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성, 조여정, 이창동, 전도연, 설경구(왼쪽부터). 사진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 설경구, 전도연 배우는 단편을 제외하면 각각 24년, 18년 만에 이창동 감독님과 하는 작업입니다. 어떤 면에서 여전했고 또 어떤 면에서 달라졌다고 느꼈나요.
설경구 달라진 건 모르겠어요. 감독님과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만나서 그런지…. 대신 현장 분위기는 엄청나게 차이가 생겼어요.
전도연 어쩌면 그사이 설경구 배우나 저나 감독님에게 익숙해졌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밀양> 때도 테이크를 많이 가진 않았어요. 대신 <밀양> 때는 감독님의 스타일이나 연출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따라가지 못했다면, <가능한 사랑> 때는 저희가 감독님의 현장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 같아요. 대신 이번엔 빨리 찍으셨잖아요.
설경구 그건 날씨에 대한 압박 같기도 하고, 촬영이 3개월 만에 끝났어요. 저는 한 5개월 예상하고 들어갔거든요. “언제 끝나?” 물어보면 “12월 말!” 이랬었는데 갑자기 11월 초에 2주 있으면 끝난다고 해서 “말도 안돼!” 다 그랬어요.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감독님이 대충 찍은 것도 아니고 어떤 컷도 포기를 안 하신 것 같은데 말이죠.
- 미옥은 참 다양한 모습을 가진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전도연 저는 일상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불안이 있는 사람이라 처음엔 미옥과 그 점이 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비단 저나 미옥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불안을 안고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미옥은 캐릭터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기보다, 오히려 최대한 아무 생각을 안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 현장에, 그 상황에 놓여서 미옥의 감정을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제가 마치 오랫동안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처럼. 예전에는 ‘뭘 준비해야 돼?’ ‘이런 설정을 하면 어떨까?’ 같은 생각을 했는데 오히려 그런 준비들이 감독님의 현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죠. 감독님은 그저 자연인처럼 보이길 원하셨고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다 보니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옥이 돼 있지 않았나 싶어요.
- 감독님이 어떻게든 끌고 가실 거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었을까요.
전도연 물론 감독과 배우 사이의 관계에서의 믿음도 있지만, 사실 현장에서 가장 큰 믿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게 생겨야 감독과의 관계에 대한 믿음도 생기는 거고요. 저 자신에 대한 불신이 가장 심했을 때가 <밀양>이었거든요. 그 작품을 끝내고 알았어요. 자신을 믿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 믿음으로 인해서 뭔가 더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고 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나오기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나 자신을 믿고 갔던 것 같아요. 더 잘해야지, 뭔가를 더 보여줘야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 조인성, 조여정 배우는 이창동 감독과 첫 작업입니다. 막연하게 이창동이라는 감독에 대해 갖고 있었던 판타지가 있으셨을 텐데요.
조인성 감독님과는 처음 작업이지만 도연 누나와는 같이 작품(<별을 쏘다>)을 했어서 일단 저한테는 양가적 감정이 있었어요. 오랜만에 연기하는 누나에 대한 설렘과 함께 감독님과의 첫 작업에서 오는 두려움이랄까요? 그런데 현장에서 누나랑 첫 신을 찍고 나서 되게 편안해졌던 것 같아요. 우리가 자동차에서 얘기하는 장면이었는데, 신 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아! 이창동 감독님 앞에서는 모두 공평해지는구나. 똑같이 고민하고, 똑같이 잘하고 싶고, 이게 맞는 걸까 스스로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까지 다 똑같구나’ 하고 느꼈죠. 유경험자도 무경험자도 감독님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아진다는 걸 보면서 배우들끼리 훨씬 더 동료애가 생겼던 것 같아요. 작품 마무리할 때쯤, 사실 엊그저께도 얘기했는데, “우리 합이 참 좋았어”라는 말을 많이 했고 그 현장이 여전히 어떤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상태예요.
