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배워야 하는 감각
영화가 끝나고 혼자 극장을 나섰다. 마치 상영관을 통째로 빌린 듯, 오로지 홀로 <침묵의 친구>를 보았다. 괴테의 <나그네의 밤 노래>가 낮게 깔리고, 점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롱테이크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장면 앞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무도 없는 상영관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이 질문을 붙들고 영화를 다시 생각했다.
영화의 첫 순간은 거대한 이미지가 아니라 소리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바스락거림. 화면 가득 채운 은행알에서,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생명의 소리였다. 작고 여린 것이 빛쪽으로 몸을 비트는 동안, 영화는 관객에게 거의 아무 설명도 주지 않는다. 이 장면은 자연다큐멘터리의 경이도, 생명의 신비를 과장하는 장식도 아니다. 우리가 너무 오래 배경으로만 여겨온 존재가, 인간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 자기 시간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일디코 에네디는 자연을 스크린의 배경으로 대상화하던 기존의 영화적 관습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관객의 지각을 처음부터 느리게 만든다.
일디코 에네디의 작품을 관통하는 줄기는 <나의 20세기>(1989)에서부터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2017)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현실과 환상의 접경’에서 피어나는 소통의 가능성이었다. 꿈, 환각,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파편화된 개인들이 어떻게 서로의 내면에 가닿을 수 있으며 연결될 수 있는지를 탐구해왔다. <침묵의 친구>에서 그 탐구는 인간이라는 종(種)의 한계를 넘어 ‘은행나무’라는 타자에게로 확장된다.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데 익숙했던 카메라가 건물, 벽면의 그림자, 나무, 잎, 뿌리, 빗방울, 벌레, 동물 등 인간 바깥의 존재들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나 이 전환은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사유해보라고 끈질기게 말하고 있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나무는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의 일부이거나, 인물이 걷고, 사랑하고, 기다리고, 헤어지는 동안 배경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침묵의 친구>에서 나무는 뒤에 있지 않다. 카메라는 얼굴보다 나뭇가지를 먼저 보여준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인간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축물의 음영 속에 묻히지만, 다른 타자들은 선명하게 자리를 잡는다. 웡 교수(양조위)는 마르부르크의 낯선 대학에 도착하지만, 그를 화면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 연구실 창밖을 바라보는 웡 교수의 얼굴은 유리창 표면에 반사된 복잡하게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의 틈새에서 살짝 보여주거나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보인다. 인간의 얼굴이 또렷해지기 전에 나뭇가지의 선들이 먼저 화면을 차지한다. 이때 카메라는 인간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차지해온 과도한 자리를 조금 낮춘다.
그 낮아진 자리에서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대한 은행나무 위에서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부엉이, 둥치의 빈틈에서 몸을 웅크려 졸고 있는 고양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부딪히며 내는 사물들의 미세한 소리와 새소리들이 사운드트랙을 채운다. 암흑 속에서 황금빛 선형의 구조로 가시화되는 뿌리망 숏은 인간의 육안이 닿지 않는 땅 아래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네트워크를 현미경적 시선으로 보여준다. 또한 카메라는 오랜 세월의 풍파를 간직한 거칠고 울퉁불퉁하게 굳어진 나무의 껍질을 묵묵히 응시한다. 그리고 그 거친 껍질을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벌레와 장수풍뎅이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깊은 밤 인간들이 모두 사라진 대학 교정을 고요히 찾아오는 여우의 신비로운 눈빛을 담아낸다.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화면은 비어 있지 않다.
이것은 서사를 진행하기 위해 연출되거나 장식된 미장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해석을 거부하는 자연의 감각, 날것의 실재에 다가가려는 이미지다. 감독이 보여주는 모든 장면은 사물들이 가득 채운 공간에 인간이 잠시 ‘끼어들었음’을 고찰한다. 하얀 눈 쌓인 땅에 찍힌 동물의 발자국, 그 곁에 떨어져 홀로 누운 은행잎 한장, 봄이 오면 가지 끝에서 터져 나오는 새싹의 접사. 이 장면은 웡 교수가 마르부르크에 도착하기 전에도 이 나무는 겨울을 견뎠고, 그가 떠난 후에도 봄은 다시 오리라는 것을 조용히 선언한다. 가지에서 가지로 번지는 거미줄처럼, 물 위에 흔들리며 뒤집히는 수면의 반영처럼 이 영화의 사물들은 제각각 고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물질적 공명의 망(網) 안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사물들의 세계, 벌레와 여우와 나무가 이루고 있는 장구한 자연 속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뒤늦게, 슬그머니 끼어들었는가를 깨닫게 만든다.
