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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배우 류승룡, 최민식, 한소희, 기시이 유키노, 이정은, 공효진, 하지원&<씨네21> 기자들의 추천 콘텐츠

이정은 배우 - 삶에 긴 여운을 남기는 영화

<일 포스티노>

생애 나를 가장 많이 울렸던 영화는 <일 포스티노>.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으로 질문하던 우편배달부는 실제 직업 배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삶이 영화와 너무나 일치해서 마음에 강물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주옥같은 음악까지도 너무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나는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사랑한다.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예술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을. 그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은 엄청난 변곡점이다.

영화를 볼 때 직업병처럼 계속해 눈길이 가는 건 소품이다. 배우들이 소품을 어떻게 다루는지 나도 모르게 유심히 보게 된다. 그게 사실은 되게 작은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 하나로 연기의 현실성과 핍진성을 믿게 되거나 그러지 못하거나를 판가름한다. 특히 직업과 관련한 작품이라면 더더욱 크게 신경 쓰인다. 영화를 보다가 계속해 여운이 남을 때면 그 영화의 음악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반복해서 듣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라디오에서 영화음악만 모아서 틀어주는 프로그램이나 코너도 많았는데. 그런 낭만이 무척 좋았다. 어떤 장면은 어떤 음악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을 마주할 때 너무 행복하다.

공효진 배우 - 작품을 향한 열망을 일깨우는 영화

<경주기행>

최근 나를 사로잡은 영화는 <와일드 씽>. 다들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던지. 눈물겹게 재밌게 봤고 어떤 캐릭터는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 박지현 배우가 연기한 도미도 좋았고 상구(엄태구)가 랩할 때 나라면 어떤 컨셉을 잡을지 상상해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시대물을 많이 안 해봤다. 나중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지나온 1980년대를 재현한 작품 속에 들어가봐도 재밌을 것 같다.

몇번이고 반복해 들려볼 수 있는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 제일 좋아하는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꺼내드는 영화다. 답변이 매번 너무 똑같나 싶긴 해도, <이터널 선샤인>을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기상천외한 영화가 있을까 감탄한다. 사랑을 앓는 주인공들의 감정, 이별로 인한 그들의 처절한 슬픔과 애잔함에 깊게 공감한다. 나도 언젠가 그런 영화의 세계에 함께할 수 있길 바란다. 리메이크가 된다면 주연으로 참여하고 싶은 영화는 <경주기행>. 내가 이정은 선배 나이가 됐을 때 옥실 역을 꼭 맡고 싶다.

류승룡 배우 -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영화

<오디세이>

올해는 정말 좋은 영화들이 많았다. 상반기엔 영화 <호프>를 보고 매혹됐다. 기발하더라. 거침없고,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그냥 다 해보는구나 싶었다. 이런저런 개연성을 떠나 끝까지 박력 있게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박수쳐주고 싶은 영화였다. 이어 <오디세이>가 개봉했는데, <호프>엔 미안하지만 <오디세이>를 본 순간 내겐 그 영화가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됐다. (웃음) 약 28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공명하는 이야기의 힘이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보편적으로 끌리게 마련인 것 같다.

요즘엔 콘텐츠가 사방천지에 쏟아지고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으니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경우가 드문데, 과거를 떠올려보면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가 그랬다. 한창 연기 공부할 무렵에 그 영화를 교보재처럼 봤다. 알 파치노의 형형한 눈빛, 수십발의 총탄을 맞고 춤추듯 쓰려지는 장면이 아직까지 선연하다.

지금, 언젠가 영화를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특히 좋아한다. 인간 삶에 불가항력적으로 들이닥치는 일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른스럽다고 할까. 다음 세대에 손을 내미는 듯한 제스처도 좋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나와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원 배우 -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해준 영화

<어바웃 타임>

배우를 꿈꾸게 한 영화는 <E.T.>. 영화라는 세계에 처음으로 마음을 빼앗기게 한 작품이다. 낯선 외계 생명체와 소년이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가 당시의 내겐 현실처럼 느껴졌다. 실제론 만날 수 없는 존재와 세계를 믿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도 배우가 되어 관객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고 오래 기억되는 감정을 전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해줬다.

