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부상에 맞서 영화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영화제 내내 기자회견에서 이 질문을 던진 독일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심사위원 빔 벤더스에 이어 초청작으로 영화제를 찾은 배우 에단 호크, 닐 패트릭 해리스, 채닝 테이텀 등이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윤리를 밝혀야만 하는 위치에 섰다. 가자,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미국의 권위주의적인 트럼프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사안은 분리되기도 하고 하나로 뭉쳐지기도 했다. 논란은 개막 첫날부터 시작됐다. 심사위원장 빔 벤더스는 2월12일 심사위원단 기자회견에서 독일 정부의 후원을 받는 베를리날레가 가자 전쟁에 취하는 입장을 질문받았고, “예술가는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면,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예술가는 정치의 반대추여야 한다. 어떤 영화도 정치인의 생각을 바꾼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대답했다.
현장은 경쟁부문 22편의 스크리닝을 아직 시작하기 이전인 심사위원장이 심사 형평성을 고려해 말을 아꼈다는 분위기였지만 예술가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는 듯한 벤더스의 발언은 포츠다머 바깥으로 즉시 퍼져나가 거대한 국제적 반박을 불러일으켰다. 부커상 수상 작가이자 <작은 것들의 신>의 저자인 아룬다티 로이는 38년 전 직접 각본을 쓰고 출연한 1989년작 <애니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나>의 4K 복원판으로 클래식 섹션을 찾아 영화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었으나 참석 철회를 선언했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태도는 실시간으로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대화를 차단하는 방식이다. 예술가와 작가, 영화인이 그것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이어 영화인들의 집단적 서명운동이 이어졌다. 틸다 스윈턴과 하비에르 바르뎀을 필두로 마이크 리, 루카스 돈트, 애덤 매케이, 미겔 고메스, 타티아나 마슬라니, 피터 멀란 등 총 81인(이후 최종 104인으로 확대)의 베를리날레 전현직 참가자들이 <버라이어티>를 통해 공개서한을 게재한 것이다. 서한은 베를리날레가 “팔레스타인인들에 맞서 계속되는 폭력에 공모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며 중립 유지를 고수하는 영화제를 의도적 침묵으로 간주하고 “반팔레스타인적 인종주의”로 규정했다. 서한은 특히 전년도 베를리날레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발언을 했던 영화인이 경찰 수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베를리날레가 이란과 우크라이나 문제에는 명확한 성명을 낸 반면 팔레스타인 문제에는 이중적 침묵을 지켜왔다고 비판했다.
영화 만들기는 정치의 반대가 아니며 둘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공식 석상에서 특정한 직함과 직책을 수행 중인 이들의 발언 의무는 까다로운 문제다. 올해 베를리날레는 그 틈새에서 격렬하게 진동했다. 결말은 독일영화 <옐로 레터스>가 황금곰상을 안는 풍경으로 향했다. 일케르 차탁 감독의 황금곰상 수상은 2004년 파티 아킨 감독의 <미치고 싶을 때>이후 22년 만에 독일 출신 감독이 베를린 정상에 오른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튀르키예계 이민자 2세가 독일이라는 나라를 거울 삼아 전체주의의 언어를 해부한 작품이 인정받은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은곰상(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인 에민 알페르 감독의 <구원> 역시 튀르키예영화다. 에르도안 정권의 권위주의 심화와 경제위기를 피해 튀르키예 청년들이 독일행을 택하는 새로운 이주의 물결이 가속화되는 와중에 튀르키예 이민자 2세인 일케르 차탁과 튀르키예 감독 에민 알페르가 베를리날레 최고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옐로 레터스>는 튀르키예 안카라 연극계의 유명 배우 데리야(외즈귀 나말)와 극작가 아지즈(탄수 비체르) 부부가 공연 초연 직후 국가권력의 표적이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데리야가 정부 고위 인사와의 기념 촬영을 거부하고, 아지즈가 대학 수업을 마치고 반정부 시위에 학생들을 이끄는 것이 빌미가 된 터다. 이후 두 사람에게 해고·소환·조사 통보에 활용되는 공문서 옐로 레터가 날아들면서 이들의 일상은 서서히 붕괴한다. 차탁은 정부가 국가에 비판적인 영화를 지원하지 않자 자금 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독일에서 영화를 촬영했지만 이 물리적 제약을 오히려 정치적 선언으로 전환한다. 베를린 거리에서 벌어지는 실제 시위 장면-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깃발이 뒤섞인- 이 극 중 튀르키예 반정부 시위로 편입되는 식이다. <옐로 레터스>는 그래서 지리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전체주의의 보편적 위험에 관한 영화가 된다. 차탁이 전작 <티처스 라운지>를 통해 학교라는 밀폐된 소우주 내 제도적 압력과 개인의 충돌을 정밀하게 해부했다면 <옐로 레터스>는 그 압력을 국가와 도시 전체로 확장한 영화다. 서부극의 문법을 떠올리게 하는 에민 알페르 감독의 <구원>은 2009년 튀르키예 마르딘에서 부족간의 오랜 토지 분쟁 중에 한 약혼식에서 일가족 및 하객 44명이 학살된 사건에 기반한다. 알페르는 이 원사건을 재현하는 대신, 학살이 일어나기까지의 공동체 내부 심리를 해부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튀르키예 산악지대의 외딴 마을을 무대로, 테러 위협 속에서 씨족의 땅을 지킨 하제란 씨족과 도시로 피신했다가 위협이 가라앉은 뒤 귀환하는 베자리 씨족 사이의 오랜 토지 분쟁이 주된 줄기다. 농토를 일군 자들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들 사이에서 정의는 주관적이고, 생존을 위한 구원이 곧 타인의 말살을 의미하는 역설로 향한다.
