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고통이 따른다. 어떤 고통은 사소하게 지나가지만, 어떤 고통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간다.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의 무의식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과 그로 인해 밀려드는 불안과 고통에 압도되지 않기 위한 심리적 장치를 가지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부인’과 ‘주지화’라는 방어기제
딸의 조현병이라는 현실을 감당해야 했던 마사코의 부모는 부인(denial)하는 방어기제를 선택한다. 부인이란 외부 현실의 불편한 지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면서도 그것이 갖는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가령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의 정신병적 증상을 보인 딸에게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까지는 인지하면서도 “마사코가 (의사에게)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했대”라고 말하는 모습은 그것이 지닌 병리적 의미까지는 받아들이지 않는 어머니의 부인 방식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방어기제는 인간이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기 전까지 고통의 크기를 조절하며 중요한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잠시 유예할 기회를 준다. 문제는 지나친 방어가 끝끝내 현실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릴 때 발생한다.
여러 장면은 마사코의 어머니가 현실을 어디까지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어머니는 딸에게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남편에게 상담을 제안하기도 했고, 딸이 모임의 리더를 맡는 일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런 대화가 오갈 때면 마치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부인하기를 그만둘 것 같다는 데에 기대를 걸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과 행동이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면 어머니는 현실로부터 물러난다. 딸의 상태가 항상 나빴던 것은 아니라며 심각성을 축소하고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하는 남편에게 책임을 돌린다. 현관문에 자물쇠를 채워둔 것은 자신의 다리가 아팠기 때문이라는 합리화로 포장되고, 마사코가 점술에 빠진 건 세상에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게 원인이 된다. 각각의 설명만 떼어놓으면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함께 놓고 보면 적용되는 원칙은 달라져도 결론은 한곳으로 수렴한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된다.’ 한번의 부인이 25년간 지속된 게 아니다. 수없이 반복된 작은 후퇴가 그 시간을 만들었다.
어쩌면 부모가 지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들의 방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인간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직접 경험하는 대신 그것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지식과 논리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주지화(intellectualization)의 방어기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두렵고 무력한 상황을 지적인 언어로 다루면서 감정에 압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느 새벽, 신경인지장애를 앓는 중에도 어머니는 심각한 증상을 쏟아내는 딸을 보며 조금의 동요도 없이 말한다. “약발이 딱 사흘이면 떨어진다는 걸 알았어. 약발이 떨어지면 나타나는구나. 완벽한 금단증상. 의사들은 다 알아. 설탕물 주면 돼.”
아버지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이 발견된다. 그는 자신이 나름의 방법을 시도했을 때 딸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었다”며, 다시 상태가 악화된 이면에는 딸이 ‘노력의 중요성’을 배우지 못한 문제가 있다고 결론짓는다. 두 사람의 설명은 다르지만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의미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정서적인 접촉을 피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들이 지키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랜 경험과 기억을 통해 마음속에 자신과 타인에 대한 내적 표상(internal representation)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과 상대를 이해하며 관계한다. 이렇게 형성된 자기와 타인에 대한 표상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가령 ‘나는 훌륭한 부모다’라는 자기 표상과 ‘내 딸은 뛰어난 아이다’라는 자녀에 대한 표상은 서로를 강화할 수 있다. 자녀가 뛰어난 성취를 보이면 부모는 자신을 더욱 유능하고 성공적인 사람으로 경험한다. 반대로 부모의 자기상이 강해질수록 그런 자신의 자녀 역시 특별한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가 강화된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자녀에 대한 표상은 ‘내 아이는 이런 사람이다’에 머무르지 않고 부모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일부가 된다. 특히 마사코는 부모와 같은 직업을 선택하고 그들이 평생 몸담아온 세계를 공유하며 부모가 이루어온 것을 다음 세대로 계승할 예정에 있었다. 마사코에 대한 표상에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었고, 때문에 부모 자신의 정체감과 지나치게 깊이 결합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딸의 병을 인정하는 일이 이 부모에게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나’, ‘합리적이고 지적인 나’, ‘유능한 가족을 꾸린 나’와 같은 자신들의 여러 정체성에 균열을 내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 전체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자기애적 요소가 들어 있다. 자녀에게 자신의 이상, 못다 한 꿈, 정체성, 미래를 투영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자녀의 실패는 부모에게 ‘자기애적인 손상’을 유발한다. 그러나 성숙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내부 소망과 외부 현실을 구분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외부 현실에 맞춰 자기 표상을 수정한다. 부모의 마음속에 있던 이상적인 모습의 아이를 충분히 애도하고 눈앞에 있는 현실의 아이를 다시 알아갈 준비를 한다.
안타깝게도 마사코의 부모는 외부 현실이 ‘딸에게 조현병이 있다’고 끊임없이 말하는데도 ‘마사코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라는 내부 심리적 현실을 놓아주지 못한 것 같다. 딸에게 당면한 현실이 자신들의 내적 세계를 바꾸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마사코에게 매해 국가고시 책을 사다주는 행위처럼, 세상을 떠난 딸의 관에 공동으로 쓴 논문을 넣어주던 것처럼 자기애적 상처를 끝없이 봉합하면서 이상적인 딸의 표상을 철회하지 못했다. ‘의사가 될 마사코’, ‘부모의 학문적 세계를 이어갈 마사코’는 그렇게 부모의 내적 세계에 영영 남겨졌다. 부모의 방어는 사랑하는 딸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 언제나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마사코는 달라진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험했을까. 이전과 다른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점성술의 무엇에 마음이 끌렸는지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러나 끝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나의 해석으로 대신 채우고 싶지는 않다. 그가 누구였는지, 누구였어야 하는지를 규정하지 않는 곳에서 내내 자유롭기를 바라며 그 모든 마사코에게 깊은 애도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