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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돌아다니며 보기, 올라가서 내려다보기 - <아시아의 장치들> 전시 체험기와 작품 리뷰

<아시아의 장치들>에선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관람 순서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전시장 입구에 으레 비치되는 종합 리플릿도 없다. 1층부터 3층까지 전시된 64개의 작품이 각자의 시청각적 자극을 내뿜으며 인지의 혼선을 자아낸다. 관객은 눈과 귀와 발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따라 작품을 마주하게 되며, 개별 작품의 리플릿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전시의 맥락을 스스로 짚어가게 된다. <아시아의 장치들>이 어떤 공간과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관객 각자의 길 탐색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 체험기를 전한다.

1층 – 원의 안쪽

<아시아의 장치들> 1층 전경.

1층에 들어서면 커다란 원형의 광장이 펼쳐진다. 광장 바닥엔 국내 실험영화, 비디오아트 분야의 주요 연대기가 적혀 있다. 원형의 테두리를 만드는 별실(셀)들 안엔 아시아의 역사를 여성 서사로 재편한 작품들이 도사리고 있다. 차학경, 한옥희, 김소영, 임고은, 김동령×박경태, 마리암 타파코리 등 국내외 여성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피식민의 역사를 겪어야만 했던 아시아 전반의 20세기적 풍토에서 여성 예술가들이 남긴 기록과 사유다. 이것들은 지금 아시아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는 이중, 삼중의 피식민 구조를 들여다보게 한다.

차학경의 혼란으로부터

<몽골에서 온 하얀 먼지>(차학경, 1980).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 차학경(1951~82)은 저서 <딕테>등을 통해 20세기 디아스포라의 역사·민족·젠더 정체성을 고심했던 이다. 1층 입구에 배치된 소형 브라운관 속의 <입에서 입으로>(1975)는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잡음을 매개로 디아스포라의 혼란을 표출한다. 별실에는 16mm 필름으로 촬영한 미완성 영화 <몽골에서 온 하얀 먼지>(1980)가 상영된다. 한국에서 촬영한 철로, (모형) 비행기, 계단, 숲길 등 사회의 이동장치로 기능하는 것들의 모습이 교차한다. 특히 기차 플랫폼에서 정해진 동선에 따라 프레임의 안팎으로 교환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에 밟힌다. 무척이나 피동적인 강제 이주의 비유적 형상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되는 작품의 스토리보드가 벽 한편에 걸려 있는데, 숏 하나하나의 카메라 움직임과 필름 광학 효과를 상세하게 정해둔 작가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ACC 필름앤비디오의 중심축, 카이두 클럽의 한옥희

<한옥희 아카이브>

<색동>(한옥희, 1976).

ACC 필름앤비디오의 역사에서 한옥희 감독(1948~)을 빼놓을 수 없다. 개관 이래 그 발굴과 보존에 가장 열을 가했던 인물이다. 1974년 여성 실험영화 집단 ‘카이두 클럽’의 대표로 활동하며 국내 실험영화 역사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선 <구멍>(1973), <중복>(1974), <2분 40초>(1975), <색동>(1976), <무제 77-A>(1977)와 최초로 복원·공개되는 <세 개의 거울>(1975)을 볼 수 있다. 이중에서도 걸작 <색동>의 감상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기 바란다. 초현실주의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여타 작품보다도 <색동>은 작가 고유의 시지각적 편집 역량을 강렬히 드러낸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 역동적인 사물놀이, 사찰의 단청 무늬 처마, 대금을 부는 남자, 대웅전의 불상과 연등, 엿장수의 가위 가락, 마당에서 말리는 붉은 고추 등 한국의 색과 선이라 부르고 싶어지고야 마는 이미지가 재빠르게 전환되고 중첩된다. 다 함께 모여 그네를 타고 베틀에 목화솜을 짜며 다듬이질하는 서민들의 행위도 제시되는데, 놀이와 노동이 접지되는 한국의 풍습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분한 민족주의적 제도 속에서도 사람들의 자그마한 생활상, 그것을 찍어낸 영화예술이 어떻게 색다른 해방감을 형성하는지 느낄 수 있다. <한옥희 아카이브>로 마련된 공간에서는 그가 만든 1993년 대전 엑스포의 홍보 영상, 카이두 클럽 관련 기록물 등이 비치되어 있다.

1층 – 원의 바깥

왼쪽부터 이토 다카시의 <스페이시>(1981), <천둥>(1982)

1층의 원 안쪽이 영상물 작품 위주로 구성된 정적인 곳이라면 그 외곽은 더 활기차고 동적인 곳이다. 기숙사, 편의점, 영화관, 광장, 기차역 등 일상의 공간들을 다룬 작품들이 각종 구조물로 확장된다. 도입부는 고전적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실험영화 작가인 이토 다카시의 <스페이시>(1981), <박스>(1982), <천둥>(1982)이 소형 브라운관, 천장에 걸린 대형 스크린, 구석 벽면에 투사된다. 필름의 프레임, 그 사이의 공간이 지니는 찰나의 물성과 카메라의 원론적인 공간 구성력을 보여준 <스페이시><박스>도 물론 탁월하지만, 호러영화의 문법과 광원을 실험영화에 머무르게 한 <천둥>은 현시대 실험영화 진영이 적극적으로 수행 중인 장르성의 탐구를 드러내 유독 즐겁다.

