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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신 없는 영화의 성서 - 벨러 터르의 영화에 다가가는 네 가지 통로

벨러 터르는 영화로 질문했다. 어떻게 견딜 것인가? 세계의 점진적 쇠퇴를 응시하는 그의 카메라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고 세계는 냉혹하다. 터르의 영화는 헝가리가 소비에트연방의 억압적 체제 아래 놓여 있던 시대적 공기에서 최초의 동력을 얻었다. 국가정체성의 상실과 파시즘의 위협이라는 구체적인 정치적 맥락이 그가 사회주의리얼리즘을 구사하는 첫 번째 렌즈였다. 이후 벨러 터르의 영화는 멈춘 적이 없다.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후 혁명의 열기가 사라진 자리에서, 벨러 터르는 지워지지 않는 허무와 정체감을 인식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실존적 한계를 더욱 파고들면서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형이상학적 묵시록들을 만들어냈다. 지난 1월6일 세상을 떠난 이 헝가리의 거장을 슬로 시네마라는 모호한 범주에 가두지 않고, 그가 의식적으로 변주해나간 영화적 실천을 살펴본다.

필름이 허락하는 롱테이크

<토리노의 말>

<토리노의 말>은 검은 화면에서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레이션과 함께다. 1889년 1월3일, 니체는 투린 거리를 걷다가 주인에게 호되게 맞는 말을 목격하고 자신의 몸을 던진다. 격렬히 흐느껴 울던 그의 정신은 붕괴했고 이후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내레이터는 이 독백을 말의 시점으로 돌려 질문한다. 이후 펼쳐지는 것은 종말까지 단 6일이 남은 세계. 농부가 이끄는 한 마리 말이 바람을 뚫고 고되게 나아가는 긴 행로를 카메라가 따라간다. 영화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 틀림없는, 벨러 터르의 마지막 전언이 담긴 롱테이크다.

터르 영화의 핵심은 필름 촬영의 한계 내에서 극단까지 밀어붙인 롱테이크다. 터르의 현장에서 수십년간 교류한 헝가리 영화학자 안드라스 발린트 코바치는 이를 평균 숏 길이(ASL)라는 수치를 통해 정밀하게 분석했다. 영화 한편을 구성하는 모든 숏의 길이를 합산해 나누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ASL은 보통 3~6초. 흔히 롱테이크로 알려진 거장들도 평균을 내면 예상보다 낮은 수치가 나온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약 15~20초,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약 40~60초다. <패밀리 네스트>(1977)에서 10초 미만이었던 ASL은 <가을 연감>(1984)에서 31초로 늘어났고, <사탄탱고>(1994)를 거쳐 <토리노의 말>(2011)에 이르러서는 약 300초(5분)라는 경이로운 수치에 도달한다. 통상적인 필름 한롤이 11분 내외의 분량을 담는다고 할 때 평균 5분의 숏 길이는 터르의 미학이 35mm 아날로그 필름이 허용하는 물리적 임계점과의 사투였음을 짐작게 한다. 이를 현장의 논리로 바꾸면, 터르는 단 한 테이크를 위해 수십번의 리허설을 반복하며 스크린 안팎에서 협업하는 존재들이 자신의 몸에 시간을 각인하도록 하는 수행의 장을 만들었다. 포커싱을 정교하게 유지하고 트랙을 따라 카메라를 미는 ‘기계적 인내’의 풍경은, 터르의 롱테이크가 관조적 산물이 아닌 매체의 한계와 싸워 얻어낸 육체적 노동의 결과임을 웅변한다.

회색조의 기상학

<사탄탱고>

터르는 9편의 장편 중 단 2편만 컬러로 제작했다. <파멸>(1988) 이후 모든 작품은 흑백이다. 터르가 세분화한 회색조는 세계의 점진적 쇠퇴를 그리는 작가에게 필연적 양식이다. 터르는 2007년 이렇게 말했다. “세계의 종말에 관한 영화를 한편 더 만들고 나서, 영화 만들기를 그만두겠다.” 이 선언은 <토리노의 말>로 실현되었다. <토리노의 말>은 노인 올슈도퍼와 딸이 6일간 감자를 삶아 먹고, 말에게 물을 먹이고, 부츠를 벗는 일과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그사이 우물이 마르고 램프는 꺼지고 말은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이 시간을 터르는 “신 없는 성서 같은 영화”라고도 표현했다. 구원도 심판도 없는 터르의 묵시록에서 흑백의 세계는 더 이상 특정 시기와 장소에 한정된 무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편재하는 실존의 황무지가 된다. 앞서 <파멸>에서는 쇠락한 탄광촌 사람들의 절망을 조각하면서 헝가리 전역의 골목, 건물 등을 재조합해 가상의 배경을 만든 바 있다. 이때 흑백은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의 통일된 시각적 텍스처로 녹이는 기능을 했다.

