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어원이 한자어 사량(思量)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생각할 사(思)에 헤아릴 량(量). 그저 하나의 낭설에 불과하지만 이 해석을 참 좋아한다. 사랑이란 단어에는 생각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일일 테다. 잘 안다고 여긴 사람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 아직 모르는 구석을 인정하는 시간. 그러니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헤아리기를 그만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는 순간 우리는 눈앞의 상대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알던 상대 혹은 자신이 바라는 대상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랑은 조금씩 불가능해진다.
<가능한 사랑>은 사랑에 빠졌던 설렘의 시간을 지나 오래 사랑한 뒤에도 상대를 계속 헤아리는 일이 가능한지 묻는 영화다. 이창동 감독에게 사랑이란 감정 이전에 거리의 문제인 듯하다. 바라보는 사람은 얼마나 가까이 가고 어디서 멈출 것인가. 건널 수 없는 거리를 인정하면서도 계속 바라볼 수 있는가. 먼저 읽어야 할 단어가 ‘사랑’이 아니라 ‘가능한’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능하다는 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창동의 영화는 언제나 그 작은 가능성을 쉽게 긍정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법도 없다. 그리하여 깊고 맑은, 번민의 시간이 이어진다.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데칼로그)에서 영감을 받은 이 영화의 출발점에는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자리한다. 탐할 수 있는 것은 재물만이 아니다. 남의 집과 남편과 삶, 심지어 남의 고통과 진실까지 탐할 수 있는 시대다. 원죄가 악의뿐이라면 문제는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좋은 마음에도 깃든다. 돕고 싶다는 마음 안에는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 안에는 다시 상대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보고 싶다는 욕망과 반드시 대면해야 하는 운명 앞에 선다. 보고 싶다는 건 실은 보여달라는 요구(혹은 폭력과 오만)이기도 하다. 이처럼 <가능한 사랑>의 원죄는 사랑의 반대편이 아니라 사랑 한가운데에서 휘몰아친다.
각자의 사정, 각각의 영화
이야기의 골격은 명료하다.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은 파업 진압을 통과하며 술에 기대고 말을 잃었다. 아내 미옥(전도연)은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건사한다. 위태로운 부부는 동료의 장례식에서 해고 노동자들을 찍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 그의 남편 상우(조인성)와 가까워진다. 부부는 어느 날 상우 집안의 바닷가 별장으로 초대된다. 그곳에서 호석은 마침내 예지의 카메라 앞에 앉아 평생 꺼내지 못한 과거를 말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간 미옥은 상우와 함께 바다로 향한다. 그렇게 같은 장소에서 부부가 서로 다른 시간으로 멀어진다.
<가능한 사랑>을 보며 문득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떠올렸다. 하나의 사건과 네 가지 진실. <라쇼몽>은 누가 거짓말을 하느냐를 따지는 이야기에서 각자의 진실이 각자의 욕망으로 빚어진다는 걸로 귀결된다. 하지만 ‘진실은 없다’며 허무주의적인 시선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거기서 기어이 한 걸음 더 내딛는다. 마지막에 버려진 아기를 거두겠다는 거짓말쟁이 나무꾼을 등장시켜 나쁜 사람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나쁜 사람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질문이 바뀐다. 다 알고 난 뒤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지가 자신을 증명하는 법이다.
<가능한 사랑> 역시 그 길을 걷는다. 네 사람은 같은 사건을 통과하며 서로 다른 영화를 산다. 호석의 영화는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에 대한 고발인 동시에 말할 수 없던 사람이 다시 말하기까지의 과정이다. 미옥의 영화는 타인을 돌보느라 잊었던 자신을 다시 욕망하는 시간을 통과한다. 상우의 영화는 다 가진 사람이 끝내 소유할 수 없는 것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예지의 영화는 선의가 어디서부터 폭력이 되는지 묻는다. 그렇게 완전히 옳거나 틀리지 않은 채 네개의 시선은 하나의 진실로 귀결되는 대신 서로의 사각지대, 말하자면 절대 메울 수 없는 마음의 그늘을 드러낸다.
