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영화 같았던 한해.” 포맷을 막론하고 2025년에 가장 인상적으로 본 작품을 알려달라는 질문에 한 영화 제작사 대표가 모 시사 팟캐스트를 꼽으며 남긴 코멘트다. 이런 응답은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다른 이름의 시사 팟캐스트, 방송사 뉴스 프로그램까지 거론하며 지난해를 대변하는 스토리를 시국에서 찾은 이들이 여럿 있었다. 비율로 따지면 적은 숫자일지 모르나 이러한 답변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새어나오는 기운은 다소 울적하다. 단순히 현실을 이기는 창작물이 부재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지금 영상 콘텐츠 업계가 체감하는 불황이 내란으로 말미암은 국가적 불안과 관계 맺고 있다고 편리하게 간추릴 생각도 없다. 단지 “몇년째 연초에 비관적인 예측만 하고, 그 이상으로 산업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자들이 “이제는 거의 ‘멸망전’에 가까운 추락이 보인다”고 자조하기까지, 그들 자신도 더 이상 영화를, 혹은 드라마를 감탄의 대상으로 추대할 의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게 쓰라리다. “비관, 추락, 생존 같은 키워드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총 51인의 투자·배급·제작사 및 매니지먼트사 리더들이 참여한 <씨네21> 2026년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망 설문 결과에 대한 풀이는 이 감각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체험의 가치를 신뢰하라
그럼에도 업계인들을 여전히 전년의 성공 사례를 복기하며 도약을 꿈꾼다. 첫줄에 언급한 질문에 따른 대답으로 제일 많은 표를 얻은 작품은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17표). 응답자 중 33%의 선택이다. 누군가에게 “힘든 시절 가장 뜨겁게 위로가 된 인생 드라마”로 등극한 이 작품은 “한국적 정서를 재밌게 풀어”낸 데다 “세대를 막론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완결성을 갖춘 16부작 시리즈가 제작될 수 있었던 까닭을 ‘넷플릭스’라는 뒷배경에서 읽어내는 이도 있었다. “지상파·케이블 방송사가 소화하기에는 부담스러웠을 서사와 스케일”을 지녔음에도 “‘좋은 이야기라면 길게 볼 이유가 있다’는 명제를 입증”한 예시로서 <폭싹 속았수다>를 바라본 것이다. “플랫폼이 완결성을 신뢰하고 투자할 때, 시리즈물의 힘이 살아난다.”2025년 가장 인상적인 콘텐츠 2위에 오른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시즌2 또한 넷플릭스에서 시청자를 만났다. 첫 시즌이 성행한 뒤 일부 출연자와 심사위원이 프로그램 외적인 사유로 도마 위에 올랐음에도 새 시즌은 연말 화제성을 독식했다. “방영 직후 캐치테이블, 네이버 지도와 연동된 출연 셰프의 식당 예약률이 급증하거나 편의점, 식품사와의 신속 협업과 대량 판매가 이어지는” 등 이 서바이벌프로그램은 “시청이 리테일로 연결되는 구매 전환형 포맷의 힘”까지 과시했다. 관람과 체험의 연동은 영화 <F1 더 무비>를 향한 지지에서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넷플릭스 시리즈인 <은중과 상연>과 함께 2025년 가장 인상적인 콘텐츠 3위로 호명된 작품이자 영화 중 최다 득표를 기록한 <F1 더 무비>는 모터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우리나라에서 521만명의 누적 관객을 불러 모으며 예상 밖 돌풍을 일으켰다. 관객이 “엔진의 소음과 진동을 온몸으로 체험”하게끔 유도하면서 특수관 매출 증대에도 기여한 이 영화는 “극장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준 작품”으로 소환되었다.