인간은 항상 나무를 올려다본다. 반대로 나무는 카메라의 눈으로 인간들의 소란스럽고 유한한 삶을 묵묵히, 그리고 아득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이처럼 전복된 시선이 인간과 나무의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구토 시퀀스’다. 카메라는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 대신 거친 나무껍질과 쏟아지는 토사물의 끈적한 질감을 응시하며, 신체가 무너지는 배설의 찰나에 인간을 나무와 동일한 ‘물질적 평면’ 위에 놓는다. 벤치에 주저앉아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는 웡 교수의 시선은, 세계를 통제하려던 자가 거대한 자연의 그물망에 포위되어 느끼는 무력함을 드러낸다. 이윽고 바깥의 정적인 실루엣을 뚫고 나무의 심연으로 침투한 카메라는 텅 빈 스크린 위로 뇌 신경망처럼 뻗어나가는 황금빛 전기신호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대지에 고정된 부동의 사물처럼 보였던 나무가 실은 내부의 물질을 끊임없이 순환시키고,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운동체임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인간의 불쾌하고 끈적한 토사물은 나무의 경이로운 황금빛 선의 흐름으로 현현한다. 그것은 스포트라이트가 꺼지는 최초의 순간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끄는 카메라
새싹의 성장이 멈춘 뒤 이어지는 시퀀스는 아직 문명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아기의 옹알거림으로 시작된다. 머리에 촘촘한 전기센서 모자를 쓴 아기가 웡 교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아기의 뇌파와 연결된 모니터 화면 위에는 수많은 푸른색 선들과 다채로운 기하학적 파형들이 흐르고 있다. 디지털 표면 위로 흐르는 음향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전자음과 유기적 파동이 뒤섞인 미묘한 질감의 소리다. 에네디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의 이성적이고 고도화된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그러나 분명히 우주와 소통하고 있는 물질의 원초적 떨림과 박동을 영화적 영토 안으로 끌어들인다.
웡 교수는 성인의 뇌와 아기의 뇌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한다. 성인의 뇌는 스포트라이트처럼 특정 지점을 집중적으로 비추며 주변을 지워나간다. 효율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지각이다. 어떤 대상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의 윤곽을 잡아내고, 쓸모없는 정보를 삭제하며, 핵심만을 취한다. 이것이 우리가 ‘집중한다’라고 부르는 행위다. 나이가 들수록 이 삭제는 더 정교해진다. 우리는 점점 더 잘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많은 것을 보지 않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아기의 뇌는 랜턴처럼 전방위로 열려 있어 모든 자극에 동등하게 반응한다. 아직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배우지 않은 뇌. 세상의 모든 것이 같은 밝기로 빛나는 상태.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이 상태를 잃어버린다. 아니, 더 정확히는, 버린다. 효율을 위해.
흥미로운 것은 에네디가 이 물음을 나무에 연결한다는 점이다. 나무는 중앙집중식 뇌가 없다. 뿌리, 줄기, 잎, 세포 하나하나가 분산된 감각 지점으로서 동시에 환경을 처리한다.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효율을 위해 포기한 그 전방위적 감각, 아기의 뇌에 아직 남아 있는 그 랜턴 의식이, 나무에게는 생명 자체의 방식이다. 나무는 아기처럼 세계를 감각한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나무가 아기보다 훨씬 오래된 방식으로, 더 넓은 면적으로, 더 오랜 시간 동안 세계를 감각한다. 뿌리가 땅속 깊이 뻗어가며 만나는 흙의 성분, 곰팡이와 균류와 나누는 화학적 대화, 잎사귀가 햇빛의 방향을 읽는 미세한 움직임. 이 모든 것이 나무의 지각이다. 인간의 스포트라이트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비를 맞으며 떨리는 은행잎 클로즈업 장면이 떠오른다. 화면 가득 채워진 잎사귀 위로 빗방울이 연속해서 떨어지고, 잎은 그 충격으로 진동하며, 그 진동은 또 다른 잎으로 전파된다. 이 장면은 잎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운동 자체가 이미지임을 보여준다. 잎의 윤곽선은 운동의 궤적이고, 빗방울의 반투명한 선들은 공간을 가르는 벡터이며, 그것들 사이의 진동과 공명은 화면 전체를 하나의 살아있는 장(場)으로 만든다.
