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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가속이 향하는 곳, 얄 사다트 평론가가 본 <호프>

20여년 동안, 나를 포함한 어떤 부류의 프랑스 영화평론가들(물론 이런 부류는 프랑스 밖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은 이 세기가 안겨준 혼란의 감각에 필적할 만큼 거대하고, 혼돈스럽고, 광기에 찬 블록버스터를 간절히 기다려왔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2000년대 이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미국에서는 9·11이라는 대재앙을 향한 반응으로 이른바 ‘파괴 포르노’(destruction porno)가 넘쳐났지만,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은 작품은 많지 않았다. 특히 슈퍼히어로영화들은 시네필들에게 금세 진부한 것이 되었고, 심지어 그 영화들의 주요 관객인 10대들마저 지치게 만들었다. 이에 많은 동료 평론가들처럼 나 역시 희망을 접고, 메이저 스튜디오가 내놓는 SF 대작을 빠짐없이 챙겨 보는 노력을 거두었다. 어느덧 성인을 위한 블록버스터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을 누구보다 존경하는 나조차 <아바타: 불과 재>를 보지 않고 넘어가려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괴물들이 등장하면서도 기적처럼 시대정신과 공명하는 블록버스터를 목도할 가능성은 21세기의 여명기, 즉 <킹콩>(감독 피터 잭슨, 2005)과 <괴물>(감독 봉준호, 2006) 사이 어디쯤에선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 광기의 에픽이 <호프>라는 이름으로 도착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없다. 우리는 애초에 희망을 잃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영화가 나홍진 감독에게서 나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전작 <곡성>을 2016년 칸영화제에서 처음 보고 무척 사랑했지만, 격렬한 에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게 <곡성>은 서서히 작용하는 독처럼 당시의 시대적 공기가 스민 작품이었고, 나홍진 감독은 묘한 예지력으로 사회적 전염병을 감지해냈다. 지금 <곡성>을 다시 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미리 그려낸 듯 익숙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바이러스의 확산, 외국인 혐오와 국가간 불신의 부활, 그리고 남성성의 위기까지, 지난 몇년간 현실에서 드러난 거의 모든 병증이 이 영화 안에 담겨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인공 종구(곽도원)는 대단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는 보호자이자 가부장, 그리고 무엇보다 한 남성이라는 위치에서 용기를 발휘하면서도, 그 역할을 감당하는 일을 몹시 불편해하는 인물이다.

<호프>는 자연스럽게 <곡성>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외계인들이 곧 함대 일부를 지구에 들이받을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어떤 특정 사건을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최근 몇년의 혼란, 그리고 점점 더 무모해지는 전쟁, 서구와 한국에서 똑같이 분출되는 정치적 위기를 통해 악(evil)이 전 세계를 떠도는 방식에 관해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분노하며, 그러나 동시에 장난스럽게 응답한다. 이 영화는 통념을 뒤엎는 방식으로, 격변하는 현실이 어떻게 인간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는지에 관해 포착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갑자기 가능한 듯 느껴지는 일종의 경악 상태에 관해서도 탐구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호프>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영화는 압도적인 에너지와 절박함, 그리고 붕괴의 감각을 재현해 관객을 변성된 의식, 즉 거의 역설적인 쾌감(paradoxical euphoria)에 가까운 상태로 이끈다. 그 안에서는 아무리 황당한 사건이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원리 위에 세워져 있다. 첫 한 시간은 믿기 어려울 만큼 놀랍고, 스펙터클하며, 완벽하게 조율된 추격 시퀀스로 이뤄져 있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관객은 충격에 휩싸이는 동시에, 이후 어떤 일이 벌어져도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까지도 말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외계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풍자극도, 진정한 영웅성과 꼭두각시 같은 우스꽝스러움을 오가는 도망자들의 모습도 모두 그렇다.