인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조합은 더 복합해진다. 피사체인 호석과 관찰자 예지 사이에는 카메라가 있다. 예지는 호석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말할 준비가 된 사람의 시간과 말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의 시간이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좋은 장면을 찍고 싶은 예지는 호석의 고통을 알려야 한다. 동시에 예지는 그가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세개의 마음은 한몸이라 분리되지 않는다. 이 순간 단순한 이미지 혹은 불행의 착취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 시작된다. 욕망과 행위의 문제다.
미옥과 상우 사이에는 욕망이 있다. 미옥은 상우의 별장을 두고 읽어본 적 없는 소설 속 장소 같다고 말한다. 별장에서 미옥이 바라보는 것은 상우라는 한 사람을 넘어선 무언가, 그의 집과 바다와 여유, 그러니까 살아보지 못한 삶 전체다. 어떤 계급에게 다른 계급의 삶은 현실이 아니라 픽션이다. 상우가 미옥에게서 탐하는 것 역시 돈으로 살 수 없는 생기, 제 세계에 없는 종류의 삶이다. 해변에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결정적 순간, 영화는 권력이 잠시 역전되는 걸 허락한다. 원하는 쪽은 상우지만 선택하는 사람은 미옥이다. 물론 욕망은 계급을 지우지 못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 그 배열을 흔들 수는 있다.
그리고 호석과 미옥. 이 영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된 시간이 있다. 한때 미옥 앞에서 춤추던 젊은 시절 호석은 해고의 트라우마를 겪으며 이제 말하지 않는 사람, 스스로 칭하길 죽은 존재가 되었다. 곁을 지킨 미옥 역시 어느 순간 자유와 생기를 잃고 그저 돌보는 사람이 되어간다. 상우의 별장에서 두 사람이 정반대로 걸어가는 순간은 실로 잔인하다. 사랑이 숨을 거둬서가 아니라 서로의 시간이 달라져서 멀어지는 사람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것. 이창동의 카메라가 진정 응시하는 건 오래된 사랑의 가장 깊은 고독이다.
‘좋은 장면’이라는 또 다른 죄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은 호석이 마침내 입을 여는 순간이다. 그를 정말로 무너뜨린 건 진압의 폭력만이 아니라 형제라 믿었던 동료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본 일이다. 국가가 육체를 때렸다면 동료의 도주는 세계를 믿는 방식을 부쉈다. 살아남은 자와 이미 죽은(해고당한) 자의 기억 속에 갇힌 호석은 무너진다. 바로 그 순간 예지에게는 더없이 강력한 장면이 생긴다. 한 사람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장면’이 되는 것. 영화라는 예술의 원죄가 이토록 압축된 순간도 드물다. 고통은 겪은 사람의 것이지만 이미지가 되는 순간 모두의 것이 될 수도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잊히고, 기록하면 타인의 고통을 소유하게 되는 딜레마. 어느 쪽도 깨끗하지 않다.
이창동 감독은 실제로 이 질문 앞에서 한번 멈춘 적이 있다. 해고 노동자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쓰고 캐스팅까지 마쳤지만 끝내 극영화로 제작하지 못했다. 그들의 삶을 정직하게 담은 다큐멘터리가 이미 있는데 굳이 극영화로 만들 이유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한 이야기는 단편 로 만들어졌다. 이후 오정미 작가가 다큐멘터리스트 부부의 이야기를 겹쳐보자고 제안하면서 지금의 <가능한 사랑>으로 거듭났다.
