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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애태우는 세계의 복원 - 시리즈 <스캔들> 정지우 감독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정지우 감독은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세계>를 영상화하고 싶어서 시리즈 <스캔들> 연출 제안에 응했다. 파리 사교계 남녀들이 주고받은 편지 175통을 엮은 서간 소설을 아주 오래전에 처음 읽었을 때부터 “이건 100년 뒤에 누가 봐도 재밌을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우리끼리만 읽는다는 걸 전제로 한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엿보는 구조이니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언어유희도 감탄스럽다. 그렇기에 영화와 드라마로 거듭 만들어진다고 본다.” 소설을 읽으면 정지우 감독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역으로 든다. 소설은 상대를 간절히 갖고 싶든, 파멸로 밀어버리고 싶든,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든, 인물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를 들여다본다. 자기 마음의 탐구는 첫 장편영화 <해피엔드>(1999)부터 시리즈 <썸바디>(2022)까지 정지우 감독이 줄곧 해오던 작업이기도 하다.

- 쓰거나 받아본 편지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

같이 작업한 동료들, 특히 배우들에게서 편지를 종종 받는다. 똑같이 손으로 써줄 능력은 못 되어도 감사 문자만큼은 꼭 남긴다. 받은 편지들은 한통에 다 모아서 집에 보관 중이다. 버릴 수 없다.

- 말과 글 중 어느 것이 더 편한가.

글이 훨씬 어렵고 두렵다. 시나리오를 쓰는 감독으로서 글은 내 작업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초고에서부터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되는 문장,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글쓰기는 정말 위대한 재능 중 하나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야 뭐, 어쩌다 한 경우이고.

- 현장에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나. 혹은 에두르는 편인가.

방해하지 않을 궁리를 하며 말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배우들이 자기 몸에서 동기가 일도록 하는 거다. 두 걸음 가서 뒤돌아봐 달라고 말하면 타이밍을 잡기는 편하지만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일 때의 결과가 훨씬 좋다. 그만큼 초반에 배우들이 내 현장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한다. 그즈음 되면 나보다 캐릭터를 더 잘 알게 돼 내가 오히려 더 묻는 편이다.

- 원작 소설의 팬인 만큼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기뻤겠다. <스캔들>에는 어떻게 합류했나.

<유열의 음악앨범>(2019)을 함께 만든 제작사 무비락의 김재중 대표가 <스캔들>을 시리즈로 만들고 싶다며 제안했다. 특히 판소리를 유감없이 쓰고 싶다고 하는데 그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판소리에 친숙한 편이 아니어도 공연을 보면 재밌다. 소리꾼도 한마디, 관객도 한마디하면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그런 요소를 살려보고 싶었다.

- 소리꾼이 과거 시험 현장을 묘사하기도 하고 “연출 양반”이라며 말을 걸기도 해 흥이 나더라. 판소리 못지않게 서양 악기도 풍부하게 썼고.

극 중 배경이 18세기 말이다. 정조 말기에 해당하는 때인데, 이 시기 유럽에서는 바로크음악의 영향이 이어지고 있었고 이 음악이 판소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장면에 어울린다면 음악은 최대한 다양하게, 두려움 없이 넣어보자 싶었다. 바이올린, 더블베이스, 플루트 등으로 구성된 독일 오케스트라 ‘더 저먼 필름 오케스트라 바벨스베르크’(The German Film Orchestra Babelsberg)가 참여했고, 오프닝 시퀀스가 시작하자마자 들리는 줄 튕기는 소리가 하프인데, 욕심껏 시퀀스가 끝날 때까지 썼다.

- 시나리오는 드라마 <협상의 기술>을 쓴 이승영 작가, 전작 시리즈 <썸바디>를 각색한 안혜송 작가가 공동 집필했다. 어떤 식으로 함께 작업했나.

큰 틀에서 <스캔들>은 긴 영화에 가까운 시리즈라고 생각했다. 회마다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한 호흡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시나리오에 들어가기 전부터 준비 과정이 길었다. 사극 마니아층이 보기에도 만족스러운 작품이 되도록 자문 교수단을 두고 장인들도 찾아뵈며 생활사 전반부터 공부했다. 그런데 한권 읽으니 두권 읽을 게 생기더라. 도통 끝이 없었다. 보자기 묶는 연수도 받았는데 타고난 곰손이라 아무리 연습해도 잘되지 않았다. 배워보니 묶는 법 하나도 어찌나 과학적이던지, 옛사람의 지혜에 놀란 게 한두번이 아니다. 대장정이었지만 이 기반을 다지는 일이 정말 재밌었다. 18세기 후반이 근대의 맹아가 시작되는 여러 징후가 나타나는 시기여서 흥미로웠다.

- 혹시 이 작품을 하는 동안 한복을 샀나.

사진 않고, 가격까지는 물어봤다. (웃음) 1년에 한번 입을까 말까 한 옷에 투자할 금액이 아니어서 포기했다.

- ‘왜 지금 다시 <스캔들>이냐’는 받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고, 스스로에게도 던져봤을 것 같다. 준비된 답변이 있을까.

자기 주도성을 이미 가진 조씨부인(손예진)과 자기 주도성을 갖기 시작한 희연(나나). 이 두 캐릭터와 이들의 관계를 잘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야 이 오래된 이야기를 2026년에 넷플릭스 시리즈로 만드는 의미가 생길 거라는 판단이 있었다.

- 조씨부인 집에 소실로 들어온 소옥(신윤하)과 희연의 몸종 은실(김지안)도 자기 주도성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이다.

