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에서는 아무리 상황이 심각해져도 주인공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어떤 금연 영화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도 <인사이더>는 동시에 강력한 사회파 영화다. <인사이더>는 등장인물들과 사건의 폭이 만만치 않은데, 수많은 회사와 사람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담배산업을 주축으로 언론과 기업의 유착관계, 기자와 정보원과의 관계 등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 자칫 사회면 톱기사를 밋밋하게 옮겨버린 듯한 장광설을 사뿐히 기워낸 것은 전적으로 마이클 만의 연출력이다(<인사이더>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포함,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특히 2시간45분의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낮은 포복으로 일관하는 클로즈업이 없다면, 영화의 긴장감은 아예 증발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큐감독 출신답게 마이클 만은 <라스트 모히칸>의 안이한 로맨티시즘을 뒤로 하고 <히트>를 전환점 삼아 점점 더 날카로운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드
어떤 금연 영화보다 강력한 영향력, <인사이더>
-
별거한 지 4년, 지난 95년 결혼했지만 한해도 채우지 못하고 다음해 1월 별거한 니콜라스 케이지와 페트리샤 아퀘트. 최근의 법정 자료에 따르면, 니콜라스 케이지는 지금까지 이혼을 위한 자료를 제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혼 사유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판이한 두 사람의 성격 때문이라나. 현재 니콜라스 케이지는 재산 분할을 법원에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 와중에도 이들은 지난해 마틴 스콜세지의 <비상근무>에서 피어스와 메리로 나란히 케스팅돼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니콜라스 케이지, 법원에 위혼 자료 제출
-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이기보다는 뛰어난 다른 누군가인 척하는 게 낫다-<리플리> 중”.
완벽할 수 없는 삶의 순간순간, 리플리와 같은 욕망을 느껴보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볼품없고 초라한 자기 연민의 늪 근처에도 가본 일 없노라 자신하기란 쉽지 않다. 마음먹은 대로 잘 풀리지 않는 삶의 무게는, 부족함 없어뵈는 비교항을 만나면 한결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햇빛 찬란한 이탈리아 해안에서 쾌락을 즐기는 디키를 만났을 때의 리플리처럼. 거울을 마주한 리플리의 탄식 같은 독백으로 문을 여는 <리플리>는, 나 아닌 타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욕망의 파행적 행로를 따라간다.
호텔에서 손님 시중드는 보이, 연회장의 피아노 연주자로 생활을 꾸려가는 리플리의 현실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디키의 동창 행세로 얻어낸 이탈리아행 티켓은, 상류사회의 삶을 갈망하는 리플리의 욕망에 뜻밖의 길을 열어준다. 리플리는 자신이 꿈꿔온 모든 것을
나 아닌 타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욕망의 파행적 행로, <리플리>
-
[정훈이 만화] <슬리피 할로우> 물레방앗간의 연쇄살인사건
[정훈이 만화] <슬리피 할로우> 물레방앗간의 연쇄살인사건
-
-
1, 베를린영화제 평생공로상을 받은 여배우들의 인터뷰는 늘 감동적이다. 개인적으로 그닥 호감이 안 가는 카트린 드뇌브(98년)는 역시 인터뷰도 별 감흥이 없었지만, 마치 대항해시대의 탐험가처럼 영적 성적 예술적 정치적 세계를 용감무쌍하게 탐험해온 셜리 매클레인(99년)이나 예전엔 유럽예술영화의 연인이었고 지금은 그 대모인 잔 모로(2000년)의 인터뷰를 보노라면 대배우란 하나의 박물관이구나 싶다. 그들의 내면엔, 여러 시대의 공기와 명감독들의 상상력과 수많은 가상의 개인사들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대가가 되는 건 아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대가가 된 사람에게는 ‘길을 아는’ 사람만의 체취가 있다.
2. 배우의 가치는 스타의 가치와 다르다. 배우의 가치가 작품에서 나온다면, 스타의 가치는 산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치>의 제작비 4500만달러 가운데 2천만달러가 디카프리오의 개런티였다. 그건 할리우드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그래서 메이저 스튜디오
[편집장이 독자에게] 배우에 대한 세 가지 단상
-
종일 아이를 보는 토요일. 내 몸을 짓밟으며 공룡 놀이를 하던 김단과 김건이 잠시 다른 놀잇감을 찾아 물러간 틈을 타 텔레비전을 켠다. 연속극, 스포츠, 쇼, 미국방송, 일본방송, 중국방송…. 버릇대로 이리저리 리모컨 서핑을 하다 눈에 밟히는 얻어맞는 고딩의 클로즈업. 숏이 바뀌고 H.O.T가 카메라 앞에 바짝 다가와 팔을 휘젖는다. H.O.T가 왕따를 노래하고 있다. 언젠가 씨랜드 아이들을 노래하는 걸 본(‘들은’이 아니다. 이수만은 H.O.T의 장르가 립싱크라 확인한 바 있다) 기억이 살아나면서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영혼까지 팔고사는 자본주의라지만 해도 너무 하는군.
