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 어드벤처: 운명적 만남 & 우리들의 워 게임!>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누야샤 극장판: 시대를 초월한 마음>. 우연일까 필연일까. 비슷한 시기에 옛 애니메이션들이 극장을 찾아온다. 최근 몇년 동안 발생한 재개봉 열풍의 한 종류라거나 대작의 빈틈을 노린다거나 하는 산업적 현상으로 먼저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측면에서 질문해보고 싶다. 저 목록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모종의 추상적 정취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왜 하필 이 세 작품일까. 왜 하필 애니메이션일까.
우선 세 작품은 모두 ‘시간’이란 주제를 다룬다. <디지몬 어드벤처: 운명적 만남>은 디지몬과 선택받은 아이들이 만난 최초의 기억을 그린다. 흔히 아는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의 첫 단추를 끼우는 퍼즐이다. 한밤중 아파트 바깥을 쳐다본 소년과 소녀들은 현실 세계에 불시착한 디지몬들의 전투를 목격한다. 몇년 뒤에 이 목격자들은 디지털 세계의 선택을 받아 모험을 떠나게 된다. 먼 미래를 만든 태초의 과거다. 최초의 기억이란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시간인 동시에, 그때를 다시 겪을 수 없다는 시간의 애상을 부른다. 호소다 마모루의 아련한 작풍과 화면 위에 흐르는 라벨의 <Boléro>는 그 우수를 증폭한다.
<디지몬 어드벤처: 운명적 만남>은 더 세밀하게 물리적 시간에 대한 논제를 던진다. 차디찬 보리차를 한껏 마셔야만 갈증이 풀리는 어느 한여름이 배경이다. 선택받은 아이들과 파트너 디지몬들은 빌런 디아블로몬에 맞서는데, 디아블로몬은 전세계의 디지털시계를 조종하여 핵폭탄을 도심에 떨어뜨리려 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접어드는 21세기의 전환기답다. 디지털 기술이 문명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미지의 지대로 여겨진 것이다. 은 그러한 시대의 표상이었다. 이야기의 결론마저 시의적절하다. 모든 것의 끝이란 뜻의 ‘오메가몬’이 디아블로몬을 저지하며 핵폭탄 발사의 시간을 멈춘다. 디아블로몬이 지니고 있던 시계의 시침이 영원히 멈춰버리자 핸드폰의 알람, 전자레인지의 알람 등 모든 시간의 축이 리부트된다. 디아블로몬의 (나쁜) 미래가 폐기된 과거에 머물고 선택받을 아이들의 (밝은) 미래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디지몬의 이야기는 과거를 과거에 둔 채, 현재와 미래를 살게 하는 법을 알고 있다. 다른 두 작품도 비슷하다. <이누야샤 극장판: 시대를 초월한 마음>과 <이누야샤>는 제목 그대로 수백년의 시대를 사이에 둔 이누야사와 가영의 관계를 이어 붙이려 애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마코토는 시간을 건너뛰어 치아키의 마음에 닿으려 수없이 넘어진다. 노스탤지어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과거를 원하고 그리워한다는 감정은 그것에 닿는 일에 항구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멜랑콜리를 수반한다. 제아무리 과거의 조각을 그러모으고 그곳을 향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불가능의 시간이 느껴질 때 노스탤지어가 성립된다. 바라면 바랄수록 이상하게 멀어지는 사태로서 극한의 정동이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이 작품들을 더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이유일 듯하다.
극장이 주는 ‘끝’
다만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는다. 굳이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시간의 애수를 다룬 실사영화는 무수히 많다. 애니메이션만이 지니는 매체의 차이가 무엇인지 더 파고들 필요가 있다. 예전에 TV로 봤던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다시 본다는 일의 의미가 왜 특별하게 다가오는지 따져보고 싶다.
지난해 재개봉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극장에서 관람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코스프레까지 마친 관객들이 주변에 모이니 좋아서 심장이 뛰었다. 그런데 극장을 나서고 나니 왠지 기쁘다기보다 무언가 찝찝했다. 미적지근한 응어리가 마음에 남았다. 한참을 생각하고야 알았다. 진정으로 보고 싶었고 그리워했던 대상은 브라운관과 2세대 아이팟으로 돌려 보던 저열한 화면의 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을 보던 그때의 시공간이라 말하는 쪽이 더 적절하겠다. 형제와 한 이불에 누워 함께 무작위의 애니메이션을 마주했던 기억, 그즈음의 어느 여름날 스케이트를 타다가 다리가 부러져 하릴없이 TV를 돌려 보던 날의 나른함을 잊지 못하는 것이었다.
<디지몬 어드벤처: 우리들의 워 게임!>을 보는 관객들의 대개는 디지몬의 최근 시리즈인 <디지몬 비트브레이크>를 감상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조각을 맞추듯 디지몬의 세계관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디지몬 어드벤처: 우리들의 워 게임!>이라는 추억의 형상을 꺼내고 싶을 뿐이다. 다만 그들 역시 필자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사례와 비슷한 결론을 맞이할 것이다. 막상 작품을 다시 보더라도 예전만 한 감상에 젖기란 어렵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잃지 않은 고유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극장의 불이 꺼진다는 점이다.
영화평론가 A. S. 할라는 “영화와 TV의 결정적인 차이는, 영화에는 결말이 있다는 것”이란 요지의 주장을 남겼다(<포에버리즘>, 그래프턴 태너 지음, 워크룸프레스 펴냄). 극장의 암전은 물리적으로 ‘시작했다’와 ‘끝났다’라는 감각을 가장 격렬히 느끼게 한다. 극장이란 장소가 주는 특별함은 당연하게도 여기에 있다. 돌아갈 수 없는 ‘끝’의 정동이란 노스탤지어를 느끼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요컨대 TV애니메이션의 추억과 지금의 극장 경험은 결국 함께할 수 없다. 그때는 당연히 계속됐던 것이 지금은 순간에 끝나버린다. 어릴 적 그 애니메이션을 보았던 경험, 혹은 최근 SNS를 통해 아련하게 스미었던 과거의 정취를 극장이 재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장은 추억을 더 길게 전시하지 않고 불을 끄며 사태를 종료시킬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의미가 있다. 극장에서 다시 보는 애니메이션의 가치는 전혀 부정적이지 않다. 극장은 우리를 과거의 어느 시점에 아주 잠시 데려다줬다가 금세 현재의 불을 켜버린다. 과거가 과거임을, 그때 보았던 디지몬이 지금의 디지몬과 절대 같을 수 없음을, 그 시간을 돌려받을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게 만든다. 바로 이때 노스탤지어의 강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거세질 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추억은 추억으로 끝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추억의 모순된 열병을 느끼고자 우리는 결국 극장에 들어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