생활의 발견, 달동네와 편의점과 영화관

<광주극장 아카이브>(광주극장, 2026).

(토모토시, 2026).

1층 외곽의 여러 작품은 평소 쉬이 지나칠 법한 생활의 공간을 다룬다. <세븐일레븐에서 세븐일레븐을 사기>(2018)는 자본주의 시장의 대표적 세포라 할 편의점의 외관을 전유하여 자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토모토시 작가의 설치작품이자 퍼포먼스 기록물이다. 이를 한국식으로 변주한 <CU에서 CU를 사기>를 함께 보면 비제도적 퍼포먼스가 재현·체계화됐을 때의 재밌는 이질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 <백색인>(1994)은 관악구 봉천동의 달동네를 자연주의적으로 기록했고, <리슨투더시티 2009-2025>는 한국 사회의 난개발과 무책임한 정책의 역사를 폭넓게 담아냈으며, <광주극장 아카이브>는 오래된 극장의 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기숙사의 어린이들

<여공들의 기숙사>(유어 브라더스 필름메이킹 그룹, 2021, 2026 재제작).

철제 이층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기숙사의 모습이 관객들의 이목을 끈다. 대만의 영화 제작 그룹 유어 브라더스 필름메이킹 그룹이 만든 <여공들의 기숙사>(2021)를 전시용으로 재제작한 작품의 설치 요소다. 장편 데뷔작 <공원>으로 최근 전주국제영화제, 부산인터시티영화제 등에 소개되며 국내에 이름을 각인한 소여헨 감독이 그룹에 속해 있다. 2018년 대만 신베이시에서 일어난 베트남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이후에 여타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한 워크숍 프로젝트로도 확장되며 영상예술의 사회적 파급력을 입증했었다.

<여공들의 기숙사>가 지닌 진중한 무게감만큼 인상적이었던 점은 거센 노동 현장의 표상인 이층 침대를 어린이 관객들이 점유했단 사실이다. 침대 곳곳엔 <여공들의 기숙사>를 볼 수 있는 개별 디스플레이가 있고, 관람 행군에 지친 듯한 어린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발을 벗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는 동시에 헤드셋을 끼고 작품을 감상하곤 했다. 보호자들은 이것이 산업 내 이주노동자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려줬고, 너무 소란을 피워선 안된다는 에티켓을 가르치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교육의 장이 된 것이다. 사회제도의 불합리함을 토로한 작품을 통해, 여타 제도를 습득해가는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예술의 장치적 기능을 한껏 고심할 수가 있었다.

2층 – 영화의 보금자리는?

<아다치 마사오와 ‘풍경론’ 아카이브>

2층의 구조는 1층과 유사하다. 원형으로 둘러싸인 별실에서 영상을 감상할 수 있고, 이리저리 맴돌다 보면 여러 형식으로 배치된 작품들을 마주할 수 있다. 19명(팀)의 디자이너가 전시작 19개의 포스터를 새로이 제작한 <시네마토그래피로서의 포스터>도 전시돼 있다. 2층의 정신적 지주는 아다치 마사오(1939~) 감독이다. ACC는 그의 영화 <은하계>(1967)를 복원한 후 세계 최초로 상영했고, 2019년엔 <아다치 마사오의 은하계>를 출판하며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선 20세기 영화미학을 관통한 ‘풍경론’의 원류 <약칭: 연쇄살인마>(1969), ‘보도론’을 이끈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1971), <은하계>, 그의 첫 연출작인 <밥그릇>(1961)이 상영된다. 풍경론이 배태됐을 때의 각종 기록물과 이번 전시를 위해 진행된 아다치 감독의 인터뷰 영상 <풍경론에 관하여>도 볼 수 있다.

<약칭: 연쇄살인마>가 쏘아올린 풍경론이란, 으레 자연스레 주어진 것으로 여겨지던 일상의 풍경이 사실은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가동 원리임을 지적한 이론이었다. 요컨대 이 풍경은 <아시아의 장치들>이 사용하는 ‘장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약칭: 연쇄살인마>는 1968년 일본에서 연쇄살인을 일으켰던 소년 나가야마 노리오가 바라보았던 곳의 풍경들만을 이어 붙여, 그를 범죄의 행로로 이끌었되 겉으로 초연해 보이기만 하는 일본의 풍경을 고발했다. <풍경론에 관하여>에서 아다치 감독은 “다국적기업의 고도자본주의는 이미 우리 피부 속까지 침투했고, 개인의 육체 하나하나가 풍경이 되어버렸다”라며 “눈에 보이거나 손에 닿는 풍경보다 존재에 침식한 풍경과의 투쟁을 깊이 이야기할 때”라는 전언을 남겼다.

