학적 비중을 둔 만큼, 영화의 소리를 세밀히 들을 수 있는 극장에서만 작품을 상영할 예정이다. OTT 등 부가 판권의 공개 계획은 없다. 빛과 소리의 문제, 요컨대 영화의 존재론적 고민을 절절한 멜로드라마에 꼬아낸 작품의 성질답다. 아, 그렇다고 하여 <미명>이 줄곧 암울하고 무거운 비극인 것만은 아니다. 종종 드러나는 비전문 배우들의 어색하고 멋쩍은 움직임, 일상의 때가 묻어나는 부부의 대화, 분위기를 환기하는 기계음의 냉소 등도 <미명>을 구축하는 즐거움의 요소들이다.

사진제공 시네마토그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