주인공을 연기해보고 싶은 작품은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드니 라방이 연기한 알렉스. 외로움과 사랑, 광기와 순수함을 말보다 몸과 눈빛으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거칠고 위태롭지만 그 속엔 살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강렬한 생명력이 있다. 성별을 넘어 그 폭발적인 감정을 온몸으로 연기해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는 <어바웃 타임>. 결국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평범한 오늘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영화이지 않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선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최민식 배우 - 내가 좋아하는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감성에는 여러 면이 있다. 나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스트레이트 스토리>(1999) 같은 영화를 좋아하고 나 자신도 찍으려 하는 편이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처음 봤을 때 정말 놀랐고 지금도 이 영화를 참 좋아한다. 70대 노인인 앨빈 스트레이트(리처드 판스워스)는 형 라일 스트레이트(해리 딘 스탠튼)와 오래전에 싸워서 의절한 사이인데, 몇십년이 지난 어느 날 형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는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앨빈이 형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그것도 잔디 깎는 기계를 타고. 왜 잔디깎이냐면 앨빈이 운전면허가 없어서. (웃음)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그야말로 70대 노인이 잔디깎이 트랙터를 타고 6주에 걸쳐 형을 만나러가면서 별별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인데, 가면서도 주인공 앨빈은 형이 살아 있기만을 바란다.

결국 형 집 앞에 도착한 앨빈은 형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런데 형이 슥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럴 때 “와~ 형”이라며 형제가 부둥켜안고 울 것 같지 않나. 그러나 린치 감독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70대 노인 둘이 나란히 앉아 덤덤하게 “어떻게 알고 왔냐”라는 대화를 나눈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그렇게 끝난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를 좋아한다. 게다가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음악도 참 좋다.

한소희 배우 - 나를 배우의 길로 이끌어준 영화들

<디태치먼트>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디태치먼트>(2012). 나는 성장을 다루는 영화를 좋아한다. 이 영화는 아이들의 성장을 교사의 시점으로 풀어내는 영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조기교육 같은 것들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 나는 인터뷰나 내레이션 형태로 시작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가 딱 그렇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내레이션 첫 문장에 영화의 전체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한 영화들은 주로 나의 취향을 건드리는 영화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서 나 같은 얼굴도 어쩌면 예쁨과 서러움과 슬픔과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마음을 품게 됐다. 나는 또 <수어사이드 룸>(2011), <토니 타키타니>(2004),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처럼 가슴에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은 영화들을 특히 좋아하는데 이런 유의 영화들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영화들에서부터 모든 게 시작됐던 것 같다. ‘나 지금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왜 울지 않고 웃고 있는지 알 것 같아. 왜 그 마음이 이해되지? 어? 저 배우가 왜 저렇게 표현하는지 알 것 같아.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마음에서 모든 게 시작됐다. <글루미 선데이>(1999)를 보고는 그 시절, 그 나라의 온기를 느껴보고 싶어 부다페스트에 간 적 있다. 영화에서처럼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술을 마시거나 커피를 즐기는 문화를 느껴보고 싶었다.

가장 많이 반복 관람한 영화는 <몬스터 주식회사>(2001). 정말 명작이다. (웃음) 최근에 <HBO> 드라마 <체르노빌>(2019)도 여러 번 돌려봤는데 재난 상황 너머의 인물들의 인생에 자꾸만 시선이 머물렀다. 사실은 실화 바탕의 작품을 잘 보지 않는다. 과몰입을 하는 편이라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영화도 기피한다. <체르노빌>은 좀 예외였다.

