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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나홍진의 ‘테마파크’에서 본 식민지 남성성의 진화,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가 본 <호프>

외계인이 등장하는 SF영화는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를 상징한다. 할리우드의 외계인 SF에서 미국인은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보편적 주체다. 프랑스 등 서구의 영화 ‘선진국’들에서 SF가 흔치 않은 이유다.

멕시코 출신이지만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2013년작 <그래비티>는 서구 SF영화의 변곡점으로 불린다. 이 영화는 우주 정복이나 외계인과의 전투가 아니라 우주를 배경으로 인류 자신의 문제를 탐구한다. 우울증에 대한 탁월한 성찰, 돌봄, 아시아(중국)의 등장, 우주 쓰레기 문제를 다룬다. 나는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들의 ‘성찰 권력’에 질투를 느낀다. 미국은 상업적·기술적 한계를 넘어섰기에 자신을 성찰할 권력마저 획득한 것이다.

반면 우리가 할리우드의 이 ‘성찰적 SF’에 도달하는 길은 여전히 아득해 보인다.<호프>를 보고 낙담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황해>를 또 봤다. 서구가 ‘용개리’로 발음했던 심형래 감독의 1999년작 <용가리>와 <호프>를 비교한다면 너무 가혹한가. 그러나 두 작품에 공히 내재된 멘털리티와 서구 근대성에 대한 르상티망(원망(怨望), 강자에 대해 갖는 질투, 원한, 열등감 등의 감정인 시기심.-편집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이는 ‘심형래’와 ‘나홍진’의 영화 경력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위상이 변했다. 1990년대와 달리, 지금 한국은 각종 ‘K~’로 시작되는 콘텐츠 강국이자 부국강병 국가다(지난해 한국의 전 세계 무기 수출 시장점유율은 4위였다).

<호프>의 호불호가 극단으로 갈린 점은 당연하다. 오락영화로 보면 좋고, 뭔가 기대했다면 불호다. 영화계에 종사하는 지인은 이 영화를 아이맥스로 봤다면서 “나홍진의 놀라운 테마파크다. 또 보고 싶다”며 “솔직히 한국에서 이 정도로 촬영, 미술, 연출을 해낼 수 있는 영화는 없다”고 했다. 지지층의 변은 인터넷 여론도 비슷하다. “진짜 이런 글 처음 써봄. 지금 보고 나옴. 다른 영화랑 비교가 안됨. 외국영화보다 더 재미있음. 자부심 느낌. 역시 감독님 짱! 두번 더 보려고요 ㅋ”, “할리우드는 몇천억원을 기본으로 쓰는데 700억원으로 이런 영화를 만든 건 대단한 거 아닐까요? 불호도 이해는 가지만 전 극호입니다~ 다들 한번씩 보고 판단해봤으면 좋겠어요! 잘되어서 2편 보고 싶습니다!”

한국, 인류를 대표하다

하지만 ‘우리도 대규모 SF를 할 수가 있다’가 나홍진 감독에 대한 기대라면, 오히려 그의 전작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호프>는 더 이상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미국이 곧 세계였듯이, 이제는 한국이 곧 세계라고 말한다. 성기(조인성)의 대사 “지구인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나를 놀라게 했는데, 드디어 한국이 지구를 대표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호프>는 서구인들의 ‘호기심’ 속에 칸영화제에 초청되었다.

나는 이 영화를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의 진화로 본다. 원래 백인 중산층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규범적인 남성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한국의 남성성 형성은 서구와 전혀 다른 경로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근대 체제와 함께 등장한 이성애 핵가족제도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역할 고정관념을 낳았다. 그러나 ‘생계부양자/보호자 남성’과 ‘피보호자/가사노동자 여성’은 백인 중산층의 대표 재현일 뿐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계급, 인종, 민족, 지역, 장애, 성정체성 등에 따른 남성간의 차이로 인해 남성들은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

특히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형식적 독립을 이룬 후기 식민국가인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은 서구 중산층 가정에서와 같이 여성과의 성별 분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세(미국)와의 관계에서 구성되었다. 한국의 남성 문화는 자국 내부/가정에서의(domestic) 성별 관계가 아니라 ‘한국 남성–미국 남성(주한 미군)-한국 여성’이라는 구도 속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구성하였다. 미국을 대타자(The Other)로 삼아 미국에 저항, 굴복, 숭배, 동일시, 이용(?)하는 등 다양한 대응을 통해 남성성을 만들어가는 한국의 남성성을 ‘식민지 남성성’이라고 하자.

여전한 추격 발전주의와 그 실패

<호프>는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호프>는 미국, 미국영화라는 가시물을 목표로 삼는 추격 발전주의의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서사와 문맥에 신경을 쓸 틈이 없다. 영화의 배경이 1970~80년대 한국이라지만, 성애(정호연)의 대사 “너는 선을 넘었어”, “오빠 사랑해”는 당시 언어가 아니다.

루마니아 산의 전경과 한국의 남쪽 산의 전경이 전혀 달라서, 범석(황정민)이 나오는 장면과 성기의 분량은 다른 영화를 이어 붙인 듯하다. 한국영화인데, 로컬리티도 포지션도 없다. 맥락, 서사가 없는 텍스트를 포르노그래피라고 한다면, <호프>는 그에 가깝다. 물론 포르노라고 해서 딱히 부정적인 의미도 아니고, 그런 영화는 <호프> 말고도 숱하다.

거대 자본으로 한국 남성이 지구를 대표하는 SF를 만들어냈지만, <호프>는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르상티망이 동력이 된 ‘식민지 남성성’의 자위적(自慰的), 작위적 테마파크일 뿐이다. “우리도 서구처럼”이라는 열등감과 조급함이 과거 식민지 남성성의 주된 내용이었다면, 지금은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는 자부심과 한국이 곧 보편이라는 새로운 남성성이 식민지 남성성의 내용으로 자리하고 있다. ‘추격자’에게는 앞선 자의 뒷모습만 보일 뿐 상상력의 공간이 없다.

<호프>가 기존 한국 SF영화의 역사에서 촬영과 편집 등 모든 면에서 기술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평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것이 공동체의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의 힘으로 가능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프>의 서사적 빈곤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지역적 맥락을 지우고, 한국의 인물과 공간을 할리우드식 구경거리로 대체한 결과다. 이 점에서 같은 감독의 영화지만 <호프>는 글로벌경제 체제에서 로컬의 비극을 다룬 섬세한 서사극 <황해>와 대척점에 있다. 탈식민은 보이는 서구를 좇는 것도 ‘우리 것’을 찾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빠른 길은 혼돈(hybridity) 속에서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