한국영화의 경우는 어떨까. 산업 리더 51인 가운데 2025년 가장 인상적으로 본 작품에 한국영화를 적은 이는 10명 남짓이었다. 그마저도 2표 이상을 획득한 것은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연상호 감독의 <얼굴>,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 세 편에 불과했다. 이 결과는 2026년 가장 주목하는 영화를 묻는 질문에 나홍진 감독의 <호프>가 33표를 받은 것과도 맞물린다.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가 그 뒤를 이었지만 <호프>와의 표차는 8배에 이른다. 박스오피스 회복과 신인 발굴이 모조리 더디게 이뤄지고 있으니 “한국 영화산업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상징이 되어가는” 대작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도 한 제작사 대표는 올해 “두 번째 장편을 발표하게 될 모든 여성감독들”의 신작을 눈여겨본다며 윤단비(<첫 세계>(가제)), 이옥섭(<너의 나라>(가제)), 김미조(<경주기행>) 감독에게 응원을 보탰다. 어쩌면 “한국영화 향후 몇년의 행보를 가늠”하게 도울 작품은 대작보다도 신인들의 중·저예산 차기작들이 아닐까.
살아남으려면 카멜레온처럼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전략이다. 설문에 응한 산업 리더 51인도 숏폼, AI, 공동제작으로 집약되는 영상 콘텐츠 제작 트렌드에 발맞춰 생존 전략을 다각도로 다듬는 중이다. 숏폼에 관한 제작자들의 흥미는 여전하고, AI는 이미 제작 전반에 활용되고 있으며, 국제 공동제작은 모두가 염두에 두는 선택지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에 집중해온 한 제작사 대표도 덧붙였다. “다시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만 가지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중·저예산영화, 숏폼 드라마, 예능, 다큐 중 어느 하나만 하겠다는 의지는 잠시 내려놓고 기회를 찾아야 한다. 현실을 직시해 다양한 플랫폼에 맞는 콘텐츠로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마음으로,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
한편에서는 유연함이 강조될수록 기본기를 충실히 한 업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며 지금이 “위기가 아닌 정리”의 시기라고 일축했다. “제작 편수는 줄어들 수 있지만 남은 작품의 밀도는 오히려 올라갈 것 같다”는 뜻에서다. “마케팅에 따른 콘텐츠의 화제성은 빠르게 소모되는 반면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것은 결국 이야기와 캐릭터의 완성도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데 공감한 제작자들이 다수다. “관성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어떤 것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하지 않을까.” 그 연장선상에서 “K콘텐츠를 향한 세계적 호기심”의 유통기한을 염려한 답변도 잇따랐다. “한때 세계가 홍콩 영화산업에 열광했다. 그곳의 시스템은 굳고, 소재는 닳고, 인재는 빠져나가며, 어느 순간 이름만 남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잘 팔리는 것만 만드는 나라’가 된다. 그건 산업의 승리가 아니라, 산업의 축소다. 그래서 2026년은 전환점이어야 한다.”
이는 시스템의 전환을 의미한다. “다양한 영화가 존재하고, 중간 규모의 성공이 쌓이면 새로운 감독과 배우가 자연스럽게 데뷔한다. 지금 한국은 그 완충장치가 약해졌다. 결과적으로 투자자는 더 안전한 선택에 갇히고, 관객은 더 빨리 흥미를 잃는다.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는 구조가 된다. ‘관객이 변했다’가 아니라 ‘시장이 관객을 포기했다’에 더 가깝다.” 그래서 복수의 관계자가 산업 자체의 체질 개선이 절실하다고, 정부 차원의 대책과 지원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작품의 성공이 아니라, 시스템이 달라졌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투자와 편성, 배급과 상영의 문턱이 낮아지고, 중간 규모의 작품이 숨 쉬며, 새로운 목소리가 데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도 돌아온다. 산업은 희망으로만 버텨지지 않는다.” 다만 그 길목에서 돌림노래처럼 불황을 부르짖기보다 긍정적 시그널을 발견해 달라는 당부도 <씨네21>에 도착했다. 다음 장부터 펼쳐질, 산업 리더들이 꼽은 2026년 기대작들의 목록과 트렌드 키워드들에 얽힌 진단에서 그 신호를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약하지만 선명한 등불이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