기시이 유키노 배우 - <아마겟돈>과 <마더>

<마더>

“보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영화는 무엇인가?” 기자의 질문에 기시이 유키노 배우는 한참을 고심했다. 정적을 깨고 “혹시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 타입인가?”라고 다시 한번 묻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아니! 완전히 잘 우는 타입이다. 그래서 더 고민이다. 보면서 운 영화는 많지만, 아무래도 결말에 가서 목놓아 울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눈물의 양으로만 친다면 아무래도 블록버스터영화를 고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예를 들어 <아마겟돈>(1998)이라든지…. 아, 조금 더 시네필 같은 답변을 하고 싶었는데!” 덧붙여 조금은 고루한 질문도 건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국영화는?” 이번에는 단숨에 답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 이런 영화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다혜 기자 - 웹소설 <1957년, 식모는 아공간을 숨겼다>

명문대를 졸업해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20대 여자 신서희가 1957년을 사는 15살 식모 소녀 김순덕이 된다. 설정만으로 고구마 100개인데, 놀랍게도 ‘힐링’ 소설. 순덕의 주인집은 양말 공장을 운영하는 중산층 가족이다. 밥을 지으려면 연탄불 아궁이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다행인 것은 순덕에게 아공간이 있다는 것. 아공간에 쟁여둔 물건이 많음에도, ‘수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미군부대에서 빼낸 척하며 가져다 팔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양말 같은 생필품뿐이다. 1957년 서울은 2026년을 살던 서희에게도 독자에게도 생경하다. 지네를 잡아서 푼돈을 버는가 하면 창경궁은 아직 창경원이라 불리고, 라디오가 있는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라디오 드라마를 감상한다. 옆집에서 일하는 식모 언니가 처한 곤경을 돕고, 상이군인인 단골 어물전 주인아저씨의 환상통 치유를 돕는 등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천둥번개가 치는 밤에 사람들이 전쟁이 난 줄 알고 발작하는 모습이라든지, 현충일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나는 광경은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케 한다. 그럼에도 웃기고, 귀엽고, 엉뚱하다. 댓글에 적힌 “나의 ‘까만머리 앤’”이라는 말은 공치사가 아니다.

남선우 기자 - 다람의 한국문학 앤솔러지 시리즈 ‘얽힘

한창 힙합 음악을 즐겨 듣던 시절,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문학도 피처링(featuring)이 가능할까? 한 작가의 소설에 다른 작가가 문장을 더해 독창성을 살리되, 단일한 이야기로 어우러지게끔 하는 식의 공동 작업을 읽어보고 싶었다. 나중에서야 김중혁 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그가 비슷한 시도를 해봤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어 아쉬웠다. 최근 접한 한국문학 앤솔러지 시리즈 ‘얽힘’은 상상으로만 남아 있던 작법의 실험 결과처럼 다가왔다. 출판사 다람이 2025년 1월부터 5권째 펴내고 있는 이 선집에는 한권에 세 사람씩, 지금까지 15명의 소설가가 참여했다. 각각의 책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세 작가가 같이 일궈볼 세계관이나 소재, 장면 등을 공유한다. 각자 이를 느슨하게 적용하되 독자가 그 연결고리를 눈치챌 수 있게끔 글을 쓴다. 서로의 소설을 읽고 작가가 작가를 인터뷰한다. 그들이 어떤 대화를 거쳐 공통의 테마를 건져냈고, 확장했고, 변주했는지 독자에게 확인시켜주는 기획이다. 일례로 성혜령, 이서수, 전하영 작가가 함께한 ‘얽힘’ 1권 속 수록작들은 모두 ‘손절’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서울 북촌의 정독도서관을 등장시킨다. 세편을 다 읽어야 퍼즐을 맞출 수 있는 데다, 끝자락에 실린 코멘터리도 온전히 따라갈 수 있어 완독의 욕구가 커진다. 200쪽 내외의 총분량도 부담을 덜어준다. 어떤 비밀을 발견할지 모르는 채로, 끌리는 이름을 따라 책 한권의 자장에 얽히다 보면 동시대 한국문학의 깊이와 너비에 감응하게 된다.