에네디의 카메라에서 이미지는 대상을 복사한 결과라기보다, 운동이 곧 물질임을 증명해 보인다. 스크린 위의 잎, 빗방울, 뿌리, 전기신호는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끊임없는 작용과 반작용을 주고받는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경유해 말한 ‘운동=이미지=물질’임을 추상적 이해에서 감각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인간의 지각이 그 무한한 흐름 가운데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잘라내는 일종의 빼기라면, 에네디의 카메라는 그 빼기를 잠시 늦춘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는 잎의 떨림, 뿌리의 박동, 빗방울의 충격을 다시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처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전체 집합이 바로 ‘물질’이다. 작용과 반작용으로 끊임없이 물질들이 변해가는 ‘물질-유동성’(Matière-écoulement)을 보여주며, 영화는 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끄고 우주의 본래 상태로 확장된다.
인간의 눈이 바라보는 나무는 언제나 대지에 강고하게 뿌리를 박은 채 한치의 미동도 없이 고정되어 있는 정적인 물질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협소한 지각 능력이 만들어낸 착시일 뿐이다. 영화 속 웡 교수의 모니터 선들은 나무라는 거대한 물질의 내부에서 얼마나 무수한 운동이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른 미세 전자의 속도로 끊임없이 내부 물질을 순환시키는 운동을 수행하고 있다. 그레테가 내뿜는 담배 연기에 은행잎이 미세하게 떨리며 세포들이 반응하는 장면처럼.
영화는 스포트라이트 의식이 지워온 세계의 실질적인 운동을 스크린 위에 복원하려 한다. 그 복원의 도구가 바로 카메라다. 웡 교수가 프랑스 연구원 알리스(레아 세두)와의 대화로 은행나무에 관심을 가지면서 전기센서 모자를 쓰고 나무둥치에 기대앉는 장면이 첫 번째 교감 장면이다. 두 번째는 비가 내리면서 비를 맞는 은행나무가 반응하는 것을 직감으로 느낀 웡 교수가 자신도 욕실에서 센서 모자를 쓰고 샤워기를 트는 장면이다. 그의 등에 떨어지는 물은 빗방울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샤워가 아니라 나무가 비를 맞는 것과 같은 순간이다. 이것은 스포트라이트를 끄는 행위다. 세 번째는 센서 단자에 연결된 은행잎이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에 잎맥이 초록 물질로 가득 차며, 세포막이 투명하게 흐르는 숏을 보여준 후, 자연의 일부가 된 웡 교수의 벌거벗은 장면이 나온다. 물질-유동성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융합으로 나아간다. 정교한 옷을 벗어던지고 자기 자신을 기어코 나무와 동등한 층위의 순수한 ‘물질’로 환원하려는,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깊고 묵직한 자기 고백이다.
영화의 절정은 극적인 사건이 아닌 수분(受粉) 장면이다. 1832년부터 홀로 교정에 서 있던 이 나무가 암나무라는 사실을 웡 교수가 알게 된다. 알리스 박사의 도움으로 수나무의 정자를 받아 나뭇잎에 수분을 매개하는 대목은 영화가 구축해온 비인간 중심주의와 가장 위험하게 충돌한다. 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끄고 나무의 시간에 귀 기울이려던 영화가, 바로 그 순간 인간의 손을 통해 식물의 생식 과정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웡 교수의 행위는 과연 교감인가, 침입인가. 아니면 인간이 끝내 자연의 가장 은밀한 과정마저 매개하고 연출하려는 또 다른 욕망인가. 에네디는 이 모순을 완전히 봉합하지 않는다. 수분의 과정을 작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비인간 존재에게 다가가려 할 때 언제나 개입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이 불안 때문에 수분 장면은 화해의 순간이 아니라, 영화의 윤리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순간이 된다.
세 가지 시간, 하나의 기억
<침묵의 친구>는 동일한 공간에서 전개되는 세 시대를 교차편집한다. 1908년의 그레테, 1972년의 청년 하네스, 2020년대의 웡 교수. 각 시대는 서로 다른 매체로 표현된다. 1908년은 흑백 35mm, 1972년은 컬러 16mm, 2020년대는 디지털. 이 선택을 시대 구분의 편의로만 읽는 것은 아쉽다. 각 매체는 서로 다른 물질적 질감을 지닌다. 35mm의 입자는 거칠고 유기적이다. 16mm의 컬러는 약간 과포화되어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열기를 물질적으로 담는 것 같다. 디지털은 차갑고 선명하며, 그 선명함이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세 시대를 모두 관통하는 하나가 있다. 은행나무다. 같은 나무가, 각기 다른 물질적 텍스처 위에서, 살아 있다. 나무는 매체를 초월하는 유일한 존재다. 에네디는 단순히 세 시대를 병치한 것이 아니라 ‘매체-신체-시대’를 하나의 삼중 변주로 묶어놓았다. 즉, 각 시대의 필름 입자(매체의 물질성),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의 고독 양상(신체의 물질성), 그리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적 공기(역사의 물질성)가 서로 평행하게 떨림을 일으키며, 그 떨림 전부를 은행나무 한 그루가 묵묵히 수신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정교한 영화적 장치다.
