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러 터르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단호한 대답 한마디가 대화 내내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오”(No). 당신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그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터르는 분석적이고 언어적인 규정을 부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자꾸만 벗어나려 한다. 부정과 탈출. 이는 비평적 진술을 대하는 벨러 터르 특유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에 감도는 긴밀한 자의식이자 시청각적 전술이기도 하다. 벨러 터르의 인물들은 갇혀 있다. 초기작의 신경질적이고 답답한 프레임 안에서든, 후기작에서의 긴 지속 시간으로 채워진 롱테이크에서든, 그의 영화의 주된 배경인 집과 탄광촌과 마을공동체 안에서든, 그의 마지막 장편영화로 남겨진 <토리노의 말>에서 6일간의 여정으로 제시되는 종말론적 시간 안에서든 그들은 폐쇄성의 운명에 처해 있다. 하지만 터르의 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고집스러운 추진력 또한 바로 이 조건에서 나온다. ‘아니오.’ 그들은 주어진 세계의 테두리에 갇혀 있지만, 그 세계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중이며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는 출구가 있는 것처럼 뒤틀리고 있다. 터르가 묘사하는 인간들은 비참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조하게 말하고 묵묵히 움직이고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던진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부정의 시간
적잖은 비평가와 연구자들은 벨러 터르의 필모그래피를 손쉬운 이분법으로 분류한다. 장편 데뷔작인 <패밀리 네스트>는 조선소에서 일하며 아마추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터르가 비전문 배우들과 협업하며 터무니없이 적은 예산으로 5일 만에 완성한 영화다. <불안한 관계><아웃사이더>로 이어지는 터르의 초기 작업은 이처럼 다큐멘터리, 노동자, 사회주의리얼리즘이라는 문맥으로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용으로 제작된 <맥베스>와 <가을 연감>을 분기점으로 전환되는 후기 작업에서는 벨러 터르 특유의 우주적이고 우화적인 세계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롱테이크와 숏의 질감이 자아내는 압도적인 체험이 담겨 있다.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사회적 현실을 포착하던 다큐멘터리가 광활한 우주적 우화로 이행한 것일까? 혹은 사회주의국가의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단면을 포착하던 시선이 어떻게 인간의 근본적인 무력감과 고통을 체험하는 형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스타일과 주제의식의 변화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벨러 터르 스스로가 말하듯 그의 영화는 명확한 전환이 아니라 점진적인 진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아니다”라는 말에 담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부정의 시간이다.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의 첫 협업이자 터르의 본격적인 후기 작업으로 여겨지는 <파멸>의 도입부 롱테이크는 그가 집요하게 파고들게 될 세계의 원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황폐한 회색빛 평야를 배경으로 리프트에 매달려 운반되는 석탄통의 행렬이 보인다. 기계적으로 석탄을 운반하는 무인(無人)의 풍경으로부터 카메라가 느리게 빠져나오면 어느 집의 창문이 드러나고 실내 공간에서 바깥을 바라보던 한 인간의 뒷모습이 뒤늦게 나온다. 터르의 시선은 이 세계를 관통한다. 폐허가 되어가는 바깥에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흙먼지가 날리고 있다. 그 세계의 붕괴는 창문과 문을 넘어서 실내 공간으로 침투해 단단한 벽에 깃들고 인간의 내면으로 잠입한다. 창밖의 물리적인 풍경은 실내 공간의 내면적인 세계와 결합한다. 터르의 영화는 이 기계적이고 무차별적인 현상의 집행이자 이 세계의 원리 안에 불가피하게 속해 있는 존재들이 체험하는 비극이다. 터르는 이토록 비극적인 자신의 후기작이 코미디라고 말한다. <토리노의 말>에서 집 밖으로 떠나던 부녀가 되돌아오는 것처럼 터르의 카메라가 비추는 세계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터르가 다루는 인간은 계속해서 경계 위에 선다. 팽창하는 우주와 고립된 인간, 비극이자 코미디인 것, 물리적으로 관측된 세계와 내면적으로 상상한 세계, 운명적인 질서의 무게와 그에 짓눌리면서도 삶을 지속하는 인간들, 그리고 카메라가 비추는 바깥과 내부.
터르의 필름에 새겨진 역설과 복합성이 빚어낸 정점이 바로 <파멸>이후에 완성된 <사탄탱고>일 것이다. 7시간이 넘는 이 거대하고 최면적인 영화는 파국으로 향하는 집단농장 구성원들의 배신과 고통을 12개로 나뉘는 중첩된 시간 위에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토록 장엄한 우주를 구축한 영화 아래서 터르가 오랫동안 포착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순간이다. 벨러 터르는 거대한 서사의 세계 아래서 서사가 파괴된 현실의 단면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비 내리고 바람 부는 거리를 걷고,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고 그것도 아니라면 막연히 기다린 뒤에 마침내 춤을 춘다. 창문 너머로 어른들의 세계를 지켜보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삶이란 바로 이 운명에 기입되는 것을 뜻한다. 휘몰아치는 바람, 쏟아지는 비와 폭풍, 흑백 화면의 깊은 어둠은 모든 질서로부터 물러나 총체적인 세계의 묘사 불가능성을 내비치는 물리적인 장치로 필름 겉면에 드리워진다.
이미지의 존엄성
<센시스 오브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터르는 “모든 것은 우리보다 크다.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작은 일부분이다”라고 선언적으로 말한 바 있다. 벨러 터르의 영화엔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거대한 우주와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이 존재하고 역설적이게도 때로는 인간의 무의미한 몸짓이 우주의 질서보다 크게 스크린에 박힌다. 그의 마지막 장편영화로 남은 <토리노의 말>은 이 역설을 선명하게 증언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벨러 터르 자신의 선언마저도 배반하는 마지막 “아니오”의 실천이다. 도입부의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카메라는 마부를 태우고 어딘가로 움직이는 말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들이 집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중단될 것이다. 말의 움직임이 멈춰지고 마부와 딸의 노동이 멈추고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가 멈춘다. <토리노의 말>은 압도적인 움직임으로 시작해 모든 것의 정지로 끝난다. 그리고 말의 움직임으로 시작한 영화적 이미지의 시간이 이 한편의 영화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중단된다. 벨러 터르는 가장 작은 일부분의 실천으로 영화사 전체의 우주를 움직이던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연출을 은퇴한 뒤에 설립한 영화학교 ‘필름 팩토리’의 취지문에서 이미지의 존엄성(dignity)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가 자신의 영화를 말할 때도 이따금 사용하던 단어다. 영화작업은 존엄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엄성이란 언제나 세계와 맞물려 있다. 터르의 영화는 세계가 중단될 때까지 카메라의 시선을 중단하지 않는, 고독하고도 광대한 우주의 결론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지금 중단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