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었고, 닭강정이 된 딸을 돌려놓으려던 아빠였다가, 아무리 다쳐도 회복하는 괴물 같은 초능력자였던 배우 류승룡이 영화 <비광>으로 인생의 나락에 빠진 야구선수 황중구가 되어 돌아왔다. 깍두기를 국물째 뒤집어쓰는 인생의 수모와 모욕 앞에서도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남자를 연기한 류승룡과 마주 앉아 치열했던 여름에 대한 기억을 나눴다.
- 화투 패 속 비광 문신을 하고 오래된 베르사체 티셔츠를 걸치는 등 화려한 차림새로 연기했다. 평소에 걸칠 일 없을 것 같은 복장이었는데 어색하진 않았나.
어색하긴, 나랑 잘 어울리더라. (웃음) 나뿐 아니라 등장인물 대부분이 과감한 문양과 색깔, 격식을 갖추지 않은 의상과 분장으로 등장하는데 나는 그게 방어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어두운 내면, 결핍 같은 것을 화려한 과시로 가리려는.
- 영화를 보면 끈적할 정도로 습기와 더위가 묻어나는 느낌이다.
가족들의 집부터 ‘물 먹는 하마’ 놓으면 물이 한 바가지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웃음) 실제로도 습도 높은 현장이었다. 비가 오거나, 땀을 흘리거나, 하천이 흐르거나…. 감독님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서 그런 것 같다. 그러다 마지막 신은 ‘제습기 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뽀송뽀송해 기분 좋게 촬영을 마무리했다. 치열했던 여름의 기억이다.
- 인생 최고점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진 황중구를 움직인 동력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배우 김시아가 연기한 동주의 작은 등, 까치발, 앙다문 입, 겁먹은 무구한 눈. 중구가 그 아이의 우산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옹송그린 자그마한 등 하나가 영화의 개연성이라고 생각한다. 김시아 배우에게 한수 배웠다.
- 배우 김시아의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
땅을 팠는데 금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날것 그대로의 농축된 힘이 있다. 현장에서 연기를 주고받는데 뭐가 계속 툭툭 튀어나오더라. 난 저 나이 때 뭐했지, 싶으면서 계속 감탄했다. 내년에 성인이 되는데 20대의 연기도 기대되는 배우다.
- 실제로는 아들만 둘인데 유독 딸의 아버지로 자주 등장한다. 김시아와의 장면들이 애틋하더라. 딸이 있었다면 어떤 아빠였을 것 같나.
내리사랑이라는 건 경이롭다. 어떻게 이렇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질리지 않고, 끊이지 않고 샘솟는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마치 절대자가 심어준 것처럼. 지금도 이런데, 딸이었다면 아이가 어릴 땐 일하러 나가는 게 힘들 정도로 너무나 아꼈을 거다.
- 극 중 요동치는 사건 사고 속에서도 든든하게 잡아주는 연기를 하더라. 발산과 절제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으려 했나.
그게 연기할 때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커피 한잔을 내릴 때도 원두의 양과 분쇄도, 물의 온도, 모든 면에서 가장 알맞은 지점을 찾아야 하듯, 연기도 그렇다. 톤과 온도, 데시벨…. 그것들을 조율해 인물이 지닌 파장을 잘 전달하는 거다. 많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고, ‘저 사람은 저럴 수 있겠구나’라고 관객을 이해시킬 수 있는 연기를 하고자 한다.
- 깍두기를 얼굴에 붓는 신에 진짜 깍두기를 써서 눈이 무척 따가웠다고. 그럼에도 다시 테이크를 가지고 제안했다고 들었다.
눈빛과 안광이 굉장히 중요한 신이었다. 그런데 첫 테이크에서 눈을 제대로 못 떴으니 당연히 다시 찍어야지.
- 눈빛이 형형하다. 배우로서 좋은 눈이라고 생각해왔다. 타고난 건가.
이제 돋보기를 끼는데 그렇다니 다행이다. (웃음) 항상 솔직하려고, 진심을 다하려고 한다. 눈은 거짓말할 수 없으니까.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면 중년 남성성을 어떻게 대중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지 터득한 배우 같다.
혐오의 시대다. 젠더에 대한, 나이를 먹으면 먹은 것에 대한, 어리면 어린 것에 대한, 나와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한 혐오. 중년층에 대해 ‘영포티’, ‘꼰대’라고 지칭하는 걸 보면 누구나의 미래인데 왜 저렇게 프레임을 씌울까 의아하더라. 나는 문화가 혐오를 완화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시청각 자료가 가장 효과적이지 않겠나. (웃음) ‘착한 중년 콤플렉스’마냥 멘토가 되어 교훈을 주자는 건 아니고, 입체적이고 호소력 있는 이야기로 손을 내밀고 싶다. 영양이 부족하다면 주사를 놓기보다는 좋은 식재료로 정성껏 요리하고 플레이팅한 음식을 내놓고 싶은 마음이다. 냄새를 맡고, 침이 고이고, 먹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직접 씹어서 소화시키는 건 다르니까. 나는 작품이 그런 정성을 들인 음식과도 같았으면 좋겠다.
-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 당신의 삶에도 장르가 있다면 어떤 장르였으면 하나.
블랙코미디.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게 인생 아닌가. 삶의 페이소스와 희로애락을 매력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장르다. 질곡이 있어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게 블랙코미디이듯이 내 인생도 그러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