올해 두 배우상의 주인공들은 극명한 온도차로 관객을 휘감는 이들이다. <로즈>의 잔드라 휠러는 국내 개봉 후 한국 관객에게도 확실한 반향을 일으킬 만한 캐릭터와 연기를 보여준다. 마르쿠스 슐라인처 감독의 <로즈>는 17세기 독일, 30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버려진 프로테스탄트 농가에 상속 문서를 들고 나타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사실 남장을 한 여자로, 일찍이 습득한 생존의 지혜인 “바지 안에 더 많은 자유가 있다”를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지닌 담담하고도 치명적인 전제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고 마을을 군림한 뒤 그 비밀이 발각되는 여정까지 이어진다. 권력의 희생자가 그 권력구조를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은 차갑다 못해 황량하다. 미하엘 하네케의 <하얀리본>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적인 흑백 촬영 속에서 잔드라 휠러는 어떤 과잉도 없이 인물의 심리를 조금도 투명하게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긴장시키는 연기를 보여준다. <로즈> 속에서 이 배우는 내내 단두대 위에 서 있고, 그 결기로 2006년 <레퀴엠>으로 베를리날레 여우주연상을 받은 지 정확히 20년 만에 다시 은곰상을 안았다. <발라스트>로 주목받았던 미국 감독 랜스 해머가 18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 <퀸 앳 시>는 올해 베를리날레에서 심정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영화는 도발적인 첫 장면으로 시작된다. 런던 북부의 집을 방문한 딸 아만다(쥘리에트 비노슈)가 계부 마틴(톰 커트니)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 레슬리(애나 칼더 마셜)와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를 동의 능력이 없는 말기 치매 환자에 대한 성폭력으로 간주한 아만다는 계부를 경찰에 신고하고, 이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연쇄작용을 만들어 경찰, 사회복지사, 정신과 전문의에 의해 서로 유일하게 의지하는 동반자였던 레슬리와 마틴을 갈라놓는다. 이 영화의 진정한 중심은 애나 칼더 마셜과 톰 커트니로 두 노배우의 연기는 황혼의 인간이 겪는 절망과 취약함에 도덕극 이상의 절실함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랜스 해머는, 이미 선례가 무수한 알츠하이머 드라마의 기시감을 단번에 물리칠 정도로 정교한 시각적 구조와 성숙한 내러티브를 펼쳐내 은곰상(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종합하면 올해는 개별 작품의 미학적 성취보다, 영화제가 발을 딛고 선 광장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스크린을 압도한 해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무는 것은 절반의 독해다. 올해 베를린이 호출한 영화들은 국가적, 공동체적 단위의 다양한 권위주의와 억압에 집중하며 지금 세계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묻고 있었다. 대다수 평자들이 경쟁부문을 예년보다 완성도 높은 라인업으로 평가했고 <옐로 레터스>와 <구원>이 나란히 최고상을 받은 수상 결과가 하나의 일관된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제 기간 내내 언론의 해부 앞에서 몸살을 앓았던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의 말처럼, 올해 베를린이 정치적으로 고조되었다면 그걸 적어도 실패라 부르긴 어려워 보인다. 이 또한 영화제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므로.
현지 통신원이 접한 독일 언론의 반응은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은 빔 벤더스가 경솔한 발언으로 영화제를 위기에 처하게 했지만, 마지막 시상 결과를 통해 자신의 발언에 대한 오해를 어느 정도 잠재웠다고 평가했다. “영화 제작자들이 단순히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정치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질문을 예술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비전을 보여주었다.” 한편 중도·보수 계열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독일 기자 틸로 융과 같은 인물들이 도덕적 확신이라는 명목 아래 계속해서 사람들을 재판정에 세우고 있다고 묘사하거나, 영화 <포위된 도시의 연대기>로 최우수 장편데뷔작상을 수상한 시리아-팔레스타인 출신 감독 압달라 알카티브가 독일 정부를 비판하며 “우리를 반대한 이들을 기억할 것이다”고 발언한 것을 “공개적 위협”으로 규정했다. 앞서 독일 환경부 장관 카르스텐 슈나이더가 이 수상 소감을 듣고 시상식장에서 퇴장한 바 있다.
주요 언론은 공통적으로 영화제 존속을 고민하는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의 딜레마를 지적하는 분위기다. 2024년 영화제에서 팔레스타인인의 강제 이주를 다룬 영화 <노 아더 랜드> 제작진의 다큐멘터리상 수상 소감이 일부 보수 정치인들에 의해 “반유대주의”로 공격당한 맥락을 언급하면서다. 또 가자에 침묵하고 이란과 우크라이나를 향한 선택적 연대의 배경으로 이스라엘에 지속적으로 무기를 판매하고 있는 독일 연방 정부의 지원을 꼽았다. 베를리날레가 앞으로 영화제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수호해갈지, ‘국제’영화제로서의 가치를 어떻게 제대로 지켜낼지 집행부에겐 더 이상은 우회할 수 없는 숙제가 남겨졌다. /베를린 지경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