하인부터 부유함을 갖기 시작한 중인과 양인, 왕까지 이 시대의 계급과 관계가 고루 드러나는 이야기를 만들자는 게 애초에 세운 또 다른 계획이었다. 그래서 대표성을 띠는 인물들의 부피를 늘렸다.

- 시리즈는 조씨부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원작 소설에서 조씨부인에 해당하는 인물이 메르테유 후작 부인이다. 175통의 편지 중 후작 부인이 쓴 편지의 비중이 가장 작다. 그렇지만 서술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조씨부인을 주인공으로서 지켜주고 싶었다. 또 메르테유는 이 소설로 뭔가를 만들려는 창작자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멜로드라마의 루저로 만들 위험이 큰 인물이다. 이 함정과 허들을 뛰어넘어보자는 게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였다.

- 조씨부인의 다양한 면을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그는 남성이었다면 “장원급제를 할 만큼” 지적이고 실리적인 동시에, “형님” 소리를 하며 살갑게 다가오는 소실 소옥에게 모질지 못한 심성을 지녔다.

언급한 소옥과의 장면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조씨부인 신이다. 이때 소옥이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냐며 가까이 붙어 앉으려고 하니까 조씨부인이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절대 안 붙으려고 한다. 손예진 배우가 만든 디테일이었다.

- 연출자로서 손예진 배우와 함께한다는 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진다는 것. 일종의 모든 걸 뚫는 창을 손에 쥔 셈이다. 말도 안되는 설정을 넣었다 해도 그가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 조원(지창욱)은 좀더 사랑에 빠진 사내랄까. 그가 방탕해지는 계기가 사촌 누이인 윤(=조씨부인)과의 사랑에 실패했기 때문이고, 그가 처음 여성을 취하는 것도 상대가 누이처럼 보여서다.

조원의 앞면은 순정한 사랑을 믿는 자다. 뒷면은 지창욱 배우의 해석이 좋아서 그대로 쓰자면 복수하고 싶은 자다. 둘의 사랑이 어그러진 건 결국 윤 탓이고, 자신에게 모질게 구는 누이에게 어떻게 복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조원은 이 앞면과 뒷면을 오가며 마음이 널을 뛰는 상태에 있다. 못된 구석이 있되 그걸 상쇄할,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길 바랐는데 지창욱 배우가 양면을 다 살려주었다. 시도 때도 없이 촉촉해지는 눈에 말은 또 어찌나 잘 타는지. 유머의 타이밍도 기막히고. 하여튼 좋은 뜻에서 이상한 사람이다. (웃음)

- 조윤과 조원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어릴 적 서로가 첫사랑이었던 둘은 여전히 간절히 원하는 것 같으나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어 추측만 할 뿐이다. 그 미묘함이 보는 사람을 애태우게 하는데, 그게 이 극의 재미이기도 했다.

시청자가 모호하고 불편하게 느끼게 하면 안된다는 불안감에 관계를 확정하는 순간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거라고 생각했다. 외줄타기의 자세를 끝까지 가져가려고 했다. 그렇다고 인물 각각의 핵심 감정을 모호하게 남겨두진 않았다. 다 보고 나면 이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 남편의 상을 치르는 중이라 소복 차림인 희연은 아직 그리움 한가운데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만큼 조원의 유혹에 더더욱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

5부부터 희연은 각성하면서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후반부 행보가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어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거다. 이런 변화를 품은 캐릭터라 전통적인 여인상이 아닌 캐스팅을 원했는데 나나 배우가 적임자였다. 어떻게든 희연의 감정에 더 가까이 가려고 끝까지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화에 잊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이 있다.

- 발전된 시대의 사극이란 이런 걸까 하고 체감한 장면들이 있다. 이를테면 드론 촬영으로 남촌과 북촌 구석구석을 보여줄 때다. 이런 브리지 구간이 내용 파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있으니 확실히 몰입이 되면서 그 존재의 필요성을 느꼈다.

동감하는 바고 공도 돈도 많이 들인 신들이다. 전국의 좋은 한옥을 다 찾아다녔고, 고른 나무집들을 작품 톤에 맞게 디에이징했다. 당시의 주거 형태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이때도 살고 싶은 사람은 넘쳐나는데 땅은 좁은 주거난이 있어서 불규칙한 마당과 담벼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위세 높은 이들은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고. 옛날에는 집 안에서 누에를 쳐서 베를 짰다는, 말로만 듣던 이야기도 장면으로 구현해서 어떻게 사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싶었다.

- <해피엔드> <사랑니> <은교>부터 <썸바디>까지 필모그래피가 쌓이면서 금기된 관계를 다루는 감독이라는 수식이 생겼다. 어떻게 생각하나.

금기는 내 작품이 가진 여러 가지 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도 내가 본질적으로 무엇에 관심이 있는 작가, 감독인지 궁금했는데 그걸 들여다볼 기회가 몇년 전에 있었다. 202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사랑니>가 4K로 복원되어 상영되던 때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한 문장으로 정리됐다. ‘나는 약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구나.’ 어느 시대든, 사회든, 상황이든 약자란 존재하는데 이들에게도 자기 주도성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억눌려 있거나 발견되지 못했을 뿐이다. 이야기에서 그걸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고 싶다.

-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약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나.

늙어감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나이가 되다 보니 노인의 삶에 갈수록 관심이 간다. 그리고 디아스포라에 관한 이야기도 해보고 싶다. 지금은 내가 용기를 내서 작업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단계다. <4등>을 만들 때의 각오로 열심히 취재하고 공부하면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라고 본다.

사진제공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