1908년의 흑백 35mm 매체는 과거를 지시하는 시대 표시의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영화의 촉각적 질감을 구성하는 물질적 토대다. 카메라는 매끈한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신, 거칠고 깊게 파인 나무껍질의 요철을 스크린 위에 묵직하게 담아낸다. 흑백의 강렬한 콘트라스트 속에서 은행나무의 표면은 단순한 식물의 외피를 넘어, 아득한 시간의 풍파가 새겨진 거대한 협곡처럼 다가온다. 매체의 이 거친 입자감은, 가부장적이고 제도적인 학문의 언어에서 배제된 채 침묵을 강요당했던 그레테의 짙은 고독을 물리적인 무게감으로 표현한다.
하숙집에서 쫓겨난 그레테가 사진사의 조수가 된다. 그 사진사는 그녀에게 말한다. “사진이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것은 흔한 착각이며, 사진은 현실의 연약한 본질을 탐구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프레임 안에 담긴 것보다 프레임 바깥에 담기지 않은 것에 더욱 본질에 가까운 진실이 있다고.” 이 대사는 영화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고백하는 순간처럼 읽힌다. 카메라가 담아내는 스크린 안의 모습은 삶의 진실과 오히려 동떨어져 있을 수 있다. ‘영화가 진실을 기록한다’는 믿음 역시 착각이다. 에네디는 이 사실을 알고도 카메라를 들었다. 프레임 바깥의 것을 향해,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카메라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그것이 이 영화에서 나무껍질을 찍고, 껍질을 오르는 벌레를 찍고, 거친 껍질을 뚫고 올라온 작고 여린 잎을 찍는 이유다. 그리고 더 나아가, 프레임에 잡히지 않는 뿌리망의 황금빛 신경, 잎 세포 사이로 흐르는 보이지 않는 수액의 운동까지 굳이 시각화하려는 이유다. 영화는 자신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고 분투하고 있다.
1972년, 시위와 농성이 당연시되던 캠퍼스에서 홀로 풀밭에 누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읽는 청년. 그가 읽고 있는 양장본 책 표지의 거친 가죽 질감과 피부의 솜털 위를 기어가는 작은 벌레 숏은 16mm 특유의 따뜻하고 들뜬 색조 속에서 촉각성을 극대화한다. 그 색감은 시대의 이념적 열기를 머금고 있지만, 풀밭에 반쯤 묻힌 하네스의 신체는 오히려 그 열기에서 비껴나 있다. 청년 하네스는 동료 여학생 군둘라의 제라늄을 보살피며, 공동체로부터 자발적으로, 또 어느 정도는 타의에 의한 고립을 선택한다. 그의 고독은 그레테의 고독과 다르다. 모두가 ‘우리’를 말하는 시대에도, 어떤 사람은 혼자 식물에게 물을 주고, 시를 읽고,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그가 제라늄을 돌보는 행위는 거창한 저항이 아니다. 다만 시대가 요구하는 목소리의 크기와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붙드는 작은 몸짓이다. 영화는 이 작음을 하찮게 다루지 않는다.
2020년대의 웡 교수. 홍콩에서 온 이방인 신경학자. 텅 빈 대학 교정에서 겪는 철저한 고립과 디지털 세계의 차가움. 그는 화면과 데이터와 원격 연결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진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디지털 이미지의 차가운 선명함이 그 공허함을 물질적으로 표현한다. 그 고독이 그를 나무쪽으로 이끈다. 이것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잃어버린 접촉을 회복하려는 몸의 반응처럼 느껴진다. 그에게 나무는 연구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잃어버린 감각의 거울이다. 그는 나무를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 나무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닫힌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해왔는지를 알게 된다.