여기서 중요한 건 찍는 사람과 찍는 행위가 영화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해고 노동자에 관한 영화에서, 해고 노동자를 찍는 사람에 관한 영화로의 전환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 세계의 이동이나 마찬가지다. 단순히 질문이 하나 늘어난 게 아니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에서 ‘나는 이것을 찍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카메라의 윤리가 전환된 것이다. 그들은 찍고 우리는 본다. 예지의 카메라는 해고 노동자 호석을 찍고, 이창동의 카메라가 다큐멘터리스트 예지를 찍는다. 우리는 그 모든 이미지를 목격한다. 호석이 무너지는 장면 앞에서 감동하는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좋은 장면이라 감탄하는 순간 나는 누구의 고통을 착취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질문 앞에 이창동 감독은 물론 관객인 우리까지 안전하지 않다.
근심하는 카메라, 그리하여 가능한 것들
<가능한 사랑>은 시선이 비대칭적인 영화다. 예지는 비극 한가운데 놓인 호석을 바라본 뒤 안전하고 안락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상우는 미옥을 욕망하지만 욕망이 끝나도 그의 계급은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미옥은 상우의 세계를 바라보되 가질 수 없다. 호석 역시 과거를 바라보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남자다. 같은 ‘보기’인데 치르는 값은 이토록 다르다. 계급은 자본의 격차에 그치지 않고 바라본 뒤 떠날 수 있는 자유의 차이로 확장된다. 어쩌면 계급의 가장 은밀한 특권은 좋은 것을 많이 볼 권리가 아니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권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은 바로 그러한 시선의 비대칭에 대한 고뇌와 근심이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달리 표현하면 이창동의 카메라는 죄를 둘러싼 모든 과정과 시간을 응시한다. 이야기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제대로 들어줄 때에야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건너갈 기회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놓는다고 영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호석이 말하지 못하던 첫 인터뷰와 마침내 말하는 마지막 사이에 놓인 것이 그 시간. 사람이 카메라보다 먼저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시간. 물론 충분히 기다렸다고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카메라 앞에도 뒤에도 안전한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소한의 출발점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메시지를 확신하는 영화보다 근심하는 영화를 조금 더 믿는 편이다. 윤리는 정답이 아니라 주저함에서 시작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창동의 영화에는 오래전부터 세상을 향한 근심이 있었다. <박하사탕>은 한 인간을 망가뜨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고 <밀양>은 누가 누구를 용서할 권리를 갖는지 물었다. <시>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아름다움을 쓰는 일이 가능한지 시험했으며 <버닝>은 계급의 격차를 해명되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겼다. <가능한 사랑>은 그 질문들을 조금 다른 자리로 옮긴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회의감에서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의지로의 전환. 다시, <가능한 사랑>은 원죄에서 출발한다. 미옥과 상우는 서로를 탐하고 예지는 안전한 곳에서 타인의 고통을 알고 싶어 한다. 호석은 제 상처에 갇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보지 못한다. 원죄가 인간의 욕망이라면 그 바깥에 설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중요한 것은 무죄를 항변하는 일 아니라 욕망에 가려 보지 못했던 것을 다시 보는 일이다.
이창동의 세계는 더 깊어졌고 이상하게도 더 맑아졌다. 깊은 물은 대개 어두운 법인데 이 영화는 깊이 들어갈수록 오히려 많은 것이 걷힌다. 누가 옳은지 알려주려는 조급함이 흩어진 자리,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람이다. 네 이웃의 것을 탐하고 종종 잘못 보고 때로는 아예 보지 못하면서도, 어느 순간 끝내 다시 상대를 바라보는 사람. 인간을 믿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보는 것. 다 안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아직 모르는 구석이 남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영화의 마지막에 달무리가 번진다. 달과 무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은 그 거리가 있어야 비로소 퍼져나가는 빛무리가 생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가능한’의 의미일 것이다. 거리를 없애는 것이 사랑일까.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 바라보는 것이 사랑일까. 이창동은 답하지 않는다. (기꺼이 관객과 같은 자리에 내려앉아) 그저 달무리를 바라본다. 그 정도라면, 아직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