조여정 진짜 그 무서움은 똑같았어요. 영화를 다 찍고 나서 그 마음을 서로 나눴어요. ‘내색은 못했지만 정말 우리 무서웠다, 그치?’ 하면서. (웃음)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감독님에게 답을 드리기까지 사흘쯤 걸렸어요. 배우들끼리는 지금 ‘냄새’라는 단어로 통일을 했는데 이야기가 가지는 무게감도 그렇지만 감독님의 ‘영화의 냄새’가 너무 진한 거예요. 너무 좋은 이야기고 너무 큰 역할을 맡겨주셨고, 사실은 너무너무 하고 싶지만, 바로 “할게요!”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후딱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처음 캐스팅되었을 때 제가 언니에게 보낸 문자가 빈말이 아니었어요. ‘저는 언니 눈만 보고 가야겠어요’라고 보냈거든요. 왜냐하면 전 미옥을 주로 인터뷰하니까 그게 진짜 목표였던 것 같아요. 이 현장을 이창동 감독님 영화인데… 라고 받아들이면 너무 무거워서 숨도 안 쉬어질 테니까. 아! 오늘 현장 가서는 미옥이만 보자, 도연 언니 눈만 보자. 그렇게 극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미옥을 통해서 보면 호석(설경구)을 보는 것도 너무 편해지더라고요. 그러다가 가끔 상우(조인성)가 오면 너무 든든하고. ‘아! 나 이런 신랑이 있지!’ (웃음)
조인성 캐릭터는 배우 자신이 만들기도 하지만 누구하고 연기하는가에 따라서 그 캐릭터가 완성되기도 하니까요.
조여정 저도 도연 언니와 차 신이 첫 신이었는데, 강아지 ‘블루’까지 있는 굉장히 긴 신이라서 쉽지 않았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설경구, 전도연 두 선배가 현장에서 저희처럼 똑같이 설레고 똑같이 긴장도 하고 똑같이 겁도 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셨고 그런 모습들이 정말 인성이랑 저한테 큰 힘이 되는 거예요. 함께하고 싶었던 이창동 감독님 영화인데 뭘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 거죠.
- 오랜만에 <박하사탕>의 ‘영호’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주문이 다시 이루어진 것처럼요.
설경구 <오아시스> 끝나고 23년 만에 작품을 같이하는 거지만 감독님이랑은 1년에 두번 정도는 식사 자리가 있어요. 단둘이 먹는 건 아니고 ‘<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여전히 하고 있고 감독님 생신, 그리고 송년회 때도 만나요. 지지난해 말에 송년회 하는데 건배사가 ‘감독님 빨리 작품 들어가시길’이었어요. 그때까지도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다음해 3월 중순에 갑자기 이걸 찍자시는 거예요. 제 첫마디가 “12월 때까지 한말씀도 없으셨잖아요?”였죠. 하지만 뭔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냥 이창동 감독이니까 해야지, 했어요. 시나리오 달란 말도 안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책을 봤더니 그때 딱 긴장이 되더라고요. 근데 긴장하고도 싶었나봐요. 그런 그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아시스>는 거의 신 순서대로 찍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날씨 압박 때문에 고흥에서 상우 별장 시퀀스를 먼저 다 찍었어야 했었어요. 감정적으로 힘든 인터뷰 신도, 계곡 신도 거기에 다 있는데, 별장 오기 전까지 좀 찍고 왔으면 감정이 쌓인 게 자연스럽게 있었을 텐데 앞의 내용을 하나도 안 찍고 바로 그 속 얘기를 하니까 죽겠더라고요. 게다가 날씨 변동이 심해서 거의 계속 대기 상태였어요. 날씨에 따라서 아침에 그날 찍을 신이 바뀔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다 갑자기 계곡 신을 찍자는 거예요. “예? 안될 텐데? 그래도 해볼게요” 했죠. 나뭇가지가 흔들려야 되니까 강풍기 돌리고 상황은 만들었는데, 제가 안되더라고요. 어떻게 돼요. 결국 2, 3시간 몸만 흠뻑 젖었죠. 제가 할 수 있는 게 몸을 뒹구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감정적으로는 안되고. 그래서 감독님께 사인을 보냈어요, 제가 도저히 안됩니다. 결국 나중에 다시 찍었는데 그날 한번 해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다음날 찍는데 뭔가 좀 잡히더라고요.
