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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물과 환경간의 관계는 어떻게 바뀌어왔나 - 자크 랑시에르, 브뤼노 라투르, 데보라 다노스키… 학자들이 본 벨러 터르

<사탄탱고>

오디오비주얼 크리틱으로 잘 알려진 케빈 B. 리가 <사탄탱고>의 핸드헬드 카메라 촬영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2013년 제작한 6분가량의 흑백 비디오는 시카고 거리를 걸으며 이 영화의 탁월함을 설명하는 조너선 로젠봄을 따라간다. 이 비디오에서 로젠봄은 <사탄탱고>를 매 순간 자유로이 부유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영화, 플롯보다는 세계에 대한 비전, 장소, 시선을 포함한 실험영화로 규정하면서도 이 영화가 사회주의의 감시와 관료제에 대한 벨러 터르의 입장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로젠봄에 따르면 이 비디오의 상영을 포함해 자신이 <사탄탱고>상영 전 소개를 진행한 다음날 함께한 식사에서 터르는 이 영화의 디자인이 정치적이지 않으며 형이상학적이라고 정중하고도 분명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터르의 필모그래피에 적용되어온 두 가지 범주, 즉 다큐멘터리적 접근에 근거한 사회적인 초기 영화와 형식적, 형이상학적 경향의 후기 영화라는 구분이 이분법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모던 시네마의 전문가인 안드라스 발린트 코바치의 포괄적이고도 꼼꼼한 연구서 <벨러 터르의 영화>를 비롯한 여러 작가론적 글이 터르의 영화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작업한 첫 번째 영화인 <파멸>(1988)을 기점으로 두 시기로 구분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형이상학적’이라는 터르의 규정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미클로시 얀초와 공명하고 이들의 영향력을 창조적으로 개조하여 정립한 터르 특유의 롱테이크는 두 번째 시기의 영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변주되고 진화했다. 인물의 위상, 보다 정확하게는 인물과 환경간의 관계 또한 이와 같은 구분을 뒷받침한다. <패밀리 네스트>(1977), <아웃사이더>(1981), <불안한 관계>(1982)에서 인물들이 환경과 일관적으로 존재하면서 행동하고 말한다면, 과도기적인 <가을 연감>(1984)을 거친 <파멸> 이후의 영화에서 인물은 환경에서 이탈하고 환경을 배회하거나 응시한다.

이와 같은 시기적 구분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이어질 작가주의적 연구의 몫이겠지만, 형이상학적이라는 터르의 규정은 영화학뿐 아니라 그 바깥의 학자들이 그의 영화를 논의했던 이유와 공명하기 때문에 주목을 요한다. 자크 랑시에르, 브뤼노 라투르, 그리고 인류학자 데보라 다노스키와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이 바로 그들이다.

‘ 이후의 시간’을 위한 시스템

<불안한 관계>

<영화 우화> <영화의 간격> 등 영화사와 개별 감독 모두를 아우르며 영화와 인접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피력한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2011년 <터르, 이후의 시간>(영문판 2013년)을 발간했다. 로젠봄이 전한 터르에 관한 일화에 호응하듯 랑시에르는 터르의 영화가 항상 동일한 것이고 동일한 현실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터르의 문제는 환영의 종언,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종말이 아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드는 문제 또한 아니다. 이미지의 아름다움은 결코 목적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표현하기를 원하는 현실에의 충실함, 그리고 이 과정에서 채택하는 수단에의 충실함을 위한 보상이다.”

그렇다면 그 현실이란 무엇인가? 이야기의 층위에서 보자면 터르의 영화가 재현하는 현실은 동일하지 않다. <패밀리 네스트>와 <불안한 관계>에는 커플 또는 부부의 관계마저 경화시키는 사회주의 헝가리의 경직된 시스템이 있고, <사탄탱고>와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에는 쇠락하는 작은 마을이 있고,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는 안개 자욱한 부두가 있고, <토리노의 말>에 의하면 시대적 지표마저도 사라진 듯한 극단적 황량함의 세계가 있다. 사회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을 포괄하는 픽션의 환경이 수렴하는 현실은 랑시에르의 표현을 따르자면 ‘살아가는 시간’(lived time/temps vécu)이라 할 수 있 다. 살아가는 시간은 플롯의 선형적, 인과적 전개로 제시되는 시간의 기저에 놓인 시간, 인물들에게 주어진 특정 상황의 시간이다. 그 상황 속에서 인물들은 바라보고 걷고 먹고 마시며, 때로는 노래와 춤에 빠져든다. 핸드헬드든 고도로 조형적인 롱테이크든 터르의 카메라는 살아가는 시간을 견디는 신체와 공간의 관계를 구축하고, 그 관계 속에서 말과 침묵과 다른 소리들을 증폭하며, 그 시간을 채우는 대기와 바람과 비와 어둠의 분위기를 농축한다. <영화 우 화>에서 영화의 기술적, 미학적 고유성에 대한 통념에 문제를 제기한 랑시에르조차도 터르가 살아가는 시간을 담아내는 방식은 영화가 “감각적인 것의 예술”이자 “이미지와 음향의 시간예술”임을, “말하기의 행위를 통해 다른 신체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신체들을 보여주는 예술”임을 일깨운다.

