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장치들>이란 전시의 제목을 들으면 모종의 익숙함과 이질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우선 ‘장치’(apparatus)라는 개념은 미학·철학에서 꾸준히 애용되던 단어라 다소 친숙하다. 한편으론 적확히 정의하기가 모호한 용어이기도 하다.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대표적으로 루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이론을 통해 지배계급의 착취가 어떻게 교육·법률·사회·정보적 ‘장치’로 작동하는지 설파했다. 불어로 디스포지티프(dispositif)라 번역될 때는 뉘앙스가 다소 다르다. 미셸 푸코의 ‘장치’(디스포지티프)엔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배치·배열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실증적으로 달라진다는 함의가 중심에 있다. 요컨대 장치란 풀이 방식에 의해 다양하게 변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여러 변주의 한 가지 공통점은 이것이 주로 서구(유럽)권에서 논의되고 발전해온 개념이란 것이다.
그러니 ‘장치’에 ‘아시아’라는 관계를 이었을 때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서구 중심 이데올로기의 해제를 위해 주로 이용됐던 장치 개념이지만, 막상 서구 식민제국주의에 의해 피식민의 역사를 거쳐야 했던 아시아 권역에선 비교적 덜 논의되어왔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장치들>은 이러한 이질감으로부터 시작하여, 서구의 장치 개념을 아시아의 무빙이미지로 전유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들의 개념으로 우리의 것을 만들기, 또는 그들의 것을 우리의 개념으로 바라보기. 아시아 전반이 흐릿하게 지닌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사회·역사적인 맥락뿐 아니라, 장치 개념은 지금의 무빙이미지를 매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큰 단서가 된다. 으레 블랙박스(영화관)와 화이트큐브(미술관)로 구분되던 무빙 이미지의 자리는 이제 단순히 두개로 구분될 수 없다. 생활 주변의 모든 디스플레이, 넷플릭스로 라이브 스트리밍되는 엔터테인먼트 쇼가 무빙 이미지의 범주를 넓혔다. 뮤지컬·공연·스포츠 등 다양한 쇼 비즈니스의 현장에서마저 스크린을 통한 고도의 이중 현실이 만들어지는 시대다. 영화 분야로 좁혀도 중요성은 크다. 주로 미장센이라 불리며 사각의 스크린을 토대로 이야기되던 고전적 영화미학이 권능을 잃은 지는 오래다. 이 틈을 메꾸면서 영화의 내적 요소는 물론이거니와 영화의 문화·매체·기술적인 맥락을 전반적으로 훑을 수 있는 렌즈가 장치(디스포지티프)다.
소개글로 뭉뚱그리기 어려운 그 의미들은 <아시아의 장치들>을 직접 감상하는 순간 직관으로 와닿는다. 전시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 2관 1~3층에서 진행되며 아시아 작가 31명(팀)의 64개 작품으로 구성됐다. 무빙 이미지라는 매체의 속성, 아시아의 정치·역사적 흐름을 장치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자리다. 그 탐험에 조금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전시 체험기와 작품 리뷰, 참여 작가들의 코멘트를 이어 전한다. 참고, 상영시간이 1시간 넘는 장편 작품들도 있으므로 하루 만에 모든 작품을 꼼꼼히 둘러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넉넉한 일정으로 광주에 가길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