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 40주년을 맞은 농심 신라면이 단편영화 제작 지원에 나섰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일 그 결과물 중 한편인 <라면이 뿔기 전에>는 40년이라는 세월에 주목했다. 청년이 노인이 되는 긴 시간, 어떤 설렘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 들이켜도 얼큰한 국물처럼, 언제 떠올려도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는 얼굴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니까.
장편다큐멘터리 <성덕>으로 데뷔해 <이상현상> <어느 날, 영화가 죽었습니다> 등의 단편 극영화를 연출하며 영역을 넓히는 중인 오세연 감독은 할머니에게서 그 사연을 엿봤다. 주인공은 손녀 지수(최지수)를 따라 서예학원으로 향하는 영옥(차미경). 지수는 영옥의 동행이 못내 껄끄럽지만, 이에 개의치 않는 영옥은 힘차게 먹을 간다. 그는 어떤 문장을 쓰고 싶었던 걸까? 오세연 감독의 상상은 두 여자를 잇는 라면과 함께 끓어올랐다.
할머니에게 붓을 쥐여준 까닭은
“나를 제일 울리는 존재는 누구일까?” 프로젝트를 제안받은 오세연 감독이 가장 먼저 한 질문이다. 신라면을 수식하는 문구이자 대표 카피가 ‘인생을 울리는’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라는 답을 얻은 오세연 감독은 또 다른 궁금증으로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애틋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주 생각했다. 할머니와 내가 친구 사이였다면 어땠을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서로의 연애담을 나눌 수 있었을 것 같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영화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그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정이 싹트는 곳을 서예학원으로 정한 배경에도 신라면이 있었다. 처음부터 학원을 고른 건 아니었다. 단식원처럼 식사가 제한된 공간이나 신라시대처럼 먼 옛날을 염두에 둔 적도 있다. “‘신라의 면’으로 신라면을 후대에 전파하는 시대극을 해볼까 싶었다.” 그러다 오세연 감독의 시선이 신라면의 붉은 패키지에 꽂혔다. 굵은 붓글씨로 적힌 매울 신(辛)이 눈에 들어왔다. 이 상징적인 디자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뻗어나가게 하겠다는 발상으로, 할머니가 서예학원에 발 딛는 도입을 적어 내렸다. 손녀를 따라간다는 설정은 두 인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니터와 스마트폰에서 벗어나 수양과 휴양의 목적으로 서예를 배우는 젊은이가 늘었다”는 소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고.
3대로 분한 네명의 여자배우
손녀 지수가 눈 깜짝한 사이, 할머니 영옥이 사라진다. 지수는 영옥을 찾아 나서고, 영옥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수 앞에 나타난다. 1980년대를 사는 젊은 영옥 역의 정이주 배우는 그렇게 스크린에 등장한다. 서예학원에 라면을 배달하는 분식집 사장님으로 말이다. “라면은 훌륭한 끼니로서 많은 사람을 먹여살렸다. 그리고 누군가는 식당에서 라면을 팔면서 먹고살았다. 이 영화에서는 그들을 영웅으로 여기고 싶었다.” 정이주 배우와 오세연 감독은 앞서 한국예술종합학교 30주년 기념 옴니버스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 1막 Warm Up 예열> 속 단편 <어느 날, 영화가 죽었습니다>로 협업했다. “짧은 작품이었기에 다시 긴 호흡으로 함께하고 싶었다”는 오세연 감독에게 화답한 정이주 배우는 경애의 마음으로 학원과 분식집을 오가는 청춘을 연기했다.
할머니의 과거로 초대받은 손녀 역의 최지수 배우는 드라마 <언더커버 미쓰 홍>로 호응을 얻기 이전에 영화 <빅토리>에서도 활약했고, 이를 눈여겨본 오세연 감독이 연락을 건넸다고.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도 밉지 않아 보이는, 오히려 귀여워 보여야 하는” 인물을 찰떡같이 표현한 그의 곁에서 차미경 배우도 노년의 발랄함을 뽐냈다. “지난해 나를 울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와 <미지의 서울>에 모두 차미경 선배님이 계셨다”며 “드림팀 완성”을 고백한 오세연 감독이 행운의 캐스팅을 하나 더 자랑했다. 영옥의 딸이자 지수의 엄마인 정혜의 어린 시절을 맡은 김단아 배우였다. “어린이 배우와 작업하는 게 처음이라 조심스러웠지만, 시종일관 움직이는 그의 ‘아이다움’에 매력을 느꼈다. 최지수 배우와 투숏이 잡혔을 때 보이는 동글동글한 볼 덕분에 두 사람이 진짜 모녀처럼 보였다. 묘하게 기뻤다!”
손때 묻은 낭만까지 재현하다
2026년과 구분되는 1986년의 멋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로케이션이 중요했다. 책상에도 손때가 묻은 듯한 서예학원은 서울 종각역 부근에서 발견했다. “낡은 상가에 있는 학원을 원했는데, 그곳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상가 5층에 있었다. 문이 유리로 된 것도 맘에 들었다. 70년간 한자리를 지킨 학원이라는 점도 이 프로젝트와 잘 맞아 보였다.” 영옥의 분식집은 목동에 있다. 영업을 쉬기 힘든 식당의 특성상 촬영을 꺼리는 분들도 많았지만, 사장님의 아들과 친구들이 사장님을 설득해주셨다. 그 안은 최나혜 미술감독이 살뜰히 채웠다. 낡은 난로, 선풍기, 전화기, 라디오, 밥통을 들여온 데 이어 오래된 농심 포스터도 변형했다. 오세연 감독이 준비한 킥은 1986년 신라면 복각 패키지. 촬영용으로 제공받은 라면을 과거 신에서도 활용하면 옥에 티가 될까 싶어 어주영 씨네핀하우스 대표에게 제작을 부탁한 그 봉지는 단 10개만 만들었다.
“우리 대학가요제에서 본 적 있죠?”
20분의 시간 여행을 매듭짓는 엔딩크레딧에는 <라면이 뿔기 전에> 메인 테마가 흐른다. 익숙한 듯 낯선 7080 스타일의 가사와 멜로디에 곡명이 궁금해질 때쯤, 검은 화면에 가수의 이름이 뜬다. 그 정체는 바로 오세연 감독! 이렇게 관객을 놀라게 할 생각에 벌써 즐겁다는 그는 “너인 줄 몰랐는데, 노래 너무 좋다”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주변인들의 반응을 만끽하는 중이다. 오세연 감독의 어머니도 장난스럽게 물었다고 한다. “우리 1986년 대학가요제에서 본 적 있죠?” 정경인 음악감독이 직접 쓴 레트로 컨셉의 주제가 위에서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오세연 감독의 음색은 전주영화제에서 확인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