한때 통기타를 치며 여린 목소리로 <모든 것 끝난 뒤> 같은 감상적인 노래를 부르던 ‘트로트 포크’ 가수 이수만은 미국 유학에선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단단히 배워왔던 모양이다. 대중음악 상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여느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한 최초의 한국인일 그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공산품의 길
-
캐서린 제타 존스는 아름답다. 천성적으로 여배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엔트랩먼트>를 세번씩이나 본 것은 순전히 그녀의 섹시한 엉덩이와 고혹적인 눈빛 때문이었다. 으흠, 저 정도라면 과연 마이클 더글러스가 몇백만달러의 게임비(이혼위자료)를 치르고서라도 달려들 만하군! 스크린 속의 여자에게 반한 것은 마릴린 먼로 이후 거의 20년 만의 일이어서 새삼스럽게 사춘기로 돌아간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때로는 한심해보이는 반복만이 숨겨져 있던 비밀을 드러내주는 법이다. 꼼꼼히 들여다보라. <엔트랩먼트>의 시나리오는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그저 ‘웰메이드’ 테크노 액션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그 저류에 흐르고 있는 두 도둑 남녀(!)의 멜로라인 역시 범상한 수준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본질적으로 ‘빤할 수밖에 없는’ 멜로라인을 서브플롯이라는 좁은 범주 내에서도 이만큼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는 작가라면? 필모그래피를 뒤져보던 나는 전율했다.
[할리우드작가열전] 병약했던 아이의 고집불통 출세기, 론 바스
-
<바보선언>은 창고에서 썩고 있었지만 제작사 화천공사와 오래 전에 이미 <어둠의 자식들>을 3부작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미리 가불한 돈을 갚기 위해서 이동철의 또다른 소설 가운데 <오과부>를 <과부춤>이라는 타이틀로 영화를 만들었다. 세 사람의 과부 이야기를 마당극처럼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옴니버스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84년 구정에 대한극장에서 자신만만하게 개봉했지만 관객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이 내 이름을 보고 무조건 영화를 보러오지는 않았다. 그 <과부춤>의 마지막 녹음 때였다. 제작사의 나이 많은 임원과 전화로 욕설을 주고받으며 크게 싸움을 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냈는지? 지금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궁핍해서 그랬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이미 나는 사면초가로 쫓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흥분 끝에 담배끊은 지 오래 되었음에도 어느새 녹음기사에게서 담배를 얻어 피우고 있다는 사실
이장호 [45] -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네, <과부춤> <바보선언>
-
“덩크슛! 한번 할 수 있다면, 내 평생 단 한번만이라도….” 조니는 한강 둔치를 거닐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마이클 조던의 팬이었던 조니. 하지만 그는 선천적인 장애로 농구를 할 수 없는 몸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둔치를 찾아, 농구하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저녁 노을이 물들기 전부터 아이들이 하나둘 코트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흐린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땀을 흘리며 농구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안녀∼엉. 오래간만에 나왔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요일에만 이곳을 찾아오는 웬즈데이라는 아가씨다. “오늘은 미장원 쉬나 보지?” 조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더 두근거렸다. “네, 월차냈거든요.” “말 놓으라니까 그러네. 근데 수석 아티스트가 빠지면 미장원 영업이 되나?” 조니는 앞으로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슬리피 헬로
-
사담을 공개하는 게 비열한 짓인 줄 안다. 그러나 아줌마는, 지한테 유리할 때 비열해질 줄 또한 안다.
뭐냐면, 자기철학이 매우 뚜렷한 어떤 잡지의 총수가, <춘향뎐>에 대해 아줌마가 떠드는 것을 보름씩이나 막아왔다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이 같은 주제로 쓰기로 했대나 어쨌대나 하면서, 속으로는 이 아줌마가 성스러운 임권택 감독에 대해서 무슨 불경죄를 저지를까, 호시탐탐 견제의 칼날을 늦추지 않았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잡지가 <춘향뎐>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문장 죽이게 아름다운 각종 평문을 수백만건이나 게재하고 난 뒤, <춘향뎐>이 개봉관에서 거의 떨어지는 바람에 아줌마의 요도난담이 대세에 지장을 못 끼치게 된 뒤, 총수님은 안도한 나머지, 사석에서 이런 요지의 실언을 했다. “우린 절대로 검열 따위는 하지 않아. 그러나 임권택 감독님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검열기준이 있지.” 발성하지는 않았지만, 음흉한 흐흐흐소리를
[아줌마, 극장가다] 미성년 권하는 사회라니까, <춘향뎐>
-
할리우드는 그들 나름대로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있고, 우리 관객 역시 그들의 영화를 보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틀에 고정돼어 있고 종종은 틀만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인디아나 존스>를 보자. 이 영화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과 키플링식 제국주의가 결합된 작품으로 이 영화를 비평하기 위해 그렇게 머리를 쓸 필요는 없다. 눈에 빤히 보이니까. 할리우드 사람들은 그들 습관대로 영화를 만든 셈이고, 우리는 우리 습관대로 받아친 셈이다. 중학생도 짤 수 있는 간단한 알고리듬(연산법) 안에 영화를 넣기만 하면 이와 비슷한 비평들은 동전처럼 좌르르 쏟아진다. <인디아나 존스>는 단순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런 습관이 쉽게 먹힌다. 습관대로 받아쳤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다. 그 습관은 비교적 정확하게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를 읽어낸다. 하지만 아무리 할리우드라고 해도 그것보다 복잡한 영화들은 있을 것이다.
영웅적 미국인,
내속엔 내가 너무도 뻔해. 당신이 쉴곳 없네, <쓰리킹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