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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오는 옷장 때문일까. <나니아 연대기>를 읽기 훨씬 전부터 옷장 속에 숨으면 안전한 기분이 들곤 했다. 이후 많은 동화들에서 옷장은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이 겨울 나라 나니아로 향하는 문이었고, 다시 옷장으로 나오면 모험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것과 달리 <자개장의 용도>의 자개장은 좀더 복잡한 사용법을 가진다. 증조할머니에서 할머니로, 다시 할머니에서 엄마에게로 계승되었던 이 자개장에는 원하는 곳으로 시간을 단축해 데려다주는 기능이 있지만,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주는 기능은 없다. 그러니까 이 자개장을 통해 전세계 어디든 갈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아프리카의 벌판에도 갈 수 있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다면 정석의 방식대로 비행기를 타고 걷고 버스를 타고 긴 시간을 들여 돌아와야만 한다. 그러니 어디든 갈 수 있다고 그냥 떠났다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 자개장의 용도를 알고 있는 가족들은 이 놀라운 옷장을 소소하게 이용한다. 아빠는 월요일에 늦잠을 잔 후 출근을 쉽고 빠르게 하기 위해 자개장을 이용하고 나와 동생은 학교까지 자개장을 이용해 편하게 이동한다.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자개장을 빌려온다. 나는 자개장을 이용해 티켓을 끊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온갖 장소들로 간다. 이를테면 클럽, 놀이공원 같은 곳. 돌아오는 것은 제힘으로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자개장의 용도>의 자개장은 다른 옷장들과는 다른 역할을 한다. 자개장은 사람을 떠나게 하기보다는 현실에 붙들어놓는 사물인 셈이다. 너무 멀리 떠나면 돌아오기 어려워지니 현실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감당할 수 있는 곳까지만 떠나야 한다. 마술적인 매력, 비현실적인 요소가 현실로 침투하지만 내가 속한 세계를 흩트려놓기보다는 그것을 제대로 직시하도록 돕는 함윤이 소설다운 마술봉 사용 방식이다. 소설집에는 7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자개장을 비롯해 거울, 적산가옥, 돌, 물 등 장소나 사물들에는 신기 같은 것이 실려 있어 소설 속에서 신물의 역할을 하고, 주인공들은 그로 인해 비현실적인 사건에 휘말리거나 누구도 믿지 못할 환영을 본다. 아니, 환영이나 꿈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겪는 진짜임에도 기이하다고밖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다. 장소와 상황, 사물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문장은 감각적이고 강렬하다. 문장 자체가 주는 불가사의하고 비범한 마력 때문에 자꾸 폈다 접었다를 하게 만드는 소설집이다.

나는 너를 보살피고 싶어. 그리고 보호하고 싶어. 그는 여러 차례 말을 더듬고 번복한 뒤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선우야, 필요하면 불러. 내가 갈게.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