무엇보다 훌륭한 지점은 두개의 차원이 충돌하는 방식이다. 하나는 땅에 단단히 발을 붙인 일상의 차원이다. 이 차원은 도로 한가운데 놓인 소의 사체나, 해술(임현식)이 용변을 보기 위해 숨어들었다가 흉포한 괴물과 맞닥뜨리는 장면처럼 지구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상황과 평범한 디테일로 이루어진 세계다. 다른 한편에는 천상적이고 우주론적이며, 현실의 스케일을 뛰어넘는 차원이 존재한다. 미국에서 흔히 쓰는 ‘larger than life’라는 표현은, 어쩌면 위대한 블록버스터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인지도 모른다.

<호프>에서는 이 두 가지의 차원, 즉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는 것과 땅에 붙박인 채 남아 있는 것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운동이 완벽하게 작동한다. 우리를 들뜨게까지 만드는 카오스와 거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액션 자체는 놀라울 만큼 명확하고 단순한 궤적을 그린다. 폭풍 전의 고요를 묘사하는 도입부 이후, 추적이 시작되면 경찰관들이 괴물을 쫓는 추적은 어느 순간 역전된다. 인간들이 벌이던 사냥은 도주로 바뀌지만, 그 역시 처음의 운동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은 것일 따름이다. 그 결과 다른 영화였다면 개연성이 없어 보였을 수도 있는 혼란과 환상적인 반전들에도 불구하고, 유려하고 놀라울 만큼 따라가기 쉬운 액션의 흐름이 유지된다. ‘희망’의 시각적 풍요로움은 바로 이러한 움직임의 단순성 덕분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에 저항 없이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믿는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즉각적으로 이해 가능한 하나의 원초적 충동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악의 근원을 향해 달려가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달려가거나. 관객의 눈이 이 추진력에 너무나 쉽게 이끌려가기 때문에, 나홍진 감독은 보통의 블록버스터라면 묻혔을 미묘한 디테일과 시각적 아이디어들로 프레임을 채울 수 있었다. 가령 영화의 첫 번째 중요한 발견인 배가 갈리고 내장이 드러난 동물이 어떻게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될 하나의 특징을 조용히 예고하는지 생각해보라. 내장이 도려내진 듯한 마을, 꿰뚫린 인간의 시체들, 산비탈에 충돌한 우주선 등등을 말이다.

그리고 이 충돌의 흐름은 땅에서 하늘까지, 극도로 평범한 것에서 극도로 상상 불가능한 것까지 치솟는 크레셴도를 만들어낸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재난들, 그리고 우리의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하며 맞닥뜨리는 끝없이 악화되는 뉴스들과 우리가 맺고 있는 당혹스러운 관계가 공명하는 지점이다. 이제는 어떤 일도 너무 거대하거나,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일어날 수 없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상황이 도저히 더 나빠질 수 없다고 우리 스스로 확신하는 순간, 현실은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듯 더 나빠진다. 우리는 다만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을 지켜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을 기괴한 방식으로. 이제 비극은 희극과 공존할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블록버스터의 멈출 줄 모르는 운동량과도 공존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호프>를 움직이게 하는 감정이다.

나는 나홍진 감독이 악에 몰두했던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을 깊이 존경한다고 알고 있다. 프리드킨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이기도 한데, 나홍진 감독이 그를 좋아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프리드킨 감독 또한 초기 영화들에서 폭력적이고, 불안감을 남기며, 폐쇄적인 형태들을 통해 악의 문제를 탐구했었다. 이후 <프렌치 커넥션>에서는 악을 쫓는 추적이 이전보다 빠르고 광분에 찬 것으로 변모했다. 프리드킨 감독은 놀라운 자동차 추격 장면들을 밀어붙였는데, 이는 그가 테크놀로지와 범죄, 정치 네트워크의 확장, 대중매체 등을 통해 세계 자체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호프>를 보면 나홍진 감독 역시 악의 순환이 훨씬 더 거대한 가속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영화적 연출은 그에 맞춰 가속화되고, 구원의 가능성을 향해 갈수록 더 빠르게 달려가는 인물들을 비춘다. 그것은 절망적인 시도일까, 아니면 아직 우리가 구할 무언가가 남은 것일까. 답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 유일한 선택은 계속해서 속도를 높이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