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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

박찬욱 지음 이윤호 작화 을유문화사 펴냄

박찬욱 감독의 매치컷 하면 여러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르지만, 최근작 중에서는 역시 <동조자>의 장면전환이 떠오른다. 전화기 다이얼이 자동차 바퀴가 되고, 담뱃불이 폭탄의 불빛이 되고 거울에 비친 주인공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다른 인물의 옆모습으로 전환되는 영상을…. 아, 뭔가 다른 감탄사를 내뱉고 싶지만 진부하게도 ‘스타일리시하다’는 말 외에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쩔수가없다>에도 당장 떠오르는 매치컷이 있다. 아라가 범모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함께 연극을 본 날 갑자기 정전이 되었고 이때를 설명하던 아라가 손가락을 탁 튕기자 갑자기 과거의 젊은 범모가 나타나 지포 라이터를 켜는 장면으로 전환이 된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연결이 되면서도 한순간에 장면이 전환되며 관객을 환기시키는 이런 장면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저 장면이 구성되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표지부터 영화 포스터를 떠오르게 하는 <어쩔수가없다 스토리보드북>은 바로 그 장면들에 대한 창작자의 머릿속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은 설계도다.

시나리오부터 미술과 음악, 촬영을 비롯해 그 모든 요소들이 고도로 조율되어 완벽한 톱니바퀴를 이룬 장면을 보면 그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싶다. 박찬욱 세계관의 설계도와 같은 스토리보드를 많은 관객(혹은 독자)들이 엿보길 원하는 이유다. 관객의 지지를 받은 영화의 각본집이 책으로 발간되는 경우는 흔해졌지만, 스토리보드가 책으로 엮여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각본을 영상으로 옮기는 기초 작업 중 하나인 스토리보드는 건물로 치면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영상 속에서 의미를 두지 못하고 지나쳤던 장면들조차 스토리보드에서는 왜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그 위치에 있었고, 인물이 프레임인 혹은 아웃되었는지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화는 팀 작업물이다. 창작자 개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각본으로 옮겼다 하더라도 모두가 공유할 이미지가 필요하다. 보다 효율적인 촬영을 위해 해두는 밑작업이 스토리보드인 셈인데, <어쩔수가없다>의 스토리보드가 책으로 나와준 덕분에 우리는 이 영화를 더 오래 뜯어보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모호하기를 자청하는 박찬욱 감독이 가장 선명하고 명확하게 만든 작업 지시서. 이 책으로 인해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창작의 비밀 한겹을 우리 앞에 드러내게 되었다.

[문 제지] 조림지- 민수의 상상

끝없이 펼쳐진 땅이 그루터기만 남은 채 휑하다. 일정한 속도로 혼자 일하는 로봇.

1. 공장 소음 계속, 조림지의 소리는 안 들린다. 숲의 꼭대기, 나무 한 그루가 흔들.

2. 나무의 밑둥을 꽉 문 벌목기. 톱날이 나무를 벤다.

3. 베어낸 나무를 옆으로 눕힌 다음 일정한 길이로 썬다.

4. 그루터기만 남은 황량한 벌판. 멀리, 베이기를 기다리는 숲. 벌목기가 잘라 모아 놓은 통나무를 집어 올리는, 기계 팔 달린 트럭 한 대. 일정한 속도로 혼자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