벨러 터르의 흑백 화면 속 몰아치는 비와 바람, 분진과 진흙은 인물의 전진을 가로막는 세계의 압력으로 다가온다. <토리노의 말>에서 바람 소리는 146분 내내 귓가를 떠돌며 우리 자신도 황량한 외딴집 인근에서 먼지폭풍을 맞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터르는 항공기 엔진을 개조한 강풍기를 동원해 배우들이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인공 바람과 먼지를 생성해 신체적 고통을 실재화했다. 거부할 수 없는 엔트로피의 시각화인 것이다. 날씨는 터르가 중시한 사운드를 통해서도 극대화되었다. 대사를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 바람, 발자국, 시계추 소리 같은 환경음을 과장되게 증폭시켰다. 종말론적 환경이 피부로 느껴지게 만드는 화면의 밀도는 정치적, 실존적 논평을 초월해 영혼에 새겨진다.

즉흥과 수평의 협업

벨러 터르의 작업 방식은 다소 독특한 협업에 기반한다. 먼저 오랜 시간 함께한 작곡가 미하이 비그가 촬영 한달 전쯤 음악을 써서 감독에게 건넨다. 이렇게 완성된 음악은 현장에서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재생된다. 때로 촬영감독은 그 음악의 박자에 맞춰 카메라를 움직인다. 인물의 심리나 서사를 넘어서는 카메라만의 순수한 리듬이 제작 초기에 우선하는 것이다. 터르 자신의 작업 루틴도 마찬가지다. 시놉시스만을 결정한 뒤 배우와 장소를 선택하고 이후 비로소 대본을 쓴다. 순환하는 그의 영화처럼 다시 롱테이크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런 작업 방식은 롱테이크가 만드는 연쇄적인 작업 과정상 필수적이다. 모든 정확한 시나리오- 안무와 속도- 는 현장에서 결정된다. 벨러 터르는 세트를 여러 각도에서 매우 자세히 촬영해둔 사진들을 프리프로덕션의 가장 중요한 재료로 여긴다. <토리노의 말>을 기준으로 한편의 영화를 약 30개 숏으로 완성한다고 할 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 보이는 것은 편집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벨러 터르는 1981년부터 그의 영화를 편집한 아그네시 흐러니츠키를 크레딧에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릴 정도로 존중했다. 흐러니츠키는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로 모든 것을 지켜보며 장면의 리듬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폐쇄회로 속의 혼돈을 그리다

<불안한 관계>

벨러 터르의 초기작인 <불안한 관계>(1982)는 형이상학적 스타일을 선보이기 이전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준다. 헝가리 공산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지독하게 현실적인 질식감을 다룬다. 이 영화는 남편이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마지막은 재결합한 부부가 함께 세탁기를 사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스스로 해체한 이후에 이 순환은 더욱 정교해진다. 12챕터로 이뤄진 <사탄탱고>는 집단농장이 해체된 헝가리 농촌에 죽은 것으로 여겨졌던 인물이 돌아와 주민들을 새 공동체로 유혹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실 경찰 정보원인 그는 주민들의 보상금을 가로채 사라진다. 영화는 탱고처럼 여섯 걸음 앞으로, 또 여섯 걸음 뒤로 움직이며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에서 반복한다.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같은 공간을 맴돌고 의사가 판자로 창문을 막는 마지막 이미지는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함정을 시인하는 것만 같다. 마찬가지로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2000)는 어느 마을에 거대한 고래의 사체를 들고 나타난 서커스단이 도착함과 동시에 점차 광기가 소용돌이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을 광장의 고래 사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자리에서 서서히 썩어간다. 6일간의 지난한 일상을 담은 <토리노의 말> 역시 끊임없이 걷고 달리는 존재들이 같은 공간에 도착하도록 만든다. 느림의 미학은 이 부조리로부터의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적 선고일까, 아니면 그 속에서도 희망의 시간을 낳기 위함일까? 해석 대상으로서의 서사는 소멸하고 오직 인간의 ‘견딤’이 진실로 남는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