이렇게 세 시대, 세 매체, 세 신체, 세 종류의 고독은 서로 다른 떨림으로 은행나무와 연결된다. 1832년에 심어진 이 은행나무에게 세 시대는 선형으로 흐른 시간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 기억들이다. 나이테 하나하나에, 뿌리가 뻗어가며 만난 흙의 성분에, 껍질의 결에 새겨진 흔적들. 나무의 기억은 뇌에 저장된 추상적 기록이 아니라 몸 전체에 분산된 물질적 역사다. 나무는 그 역사를 지우지 않는다. 나무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배제되어 찾아오는 인간들을 아무런 말없이 받아들인다. 1908년에도, 1972년에도, 2020년대에도. 매체가 바뀌고 신체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받아내는 자는 1832년의 은행나무였다.
이것이 <침묵의 친구>가 말하려는 것이다. 나무는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내부가 텅 빈 정지가 아니다. 껍질 아래에서, 뿌리망 속에서, 세포막을 흐르는 수액 안에서 물질-유동성은 흐르고 있다. 침묵은 운동의 바깥이 아니라, 운동이 인간의 지각에 닿지 않는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식물의 언어는 인간의 이념적 언어 바깥에 있다. 그 언어는 판단하지 않는다. 배제하지 않는다. 인간은 식물을 움직이지 못하고 소리내지 못하는 침묵하는 대상으로, 박제된 연구 재료로 대상화해왔다. 그런데 사실 식물은 항상 인간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신호는 매체와 신체와 시대를 가로질러 동일한 진동수로 울린다.
침묵의 친구
2시간27분이라는 장구한 영화적 호흡을 마무리하는 최종 엔딩 시퀀스는, 관객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를 솟구치게 만든다. 상영시간의 끝자락에 이르러, 카메라는 마침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전경을 엄숙하게 드러낸다. 이 시각적 스펙터클과 함께, 사운드트랙에는 대문호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나그네의 밤 노래>가 서서히, 그리고 낮고 묵직하게 깔리기 시작한다.
일디코 에네디 감독은 여기서 어떠한 편집의 단절도 허용하지 않은 채, 무려 3분에 이르는 극도로 완만한 롱테이크로 노란 은행나무의 전경을 서서히 화면 가득 열어낸다. “모든 산봉우리 위에는 고요가 깃들고, 모든 우듬지에서 그대는 느끼지 못하네. 한 가닥 숨결조차도. 숲속의 새들도 잠이 들었네. 기다리라, 머지않아 그대 또한 쉬게 되리니.” 괴테의 시는 산봉우리에서 나뭇가지끝으로, 숨결로, 새로, 마침내 나그네 자신에게로 수렴하는 운동 구조를 가진다. 고요는 바깥에서 안으로 점진적으로 침투하며 비로소 화자 자신이 그 고요의 대상이 된다. 에네디의 롱테이크는 이 수렴 운동을 역전시킨다. 카메라는 아주 서서히 물러나며, 노란 은행나무의 전모를 천천히 드러낸다. 관객이 점차 나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고요가 관객쪽으로 스며들어온다. 인간의 지각이 세계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물질-유동성이 인간쪽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음을 마지막으로 새긴다. 관객이 나무를 이해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관객에게 도달한다. 은행알의 바스락거림도, 구토 시퀀스의 황금빛 신호도, 비를 맞는 잎의 진동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인간이 은행나무를 향해 다가간 것이 아니라, 은행나무가 인간에게 닿는 것을 마침내 허락한 것이다. 롱테이크의 3분은 그 허락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3분은 관객에게 친절한 서사적 사유의 여백을 제공하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중심의 가쁜 호흡을 강제로 멈추게 하고, 식물적 시간의 중력 앞에 관객의 호흡을 내려놓게 만드는 시간이다.
<침묵의 친구>는 세계의 중심이라 믿어온 인간의 시선을 타자로 돌리고, 이미지들은 서로의 관계하에 모든 부분들에서 변주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물과 입자가 유동적으로 흐르는 우주의 거대한 물질적 흐름 속에서 “세계의 아무 지점에서, 아무런 시간적 순서에도 상관없이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사물의 실재를 순수하게 보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인간 아닌 것의 시간쪽으로 카메라를 기울인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울었을까.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동안 보지 않기로 ‘선택해온’ 거대한 운동의 세계가, 마침내 스크린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에 마주한 공명의 감각이었다. 언젠가 숲에서 꾸불꾸불하게 자라난 나무를 껴안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침묵하는 친구는 한번도 침묵한 적이 없었고, 우리가 듣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너무 늦은 인사를 건네는 자의 반성이었다. 극장을 들어설 때의 은행나무는 극장을 나설 때도 거기 있다. 단단하고 거친 껍질 안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을 황금빛 신호를 마주하는 것은, 이제 각자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