전도연 제가 부연 설명을 하자면 호석이 숲속에서 포효하는 장면을 찍을 때 저희가 다 있었어요. 너무 힘든 장면이어서 그냥 있어 주고 싶었어요. 막상 연기하는 걸 지켜보는데 하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게다가 갑자기 찍다 보니 아무리 해도 감정적으로 안되는 거죠. 결국 오빠가 옷이 다 젖어가지고 나왔는데 돌에 부딪혀서 멍도 들고 그랬더라고요. 그래서 “오빠 힘든데 괜찮아?”라고 했더니 오빠가 자기는 너무 좋다고, 괜찮다고, 어느 현장이 우리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고 이렇게 고민하게 만들겠냐고, 그래서 자기는 이 현장이 너무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거든요. 왜냐하면 저희는 점점 경력도 나이도 많아지는데 반대로 감독님들의 연령층은 점점 어려지잖아요. 우리가 잘하는 것만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게 연기를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던 중이었어요. 결국 어느 순간이 되면 남에 대한 만족보다 자신에 대한 만족이 중요해지고 커지잖아요. 그런 만족감을 오랫동안 느낄 수 없다가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그런 부분에 대한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그 말 듣고 ‘아, 경구 오빠도 나하고 같은 마음이었구나’ 했어요.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계속 고민과 불안에 시달리면서 연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일정 정도 정리가 되잖아요. 하지만 그런 고민과 불안을 또 겪고 싶고, 그 과정을 통해서 대단한 발견은 아닐지라도 새로운 걸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을 우리가 같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설경구 현장에서 배우를 막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배우가 그렇게 하고 싶게 만드는 건 정말 ‘이창동 매직’ 같아요.
- 마법 같은 순간들이 많은 영화입니다. 각자가 이 영화 속에 나온 대사처럼 “너무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던 장면이 있나요.
조인성 기억나는 장면들이 많죠. 특히 도연 누나와 해변에서 찍은 신은 이 영화의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고 현장에서도 힘들게 찍어서인지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설경구 나는 달 보는 거! 마지막 장면이 좋더라고요.
전도연 저도요. 달 보면서 나누는 미옥과 호석의 대화가 진짜 부부 같고, 특히 중간에 오빠가 지랄, 하는 대사가 있는데 가끔씩 경구 오빠도 술 마시다가 저한테 툭 그런 추임새를 던질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오빠한테 그 대사 너무 좋으니까 꼭 잘 쳐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어요.
조여정 저는 상우와 별장 가는 차에서 나누는 이야기요.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처음 찍고 너무 마음이 힘들어가지고 사실은 한번 더 촬영했어요. 감독님은 늘 정답이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시 했는데, 뭔지 모르지만 저번보단 낫다고 하셨어요. 그날 너무 행복했어요. 연기하면서 이렇게 행복한 날이 몇번이나 있을까 싶을 만큼 너무 행복했어요.
- 폐막식 때 배우들은 모두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가 계실 텐데요. 홀로 남은 이창동 감독님이 수상할 것을 예상하나요.
전도연 저는 한치의 의심의 여지도 없어요. 모두가 다 그렇게 바라고 있고요. 물론 그 상을 받는다고 이창동 감독님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감독님의 인생이 뭔가 확 달라지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상을 받는다면 그 상의 의미는 감독님이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죠. 감독님을 애정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 같아요. 그나저나 (조)여정이가 되게 좋은 꿈을 꾼 거예요. 그래서 제가 팔라고 그랬어요. 대신 감독님이 사면 감독상으로 끝날 수도 있으니까, 더 큰 상 받도록 제작사 파인하우스필름의 이준동 대표님에게 팔라고요.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