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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거친 삶을 토닥이는 서사 - <비광> 이지원 감독

굽이쳐 흐르는 강처럼 <비광>의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 비극을 마주한다. 중구(류승룡)는 갑작스레 딸 동주(김시아)를 책임지며 아내 남미(하지원)와 헤어지고 야구선수로서의 커리어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나 <미쓰백>의 상아(한지민)와 지은(김시아)이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 것처럼 중구, 남미, 동주도 어느새 가족이란 이름의 지지대가 되어준다. <미쓰백> 이후 드라마 <클라이맥스>를 거쳐 에 이른 이지원 감독은 이번에도 자신의 강점을 살려 등장인물들의 명암을 뚜렷하게 그린다.

- 마침내 <비광>과 함께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소회가 남다르겠다.

전쟁통에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니다가 강 건너에서 아이가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미쓰백>도 그랬지만 <비광>도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배우 캐스팅을 마치자마자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촬영이 미뤄졌고 개봉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촬영 중에 수술할 정도로 다리를 크게 다치기도 했다. 잠시 촬영을 접은 와중에 장마철이 지나가 좋은 날씨에 원하는 장면을 얻어내긴 했지만. <클라이맥스>작업할 때 빼고는 근 5년간 <비광>을 붙잡고 있었다 보니 힘들게 얻은 자식 같은 느낌이 든다.

- 지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처럼 굴곡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다고 말한 바 있는데 실제로 중구, 남미, 동주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다.

모두에게 서사가 있다는 걸 지금 질문을 듣고 인지했다. 내게는 인생의 굴곡을 다루는 게 당연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에 관심이 많다. 그래야 그들의 입장에 몰입해 글을 쓸 수 있다.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엔 별 관심이 없고 잘 다루지도 못한다. 윤가은 감독이 언젠가 “언니는 뒷골목에서 뭘 했었어?”라고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는데 당연히 그와는 먼 삶을 살았다. (웃음)

-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명확했다는 인상이다. 비광 패처럼 빗속을 걷는 중구의 장면이나 가족들이 둘러앉은 제사 풍경, 경찰을 앞에 두고 중구를 뒤돌아보는 동주와 같이 상징적인 신들이 등장한다.

중구가 우산을 들고 ‘광’(光)자 전광판 밑에 서 있는 신은 직설적이긴 하지만 그 이미지를 한번은 쓰고 싶었다. <비광>엔 내가 겪고 본 것들이 많이 반영됐다. 기식(김해숙)의 집도 과거 할머니 댁을 그대로 세팅했고 제사 신에도 과거의 내 경험이 반영됐다.

- 중구와 동주는 서로에게 항상 미안함을 느끼는 부녀지간이다.

동주는 태어날 때부터 가혹한 환경에 던져진 아이다. 자기 때문에 다들 힘들어졌다고 생각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한다. 그런 동주의 마음을 아는 중구도 동주의 눈치를 계속 살핀다. 이들이 더이상 서로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영화에 일부 반영됐다.

- 남미가 처음 만난 동주에게 “난 너 안 불쌍하고, 널 보면 아파”라고 말한다. 남미가 동주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한 걸까.

시나리오 단계에서 그 대사를 쓸 때 동주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다면 남미에게 그렇게 아프게 와닿지 않았겠다고 생각했다. <미쓰백>도 그랬지만 상처를 지닌 사람이 또 다른 상처를 지닌 아이를 바라보는 관계에 자꾸 시선이 간다.

- 하지원, 류승룡 배우의 어떤 부분에서 남미, 중구가 연상됐나.

류승룡 배우가 남미 역에 하지원 배우가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생각해보니 잘 어울렸다, 고리를 걸 듯 캐릭터와 배우가 매치되는 지점이 있으면 곧바로 택하는데, 하지원 배우에게 그런 순간이 있었다.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하지원 배우에게 감량도 요구하며 가혹하게 대했는데 정말 잘 견뎌줬다. 현장에서 같이 치열하게 만들어나간 순간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류승룡 배우는 사자처럼 느껴진다. 본능이 살아 있지만 다른 한편에 유약함을 지닌 사자. 부드러움과 맹수다움이 공존하는 얼굴로 <비광>을 잘 끌고 나가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밤새 사라졌던 동주를 따라 남미가 집으로 들어올 때 그를 바라보는 류승룡 배우의 표정이 좋았다. 반가운데 낯설고 어색해하는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을 촬영할 때 류승룡 배우를 캐스팅하길 잘했다 싶었다.

- 배우들에게서도 발견하고 싶은 이미지가 명확했나보다. 그 의도가 제일 잘 담긴 장면을 골라준다면.

오프닝 타이틀이 뜨고 음악이 깔리면서 중구와 남미의 과거를 보여주는 신을 좋아한다. 이 시퀀스에 관해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는데 꼭 살리고 싶어서 타협하지 않았다. 남미와 술 한잔하던 지숙(김선영)이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가 비를 타고 흘러가는 시퀀스도 좋아한다. 시나리오에 ‘그 노래와 남미의 숨결이 비를 타고 가서 중구의 등을 토닥이고 멀어진다’고 썼는데 류승룡 배우가 영화를 보고 진짜 토닥이고 멀어지는 것 같았다고 하더라. 거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기 때문에 그들을 다독이면서 끝내고 싶어지는 것 같다.

- <미쓰백>에 이어 <비광>에서도 유사 가족의 형태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대를 다룬다.

의도치 않게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관계를 자주 그리게 된다. 각자의 길을 걷다 교통사고처럼 만난 사람들과 얽히고, 예상치 못했던 길로 빠져들어 운명마저 바뀌는 과정이 결국 인생이 아닐까. 살면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으로 인해 인생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주제를 계속 다루게 되나 보다.

- 차기작 계획은.

<클라이맥스> <비광>을 연달아 공개하고 나니 많이 소진된 상태다. 영화를 개봉한다는 건 작품을 완성했다고 끝난 게 아니라 관객에게 칭찬도 듣고 매도 맞는 과정까지 전부 포함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 여정이 마무리되면 데뷔 전에 쓴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밟을 여정이다. 장르적 성격이 반영된 진한 멜로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