이유채 기자 - 일본 드라마 <T셔츠가 마를 때까지>

넷플릭스 시리즈 <가스인간>을 보고 현재의 아오이 유우 연기가 더 보고 싶어졌다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지난 7월 시작한 일본 드라마 <T셔츠가 마를 때까지>가 넷플릭스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총 10부작으로 전편이 공개됐으며,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짝사랑 세계>의 도이 노부히로 감독이 연출했다. 동네 코인 세탁소에서 티셔츠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키코(아오이 유우)가 하는 일은 이곳에서 알게 된 남자 이츠키(나카지마 아유무)와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둘은 이럴 때나 만나는 자신들과 달리, 서로의 배우자들은 세탁소에서 주기적으로 만나며 불륜 관계를 맺은 게 아닌지 의심한다. 사키코의 남편 미츠루(마쓰야마 겐이치)와 이츠키의 아내 아즈사(가호)가 나란히 함께 탄 버스가 추락하면서 시작된 의심이다. 이 사고로 아즈사는 죽고 미츠루는 실종된다. 같은 고통을 나눌 유일한 서로가 된 사키코와 이츠키는 실종된 미츠루를 함께 찾아 나선다. 연휴에 이 시리즈를 추천하는 이유는 명쾌하다.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배우자들이 정말 불륜이었던 건지, 실종된 미츠루는 어디에 있는지, 무엇보다 사키코와 이츠키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에 언제쯤 솔직해질 것인지, 답을 알고 싶은 궁금증이 초반부터 속출한다. 오로지 아오이 유우를 보기 위해 재생했다 해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절망을 숨긴 채 씩씩하게 버티는 그의 얼굴에는 반짝이는 슬픔이 있다.

배동미 기자 - SBS 라디오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 중 ‘박혜진의 클래식은 영원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엔 군것질하듯이 독서했다. 버스를 기다릴 때, 지하철에 타서,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누군가를 기다릴 때 사탕을 입에 쏙 집어넣듯 책을 꺼내 읽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 시간이 현격히 줄었다. 시간에 쫓겨 택시를 타고 어린이집으로 향할 땐 속이 울렁거려서 메시지만 간신히 주고받을 뿐이다. 게다가 마음이 급해지면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SBS 라디오 는 삶에서 책이 멀어진 때 만난 샘물 같은 존재였다. 특히 민음사 해외문학팀 박혜진 편집자가 고전소설을 소개하는 ‘박혜진의 클래식은 영원하다’ 코너는 육아휴직 중 팟캐스트로 가장 많이 들은 오디오 콘텐츠다. 아이가 낮잠을 잘 때 젖병을 삶고 하얀 손수건을 접으며 박혜진 편집자가 맑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고전소설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조선시대 때 글을 모르던 서민들이 책가도를 집에 걸어놓고 책의 기운을 받았던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면 와닿으려나. 박혜진 편집자가 또록또록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책의 분위기에 맞는 배경음악까지 더해져 상상력이 자극되기 시작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 편은 음산한 음악을, 니콜라이 고골의 <코>는 뚱땅거리는 연주곡과 함께였다. 최애 에피소드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편으로, 감동적인 마지막 단락을 듣고 직접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추석 연휴에 빈지 워칭만 있나. 빈지 리스닝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 3년간 박혜진 편집자가 녹음한 오디오 콘텐츠를 거슬러 올라가며 들으면 분명 호기심이 이는 고전문학을 찾게 될 것이다.

이자연 기자 - 경영시뮬레이션 모바일게임 <생과일 타이쿤>

피처폰 시절 누렸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단연 타이쿤 이자연 기자게임이다. 붕어빵타이쿤, 미니게임천국, 짜요짜요 타이쿤까지…. 컴투스와 엠조이넷이 주력 삼은 경영시뮬레이션과 미니 게임은 단언컨대 2000년대의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얼마 전 학부 시절 내내 달고 살았던 <생과일 타이쿤>이 스마트폰 버전으로 업데이트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바일게임 은 생과일주스 판매뿐만 아니라 와플까지 팔아야 하고(난도 최상), 빌리지·캠퍼스·메트로시티 등으로 나뉘어 있던 랜드 맵은 후르츠섬·스핑크스섬·해적섬 등 섬으로 확장해 항해 액션을 펼치게 했다. 그렇다면 피처폰의 타건감은 어떨까? 비록 버튼을 도록도록 누르던 감성은 사라졌지만 주스를 따르거나 판매할 때 나오는 아날로그적 사운드가 그를 보완하기 충분하다. 중간중간 스핑크스의 질문이나 포운신의 제사 퀘스트가 어려워 한참을 헤매기도 한다. 그럴 땐 명심하자. 나보다 일찍 게임을 완료한 사람들이 남긴 공략집을! 주의점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오리지널 게임의 픽셀 화면을 그리워한 것인지 섬 곳곳을 오갈 때 공간 점프 없이 순수히 걸어가야만 한다. 이걸 보다가 속 터질 수 있다. 두 번째,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순삭! 실제로 나는 이것만 하다가 닷새를 통째로 삭제시켰다. 이번 추석 연휴에 추천.