살아가는 시간은 랑시에르가 이후의 시간(time after/temps après)이라 부르는 또 다른 심원한 시간을 개방한다. 이후의 시간은 “이성이 회복된 시간도, 예상된 대재앙이 닥친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의 시간, 즉 이러한 이야기들이 계획된 목적과 달성된 목적 사이의 지름길을 내며 지나간 그 감각적인 것들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게 되는 시간이다”. 터르의 영화에서 이후의 시간은 곧 반복되고 회귀하는 물질적 사건의 시간으로, 인물들은 그 시간 속에서 부유하거나 제자리로 돌아온다(그의 후기 영화가 취하는 수미쌍관 구조, 그리고 <사탄탱고>에서 길을 걷지만 전진하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인물들 등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관찰하거나 행동하는 인물을 선회하다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터르의 카메라(<파국>의 오프닝숏이 드러내듯, 그의 카메라는 특정 방향의 인물 또는 사건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그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되풀이되는 것과 미지의 것 모두에 대한 기대를 조율하면서, 관객의 기다림이 이후의 시간과 만나는 연속체를 구축한다.

지구에 묶인 자들: 인간 이후의 세계와 <토리노의 말>

<토리노의 말>

21세기 들어 터르의 작품들은 동유럽 예술영화의 정치적, 문화적 맥락을 넘어 영화비평 및 영화학에서 더욱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슬로 시네마’라는 잘 알려졌지만 모호하고 유동적인 비평적 용어 외에도 영화를 비인간 세계 및 그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투영하는 창으로 간주하는 생태영화(ecocinema) 개념이 터르의 후기 영화에 적용되어왔다. 이 과정에서 <파멸>의 개, <사탄탱고>의 올빼미와 소와 같은 동물이 상징적 의미를 넘어 인간의 길들임을 넘어선 자율적인 행위성의 존재로 부각되었다. 랑시에르는 이 동물들이 인간 세계의 함몰 또는 파국을 넘어 인간 경험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말하는 ‘이후의 시간’이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파국 또는 교착상태에 대한 동시대의 인식과 공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인식을 공유한 학자들은 터르의 마지막 작품인 <토리노의 말>에 특히 주목했다. 실험실과 장치, 사회적 제도를 포함한 과학적 지식의 매개와 구성 과정, 존재의 인류학, 기후 위기에 대한 성찰을 포함한 거대한 다학제적 탐구를 수행한 브뤼노 라투르는 근대인과는 구별되는 인간 존재의 상태를 어스바운드(Earthbound)라 부른다. 여기서 ‘bound’는 ‘어딘가로 향한다’라는 목적지와 무언가에 ‘구속된’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뜻하며, 이같은 의미를 적용하면 ‘어스바운드’는 지구 내에서 특정 목적지로 향하는 동시에 지구에서 탈출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지구는 근대성이 문화와 대립적인 동시에 문화가 식민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설정한 자연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지구는 기후 위기와 통제 및 예측을 벗어난 자연재해가 시사하듯, 근대성이 구축한 세계에 복수를 가하는 자연의 원소적 힘으로 충만한 영토다.

2013년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열린 기퍼드 강연에서 라투르는 <토리노의 말>의 아버지와 딸을 어스바운드의 사례로 인용했다. 강의 말미의 간략한 언급이기에 영화학에서 기대할 수 있는 미학적, 형식적 분석을 여기에서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언급은 아버지와 딸이 인간의 길들임을 벗어난 말, 감자만이 자랄 수 있는 척박한 땅, 휘몰아치는 바람 등 인간 본위의 자연이 제거된 순수한 지질학적, 생물학적 힘의 영토를 견디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부녀는) 기회의 땅, 큰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찬 다른 땅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우리는 그들이 지치고 낙담한 채, 족쇄에 묶여 옛날보다 더 비참한 삶을 되풀이하며 결국 어둠이 그들을 수의로 감싸안을 때까지 돌아오는 모습을 공포에 질려 지켜본다.” 인류학자인 데보라 다노스키와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토리노의 말>에 대한 라투르의 간략한 언급을 확장한다. 이들은 이 작품을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2011)처럼 세계의 종말을 형상화한 영화로 분류하면서, 부녀의 환경에 갑작스레 침투해 행패를 부리는 집시들을 “근대인과의 전쟁을 이끌 수 있는” 소수집단으로 해석한다. 유럽 문화에서 천대받은 집시의 오랜 내력을 고려하면, 인류학적 관점에서 이 집단은 서구 중심주의에 도전하는 비서구 토착민으로 읽힐 수 있다.

라투르, 그리고 다노스키와 지 카스트루의 <토리노의 말>에 대한 관심은 터르의 2011년의 인터뷰를 떠올리게 한다. “대재앙은 커다란 사건이지만 현실은 그와 같지 않다. 내 영화에서 세계의 종말은 매우 조용하고 매우 약하다. 따라서 세계의 종말은 내가 현실에서 보는 것처럼 조용하고도 느리게 온다… 가장 끔찍한 것은 죽음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터르의 언급을 단순한 비관주의로만 읽을 수는 없다. 물질적 사건이 발생하는 살아가는 시간의 감각을 응축한 터르의 영화는 세계의 종말을 재난영화의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 근대적 인간과 세계관의 이전과 이후 모두를 사유할 수 있는 계기, 일종의 관점으로 제시한다. 인물들의 시점으로 환원되지 않는 터르의 카메라는 숨김과 드러냄을 조율하며 허구의 세계를 관객이 점유한 세계 속으로 밀어넣고, 관객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교란하며 갱신한다. 따라서 터르가 말하는 세계의 종말은 세계를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특정한 방식의 한계, 즉 인과적이고 선형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방식의 한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

벗어나거나 나아갈 수 없는 세계를 반복하고 변주하며 그와 같은 한계에 도전했던 터르는 영화화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토리노의 말>과 함께 자연 및 인간에 대한 가장 본원적인 질문을 남겼다. 터르 자신의 형이상학적이라는 규정과 호응하는 이 질문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영화적 자연과 영화적 인물이 소거된 세계에서 영화적 시간이 무엇이고 감각과 신체, 사물과 환경을 어떻게 조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또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