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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재미있고 의미있는 -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나의 사적인 예술가>(Late Fame)

켄트 존스 / 미국 / 2025년 / 96분 / 개막작

어느 날 에드(윌럼 더포)에게 마이어스(에드문드 도노반)가 찾아온다. 그는 오래전 에드가 집필한 시에 감명받았다며 자신이 속한 ‘열정주의자 모임’을 소개한다. 부유하고 젊은 예술가로 구성된 이 모임은 에드를 열렬히 환영한다. 펜을 내려놓고 37년간 직장인으로 지낸 에드는 이들의 열망에 덩달아 창작욕을 불태운다. 에드와 멤버들은 새 작품을 발표할 낭독회를 준비하고, 에드는 멤버인 글로리아(그레타 리)와 유달리 각별해진다.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19세기에 집필한 소설을 바탕으로 예술을 좇는 이들의 열정을 존중하면서도 저변에 깔린 허영과 인정욕구, 뉴욕 예술계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데에서 오는 공허함을 낱낱이 꺼내 보인다. 에드는 한때 뉴욕 보헤미안 문화의 중심에 섰던 이로서 이들에게 공감하면서도 그 시기를 지난 선인으로서 과거를 객관적으로 반추하는 시점을 견지한다. 어떤 식으로든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에드와 글로리아를 윌럼 더포그레타 리가 심도 깊게 그려낸다.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초청작. /조현나

<남태령>

김현지 / 한국 / 2026년 / 113분 / 폐막작

12·3 비상계엄 2주 뒤, 전봉준투쟁단이 트랙터를 끌고 집결한다. 진주에서 서울까지 전진하며 윤석열 퇴진을 외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동짓날 밤, 과천과 서울을 잇는 남태령에서 경찰이 행진을 막는다. 도움을 청한 농민들에게 달려간 이들, 달려가지 못해 후원금과 먹거리를 보낸 이들, 달려가는 데 힘을 더하고자 버스와 택시와 오토바이를 몬 이들이 있다. MBC경남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남태령>은 이들의 기억을 그러모은 다음 묻는다. “그날 밤 우리가 함께 넘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다시 그 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김현지 감독은 남태령의 시민들이 세대, 젠더, 직업을 초월해 연대했다기보다 그 모든 차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며 연대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답을 구하려 한다. 2030 여성, 성소수자, 그리고 농민들이 서로의 투쟁을 알아가며 변화한 경험에 귀 기울이면서 말이다. 인터뷰 장면만큼이나 트위터 화면을, 집회 구호만큼이나 K팝을 적극적으로 소환하며 흥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광장을 닮은 영화다. /남선우

<특근>

박세영 / 한국 / 2026년 / 41분 / 코리안시네마

극장 직원 율(정회린)은 시계만 바라본다. 교대 근무자는 나타나지 않고 극장은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온다. 찾아오는 건 불청객뿐이다. 영업 종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를 틀어달라고 조르는 관객과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남자까지. 이들을 수습하느라 율은 퇴근하지 못한다. 박세영 감독은 광주극장을 배경으로 애수 어린 작품을 완성했다. <특근>의 진정한 주인공은 극장이다. 오래된 극장이 으레 그러하듯 감상에 젖고 불만을 늘어놓으며 웃고 울고 조는 관객들을 묵묵히 품어낸다. 실험적인 앵글로 담긴 극장은 더없이 새롭고 때로는 우주 한가운데 놓인 듯한 인상을 준다. 독특한 구도로 배치된 인물들은 마치 외계인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영화의 백미는 극장 안 사람들이 지구 평평론을 두고 대화를 이어가는 후반부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이들의 대화는 방금 본 영화의 감흥을 누구와라도 나누고 싶은 달뜬 관객의 풍경과 같다. 그래서 어쩌면 극장을 사랑하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실 영화일지도 모른다. /이유채

<춘슈>(Mothertongue)

