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삶에 깔려 있을 것인가, 어떻게든 기어나와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후자의 길을 택하는 인간상에 마음을 조금 더 줄지도 모른다. 배우 이연이 <새벽의 Tango>의 주인공을 연기하며 품은 마음도 다르지 않다. 친구를 믿었다가 대포 통장 사기에 휘말린 지원(이연)은 평범했던 일상의 모든 요소를 빼앗긴 땅에서 벗어나 공장으로 향한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는 과하도록 솔직한 발언 끝에 얻어낸 전자부품 공장의 생산직은 지원에게 시급한 생존을 가능케 하고, 뜻밖의 조건 없는 호의와 연대를 경험하게 한다. 드라마 <소년심판>(2022)에서 남자 초등학생이자 살인 용의자인 백성우 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이연은 장르색이 짙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자신의 인상을 확실히 각인해왔다. <새벽의 Tango>로 신예 김효은 감독의 단편과 장편 데뷔작을 모두 함께하게 된 그를 만났다.
- 김효은 감독과는 2021년 단편 <거북이가 죽었다>에서 처음 만났다.
인스타그램 DM으로 인연이 시작됐다. 원래 DM 확인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우연히 읽게 된 메시지의 발신자가 김효은 감독님이었다. <담쟁이>(2020), <코스모스>(2020) 같은 작품들을 보고 나를 알게 되었다며, 꼭 이 단편을 함께하고 싶다고 하더라. 영화 내내 배우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잡고 싶다는 연출 계획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 <새벽의 Tango>로 감독의 장편 데뷔작까지 같이하게 됐다. 연이은 작업이라 서로의 초기 필모그래피에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은데.
함께 성장해나가는 친구이자 동료로서 감독님의 첫 장편을 응원하고 싶었다. 어느 날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과정에 지원할 거라며 집필 중인 시나리오를 보여주더라. 당시 세간의 관심을 받던 빵 공장 산재사고에서 영감을 받아 본인이 직접 경험한 일을 풀어냈다고 했다. 알아서 열심히 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2차 면접을 떡하니 붙어서 왔다. 심사위원들 앞에서 프로젝트 피칭을 할 때, 지원 역을 이미 내가 맡는 것으로 설명했다더라. (웃음)
- 두 번째 작업을 하며 감독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 부분이 있다면.
감독님이 참 외로운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 (웃음) 전작 때도 그렇고 ‘왜 이렇게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공장이라는 프레임 안에 한번, 방진복이라는 갑갑한 프레임 안에 다시 한번 사람을 가둬놓은 것 같았다. 결국에는 그런 외로운 사람들과 연대하려는 것이 감독님의 진심이다.
- 말했듯 지원을 비롯한 공장 직원들은 눈을 제외하고 전신을 가린 흰색 방진복을 입고 소통한다.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진 제한적인 상황에서 연기할 때, 평소보다 더 신경 쓰거나 힘을 주어 표현한 부분이 있나.
사실 눈이라도 보인다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배우에게는 눈이 가장 중요하고, 눈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신 얼굴의 다른 근육을 보여줄 수 없으니 목소리로 불안한 정도를 표현하려 했다. 처음 방진복을 입었을 때는 확실히 목소리가 불안하고, 조장 완장을 차고 난 후에는 목소리가 단단해진다. 반말투가 섞인 단호한 표현을 쓰는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27살 여성인 지원의 삶에 생긴 깊은 굴곡을 생각해보게 된다. 사기에 휘말린 지원이 “먹여주고 재워주는” 공장에 취직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 다만 그 회복이 인간관계보다는 기본적인 생활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마음에 가까웠을 것 같다. 공장 사람들과는 피해를 끼치기도, 그렇다고 피해를 보기도 싫은 ‘노 터치-노 스트레스’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을까.
- 그런 지원의 일상에 주희(권소현)와 그가 사랑하는 춤 ‘땅고’가 들어왔다. 실제로 춰본 땅고는 어떤 춤이었나.
굉장히 조심스러우면서도 똑똑해야 하는 춤이었다. 기억해야 할 동작이 많았고 그 순서대로 정확히 발이 나가야 했다. 루틴을 다 외운 다음에야 비로소 함께 춤을 추는 상대방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몸에 손을 대면 어디에 힘을 주고 있는지 그 근육의 움직임이 다 느껴진다. 상대의 발을 밟거나 혹시 넘어뜨릴까 봐 소현 배우를 항상 조심스럽게 대했던 것 같다.
- 지원은 첫 땅고 연습에서부터 ‘리드’하는 역할을 맡는다. 반면 연습 경험이 많은 주희가 오히려 ‘팔로’ 역할을 맡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두 사람 사이의 이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연기를 할 때도 리액션이 가장 어렵다. 액션을 주는 건 미리 준비해온 대로 하면 되지만 그것을 순발력 있게 받아내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다. 액션과 리액션이 잘 이루어지는 신이 정말 좋은 신인데, 리액션을 여유롭게 해내는 사람이 결국 연기를 잘하고 유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땅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주희가 땅고를 오랫동안 해와 액션과 리액션이 모두 가능했고, 그렇기에 상대를 받쳐주는 쪽을 선택한 것이라 생각한다.
- 연기의 ‘액션-리액션’으로 비유하니 이해가 쉽다.
모든 것의 기본인 것 같다. 말하는 건 쉽지만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는 건 어렵지 않나. 리액션을 하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결국 여유가 있고 타인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기와 춤, 삶이 결국 맞닿아 있는 것 같다.
- 최근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도 그렇고, 개봉예정인 영화 <경주기행>도 기대작이다. 이연의 필모그래피를 따라온 관객들은 이 배우가 얼마나 공을 들여 자신의 길을 쌓아가고 있는지 느낄 것 같다.
작품을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점은 ‘내가 성장할 수 있는가’이다. 배우는 나 자신을 도구로 쓰는 직업이라, 내가 멈춰 있으면 연기도 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볼 때 내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스펙트럼을 넓혀줄 수 있는지를 먼저 본다. 장르물을 많이 하다 보면 복잡한 감정도 금방 풀어내게 되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를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느낀다. 다른 장르, 다른 성격의 캐릭터를 한번 경험하고 돌아와야 연기적 시야가 트인다. 그렇게 한번 크게 돌고 돌아왔을 때 비로소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