정재현 기자 - 시어터 오브 워 프로덕션의 낭독극 <오이디푸스 프로젝트>

시어터 오브 워 프로덕션(Theater of War Productions)은 낭독극 전문 단체다. 이들은 낭독극 상연 후 GV 형태의 토론을 열어 관객이 희곡을 경유해 담론 형성의 주체로 기능하도록 돕는다. 재소자와 교정 공무원 앞에서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공연하며 형사 사법 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펼쳐 보이는 식이다. 빌 머리, 폴 지어마티, 제시 아이젠버그 등의 배우가 이 프로젝트를 자주 찾는데 올해엔 윌럼 더포가 헨리크 입센의 <민중의 적> 무대에 올라 현재 인류가 마주한 기후 위기, 공공보건 문제를 논했다. 그간의 낭독극은 시어터 오브 워 프로덕션의 유튜브 채널에서 관람 가능하다. 이중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원전으로 한 <오이디푸스 프로젝트>를 권한다. 2020년 5월7일.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봉쇄된 날. 오이디푸스에 오스카 아이작, 이오카스테에 프랜시스 맥도먼드, 크레온에 존 터투로 등 ‘코언 사단’이 무대 대신 자기 방 안에,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 대신 맥북 웹캠 앞에 섰다. 배우와 관객은 각자 줌(Zoom)에 접속해 기원전 429년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전염병 직후의 아테네로 향한다. 질병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끼친 여파를 경각하고 공동체의 연결 가능성을 부르짖기 위해서다. 명배우들이 비대면 화상 연기로 모니터 너머 상대 배우에게 화상(火傷)을 입힌다.

이우빈 기자 - 이윤희 만화 <안경을 쓴 가을>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바야흐로 가을이 온다. 독서의 계절이니만큼 침대맡에 만화책 한권쯤은 두는 것이 필수 교양이겠다. 그것이 이윤희의 만화 <안경을 쓴 가을>이라면 더욱더 적절할 테다. 작가 특유의 차분한 화풍, 사색적이며 선선한 분위기가 만화의 모든 컷에 실려 있다. 강아지 ‘가을’은 왠지 모르지만 사람 말을 할 줄 안다. 이를 눈치챈 ‘형’은 ‘가을’에게 자기 안경을 씌워주며 말한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내가 되어줘. 부탁해.” 하여 ‘가을’은 ‘형’ 대신 엄마와 시장도 보고 밥도 먹고 학교도 다닌다. 참으로 만화적이다. ‘형’은 <호밀밭의 파수꾼>에 빠진 채 풋사랑의 계절을 통과하는 중이다. 그 바람에 실려 돌연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야 만다. <안경을 쓴 가을>은 비인간의 주체성으로 가득하다. 가을이란 계절을 인간이 만들진 않는다. 자연스레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의 현상이다. 가을을 품은 이 세상의 주인 역시 인간만은 아니다. ‘가을’에 이어 훗날 ‘겨울’이란 이름을 얻는 고양이(와 길냥이 친구들), 길가의 낙엽과 아파트 창문 너머의 온갖 사물들. 알 수 없는 얼굴들과 어딘가 성나거나 착잡한 움직임들. 이 모든 생동감과 잔잔함이 모여 가을의 정취를 이룬다. 설렌다. 권두에 실린 작가의 말부터 마음에 꽂힌다. “가을엔 좀더 긴 산책을!” 덧붙여 가능하다면, 가을엔 좀더 만화와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