장률 / 중국 / 2025년 / 123분 / 마스터즈

배우 팡춘슈(바이바이허)는 영화 오디션에서 탈락한 이유가 마뜩잖다. 감독은 청두 출신인 그에게 사투리를 쓰는 역할을 제안했으나 일찍부터 표준어에 익숙해진 탓에 고향 말을 구사하지 못한다. 배우의 꿈을 접기로 한 팡춘슈가 베이징을 떠나 향하는 곳은 청두다. 그는 서먹한 어머니, 연기 스승 장메이와 그의 아들 동과 얽히고 도시를 거닐면서 낯선 고향과의 거리를 좁힌다. 장률 감독이 <춘슈>를 통해 또 한번 관객을 느린 탐색의 시간으로 이끈다. 주인공과 함께 도시를 거닐며 번성과 쇠퇴가 공존하는 청두의 변화를 목격하게 한다. 특히 철거 위기에 놓인 유서 깊은 어메이영화스튜디오를 오래 바라보게 한다. 청두의 언어를 모르는 춘슈는 공동체 안으로 쉽게 스며들지 못하고 소통의 어려움은 감독 특유의 긴 침묵으로 선명해진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대상 수상작인 <루오무의 황혼>과 같은 뿌리를 공유하며 출연진과 제작진 역시 같다. <루오무의 황혼>을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발보나 이야기>(Good Valley Stories)

호세 루이스 게린 / 스페인, 프랑스 / 2025년 / 124분 / 마스터즈

바르셀로나 북동부 외곽의 작은 동네인 ‘발보나’는 20세기 초, 마지막 대지주가 근대적 개발을 시도했으나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면서 도시계획 없이 방치된 지역이다. 이후 산업화와 맞물리며 남부 노동자들이 발보나로 이주했고 이러한 소수의 이주민, 노동자가 터를 일궜다. 오랜 시간 고립된 채 타지역과 갈등을 겪으며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진 역사를 발보나의 노인들이 카메라 앞에서 생생히 증언한다. 영화가 공들여 포착한 발보나의 자연과 아이들이 뛰노는 여름의 일상은 마을에 기차선로가 들어서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발보나 주민들에게 지역개발은 또 다른 이름의 소외로 변모해 이들을 옥죈다. 그럼에도 오랜 역사가 증언하듯 발보나 주민들은 꿋꿋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에 자신들의 문화를 대물려주려 한다. <뮤즈의 아카데미> 이후 호세 루이스 게린 감독이 11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발보나 지역민들의 삶을 조명한다.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발보나의 현재와 과거를 채집해 밀도 높게 압축한 다큐멘터리다. /조현나

<많다, 말이>(A Lot Talk)

파스칼 보데 / 프랑스 / 2026년 / 78분 / 가능한 영화

이집트인 남성 암르에게는 두 가지 고충이 있다. 17년째 거주 허가를 받지 못한 채 파리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 수다스럽지만 정작 이곳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암르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이자 영화감독인 파스칼 보데에게 당국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의기투합한 파스칼은 암르의 체류 허가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로 한다. 그 결과물인 다큐멘터리 <많다, 말이>는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친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담은 코미디다. 표현력이 풍부한 암르는 프랑스어를 제외한 모든 방식으로 생각을 전달하고, 파스칼은 그것을 어떻게든 파악하려 애쓴다. 때때로 황당한 결과물을 내놓는 구글 번역기가 웃음을 만들고, 조력자를 자처하는 동네 친구들의 등장이 따뜻한 기운을 더한다. 카페에서 시작된 둘만의 작은 이야기는 대화가 깊어지고 행정기관이 개입할수록 대도시의 이민 문제로 확장된다. 수많은 말들이 오가는 영화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이민국이 사용하는 언어다. /이유채

<마비: 시비레>(Numb)

우치야마 다쿠야 / 일본 / 2025년 / 119분 / 월드시네마

일본 니가타에 사는 소년 다이치는 목소리를 잃었다. 폭력적인 아버지, 위태로운 어머니 곁에서 입을 닫기로 택한 것이다.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해 홀로 개천 물을 길어온다거나, 이웃의 곳간을 털어 배를 채우는 일도 다반사다. 한밤중 우연히 만난 이주노동자의 등에 기대어 잠시나마 어른의 온기를 느끼기도 하지만, 다이치에게 아침은 멀게만 보인다. 지난한 새벽을 지나 성인이 된 그는 자신을 침묵하게 만든 존재를 찾아 나선다.

