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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느린 세계의 동맹 - 벨러 터르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오래된 협업

2026년 1월6일, 벨러 터르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뒤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소셜미디어 프로필 사진을 일주일간 검은색으로 바꿨다. 그는 생일 바로 다음날, 오랜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며칠 뒤 헝가리의 정치·문학 잡지 <엘레트 에스 이로달롬>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벨러 터르의 죽음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거대한 손실이다. 나는 아주 가까운 친구이자 어두운 영화관 스크린 위에서 시각적 마법을 함께 만들어온 동료를 잃었다. 더 나아가 벨러가 만들어낸 만큼의 빛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영화관 하나도 잃었다. 그 영화관은 이제 나에게, 우리에게 텅 빈 공간으로 남았다.’ 타계 직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뉴욕타임스>에 보낸 글은 한층 격앙돼 있다. ‘급진적인 창조자를 잃은 예술계는 한동안 끔찍하게 지루해질 것이다. 다음 반항아는 누가 될까? 누가 나설까? 누가 모든 것을 뒤흔들까?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벨라, 돌아와줘.’

벨러 터르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파멸><사탄탱고><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런던에서 온 사나이><토리노의 말>,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마지막 배>까지 총 여섯편의 영화를 함께했다. 이중 <마지막 배><사탄 탱고><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 작업에서 두 사람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의견을 공유했지만 벨러 터르는 연출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각본을 맡는 분업을 지켰다. 두 사람의 인연은 벨러 터르의 용기에서 시작됐다. 터르는 1985년, 다독가인 대학교수 친구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사탄탱고>라는 소설인데, 정말 아름다우니까 꼭 읽어봐야 해.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라는 신인 작가의 첫 작품이야.” 책장을 펼친 벨러 터르는 곧 친구와 같은 마음이 됐고, 사랑에 빠진 나머지 작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만남을 청했다. 2012년 링컨센터 영화협회가 주관한 회고전을 앞두고 진행한 영화잡지 <필름 코멘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부터 대화는 완전히 순조로웠고, 우리는 바로 친구가 됐다.”

협업의 시작 <파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 Nobel Prize Outreach. Photo: Anna Svanberg

<파멸>은 두 사람의 오랜 협업의 출발점이다. 사실 이들은 <사탄탱고>를 먼저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당시 벨러 터르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헝가리 정치권은 내 전작 <가을 연감>이 퇴폐적이고 추악하다며 비난했다. 그 때문에 나는 정말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있었다.”(<필름 코멘트>)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쇠락해가는 광산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규모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카바레 가수를 짝사랑하는 불운한 외톨이를 주인공으로 한 시나리오를 들고 헝가리 영화연구소와 헝가리 영화자료원을 찾았다. 여기서 받은 아주 적은 제작비로 <파멸>을 완성했고 터르는 “국가검열에서 그나마 자유로웠던 작품”이라고 자조 했다.

원작의 확장 <사탄탱고>

<파멸>

우여곡절 끝에 <사탄탱고>의 제작이 결정됐을 때, 두 사람은 통상적인 의미의 각색을 하지 않았다. 벨러 터르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작가가 책을 쓰는 동안 보고 고민했던 것들을 탐구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역시 소설은 하나의 영감일 뿐 감독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야기를 새로 고민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이 얘길 꺼낸 2012년 <사탄탱고>의 미국 출간 기념 행사에서 협업의 원칙을 슬며시 풀었다. “시나리오에는 독백이 두배나 길어서 촬영할 땐 아예 빼는 게 낫겠다고 의견을 낸 적이 있다. 감독은 줄인 버전을 택했다. 그게 전부였다.” 연출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태도는 벨러 터르를 향한 신뢰에서 비롯됐다. “벨러는 내가 영화 만드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철학자처럼 대했다. 그는 언제나 나를 존경하며 변호해준다. 나 역시 그랬고, 그게 우리 우정의 본질이다.”

우연의 전환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파멸>

두 사람은 이 영화의 원작인 <저항의 멜랑콜리>를 영화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베를린에서 배우 라르스 루돌프를 우연히 만난 일이 전환점이 됐다. “루돌프를 보는 순간 나와 라슬로는 그가 소설 속 주인공 야노스 같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그의 개성에 매료됐고, 헤어질 무렵에는 라르스가 야노스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브라이트 라이츠 필름 저널>) 두 사람은 곧바로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단 하나의 질문 <토리노의 말>

<저항의 멜랑콜리> <사탄탱고>(왼쪽부터).

한살 차이의 친구는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그 말은 어떻게 됐을까?” 여기서 ‘그 말’은 1889년 니체의 정신적 붕괴를 촉발한 바로 그 말이다. 과거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한 강연 말미에 니체의 일화를 언급하며 말의 향방을 관객에게 물었고, 그 질문은 같은 공간에 있던 벨러 터르의 가슴에 깊이 꽂혔다. 훗날 벨러 터르는 편집감독이자 평생의 협업자인 아내 아그네 흐러니츠키와 낡은 집을 샀다. 그 집에는 말을 위한 공간이 있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구상을 시작했다. “만약 여기서 무언가를 찍는다면 우선 말이 하나 있고, 남자가 있다면 그에겐 딸도 하나 있을 것이다. 이 정도가 아이디어의 전부였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불러 짧은 시놉시스를 써내려갔다.”(<사이트 앤드 사운드>)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사탄탱고>가 제작에 들어가며 서랍 속에 들어간다. 다시 빛을 보게 된 건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런던에서 온 사나이>가 촬영을 며칠 앞두고 제작자 움베르코 발산의 자살로 중단되고 만 것이다. 깊은 우울감 속에서 영화계를 떠날 생각까지 했던 벨러 터르에게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찾아와 말했다. “네가 집착하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봐. 그게 좋은 치료가 될 거야.” 순간 터르에게 “그 말은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이 스쳤고, 그 질문을 담아 마지막 작품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둘은 아버지와 딸은 어떤 관계일지, 이웃은 어떤 사람들일지, 누가 그 집에 찾아올지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심지어 우리는 다투기도 했다. 라슬로가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으나 이틀 뒤, 그가 원고를 보내왔다. 60매쯤이었는데, 그건 시나리오라기보다는 짧은 소설, 하나의 문학작품이었다.”(<사이트 앤드 사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