동시대 아시아의 질감

<우려장치>(타이키 삭피싯, 2026). 사진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층에서는 중국, 홍콩, 태국, 카자흐스탄 등의 다양한 실험영화를 만날 수 있다. 판 루, 타이키 삭피싯, 김경묵, 알렉산더 우가이, 티파니 샤, 리 카이 청 등 동시대 작가들이 포진해 있다. 영화 매체의 원리와 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들이 흥미로웠다. 타이키 삭피싯의 <우려장치>(2026)는 2025년 태국과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풍광을 공포라는 보편적 정서로 전달한 작품이다. 호러영화의 문법 아래 총을 쏘고, 참배하고, 절규하는 이들의 푸티지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첩된다. 작은 얼굴이 큰 얼굴의 일부가 되며 사람들의 표정은 계속 순환한다. 폭력의 육체적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원혼들의 의지가 무력해지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판 루의 <섬의 열몽>(2026)도 상세한 역사적 배경을 모를지라도 이해할 수 있는 보편의 언어로 제작됐다. 그것은 영화다. 1950~80년대 중국이 제작한 선전영화의 클립을 재편집해 하이난섬 배경의 새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영화들이 택한 형식적인 선전의 관습들, 이를테면 남성 군인들의 강한 눈빛과 또렷한 걸음의 방향, 단호한 어조, 아름다운 석양과 그들의 땀, 이내 멜로의 곡조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순백색 옷의 여성들이 그러한 형식의 요소들이다.

한국의 문제들

<멜팅 아이스크림>(홍진훤, 2021)과 프린팅된 사진들.

<리산시티, 알스트로에 메리아, 아수아 연대기>(정재훈, 2026)

근래 영화관과 미술관 사이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정재훈, 홍진훤 감독도 참여했다. 정재훈 감독의 영화 <에스퍼의 빛>은 5채널 영상 <리산시티, 알스트로에 메리아, 아수아 연대기>로 재편됐다. <에스퍼의 빛>에서 보았던 게임 속 세계가 한 통로에 비스듬히 배치된 여러 겹의 스크린을 제각기 차지한다. 통로의 깊이는 말 그대로 다른 세계에 ‘빠져들었다’라고 표현할 법한 물리적 거리감을 보장해준다. 여러 개의 화면이 끝내 하나의 표면에 모이려 할 때, 통로의 어둠은 상당한 강세의 섬광에 잡아먹힌다. 외따로 존재했던 게임의 월드-서버들이 한면에 욱여넣어졌을 때의 이 충돌 효과는 꽤 자극적이다(광과민성 발작을 조심할 것). 홍진훤 감독의 <멜팅 아이스크림>은 수해를 입은 민주화운동 시대의 사진을 복원하는 시도인데, 이번 전시에선 대형 큐브에 붙여진 <멜팅 아이스크림>의 사진 이미지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다른 이미지가 보이는 렌티큘러 기법이 적용된 사진도 있다. 영화관과 달리 수용자의 의지에 따라 다른 것을 볼 수 있다는 전시장의 특성을 활용한 것이다.

3층 – 나의 걸음을 조망하기

수십개의 작품을 체험하며 비로소 3층에 도착하면, 처음 이곳에 들어섰던 전시장의 입구와 1~2층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언가 바뀌어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관의 불이 켜지고 바깥세상으로 나갔을 때의 이질감처럼, 어떠한 세계를 통과했다는 바람이 느껴지는 것이다. 빽빽한 밀도로 채워졌던 1~2층과 달리 3층은 여백으로 가득하다. 조금 더 자유롭게 발을 움직이며 자신의 지난 걸음을 조망할 수가 있다. 각 작품 앞에 개별로 놓여 있던 리플릿을 엮을 수 있는 작은 고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덕분에 머릿속에 미처 다 정리하지 못했던 작품들의 목록과 자신의 감상을 매듭지을 수 있다.

느리게 쉬어갈 때

<타워 크레인>(서원태, 2006)

3층 천장에 배치된 대형 파노라마 스크린에서는 서원태 작가의 <타워크레인>(2006)과 장민승 작가의 <둥글고 둥글게>(2020, 2026 재제작)가 흐른다. <타워 크레인>은 16mm 필름으로 제작되었던 무성영화로 이번엔 디지털로 변환되어 상영된다. 도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공사용 타워크레인의 묵직한 움직임이 유장한 속도감으로 반복될 때, 우리는 현대 도시의 굉음을 환청처럼 듣게 된다. <둥글고 둥글게>는 2020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만들어졌던 작품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2026년 확장 버전이 제작됐다. (구)광주국군병원, (구)광주교도소, 잠실 올림픽경기장 등 5·18민주화운동을 비롯한 근현대 한국사의 상처를 되짚는다. 한편 DJ 소울스케이프의 작품 <바람>은 관객의 눈을 쉬게 해준다. 시각의 여백을 주는 것이다. 작은 방에서 5채널 음향으로 흘러나오는 1960~70년대의 한국적 음조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