<문라이트>를 연상시키는 3막 구조를 갖춘 <마비: 시비레>는 성장기라기보다는 탈출기에 가깝다. 세명의 다른 배우가 다이치를 연기하지만, 그 차이가 잘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인물의 생은 정체되어 있다. 세 배우의 일관된 눈빛을 따라붙는 핸드헬드카메라가 조용한 영화로의 몰입을 돕는 한편 엔딩에 이르러 피어나는 미세한 희망이 여운을 증폭시킨다. <내 마음속의 사사키> <젊고 낯선 자들> 등으로 주목받아온 1992년생 감독 우치야마 다쿠야의 신작으로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서 최초 상영했다.

<너바나 더 밴드>(Nirvanna the Band the Show the Movie)

맷 존슨 / 캐나다 / 2025년 / 101분 / 월드시네마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바꿀 것인가. 웹시리즈, TV시리즈로 제작됐던 <너바나 더 밴드 더 쇼>가 타임머신이라는 소재를 더해 영화로 확장됐다. 클럽 리볼리에서의 공연을 위해 맷과 제이는 대중의 이목을 끌 황당한 계획을 세우고, 급기야 둘이 처음 만난 17년 전으로 돌아가 현재를 바꾸려 한다. 맷과 제이는 이들이 속한 ‘너바나 더 밴드’의 성공을 꿈꾸지만 각자 상상하는 성공의 형태는 다르며, 그로 인한 갈등이 의외의 결과를 초래한다. 맷 존슨 감독 고유의 B급 감성과 메타 코미디가 발휘된 페이크다큐멘터리다. <빽 투 더 퓨쳐>를 오마주해 차를 매개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등 전작 <고딩감독>처럼 여러 영화 레퍼런스, 인터넷 문화를 자유자재로 인용한 것이 특징이다. 극의 뼈대는 유지하면서도 행인들과 상호작용하며 즉흥적으로 무대를 꾸리는 맷과 제이의 연출력 또한 인상적이다. 리드미컬한 촬영과 편집은 두 주인공의 성긴 계획 속에서도 나름의 미학을 발견한다. 맷과 제이의 실제 우정이 단단한 결속으로 작용하는 유쾌한 버디물이다. /조현나

<전쟁 중에 이혼을 한다는 것>(How to Divorce During the War)

안드리우스 블라제비추스 /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 아일랜드, 체코 / 2026년 / 109분 / 프론트라인

작금의 사회적 이슈와 예술적 시도를 엮은 작품을 선보이는 프론트라인 섹션. 올해도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균형을 이룬 가운데 장편 극영화 <전쟁 중에 이혼을 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실제 부부를 관찰하는 듯한 체험을 넘어 ‘전쟁 중에 영화를 본다는 것’의 괴리감마저 전파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발트해 남단의 국가 리투아니아. 남편은 풀리지 않는 시나리오를 붙들고 있는 감독이고, 아내는 콘텐츠 제작사 임원이다. 딸 하나를 둔 그들은 어느새 양육 문제를 빼고는 말도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떨어져 지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대화를 겨우 나눈 다음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 인접국으로서 다음 타깃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에 더해 전쟁에 분노하는 부부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을 한다. 직장이나 원가족이 그들의 의지와 엇박자를 낸대도 집회에 나가고, 난민을 집에 들이면서 말이다. 뉴스가 일상의 BGM이 된 이들에게 이 영화는 결코 남의 얘기만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남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