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독자들에게 낯선 이름일 수 있으나 김태엽 감독은 드라마 <화양연화> <멘탈코치 제갈길> <선재 업고 튀어> 등을 공동 연출한 베테랑이다. 수편의 단편영화를 찍은 경력의 그는 지난해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30주년 기념 옴니버스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에 참여하면서 오랜만에 영화로 복귀한 데 이어 농심 신라면 40주년 기념 제작 지원작 <라면이 떨어지면>을 완성했다.
“스태프들이 옹기종기 모여 만들어가는 가내수공업 같은 느낌”을 즐기며 촬영에 임했다는 김태엽 감독은 신라면 옆에 어린 남매를 불러들였다. 간밤에 캐리어를 끌고 사라진 엄마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는 동생을 향해, 오빠는 선반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저 라면 다 먹으면.” 가득 쌓여 있을 것만 같았던 봉지가 바닥날 때쯤, 두 사람 앞에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김태엽 감독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먼저 베푼 온기가 돌아오기를
김태엽 감독이 농심 신라면 40주년 기념 프로젝트를 제안받을 때 들은 조건은 두 가지였다. 신라면이 나올 것, 그리고 따뜻한 이야기를 할 것. 예전부터 태국 TV광고만의 극적인 감동 코드를 인상적으로 봐온 덕에 그와 비슷한 감성의 시나리오를 써보기로 했다. 김태엽 감독은 그 감성의 코어를 ‘선행’으로 봤다. “누군가가 베푼 은혜를 그 수혜자가 다시 갚는 스토리에 내 색깔을 섞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주인공에게 라면을 얻어먹은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라면을 보답한다는 로그라인이 탄생했다.
만화방 키즈가 사랑한 외계인
그렇다면 누가 라면을 베풀고 누가 보답하는 게 좋을까? 김태엽 감독은 ‘내 색깔’을 드러낼 소재부터 낙점했다. 그건 바로 외계인! 자신을 “외계인 애호가”라 칭한 김태엽 감독이 들뜬 목소리로 전했다. “만화방 키즈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균열을 좋아했다. 영화를 할 때는 늘 그런 식으로 불균질한 서사를 펼쳤다. <에어리언 블루스>(2009)라는 단편에서도 지구에 취업하러 온 외계인들을 그렸다. 당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콘텐츠는 <개구리 중사 케로로>다. <에어리언 블루스> 속 외계인들도 케론별 출신이다. 외계인이야말로 비현실의 대표주자라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외계인’과 ‘감동’이라는 키워드를 굴리다 <E.T.>를 떠올렸고, 외계인과 아이들을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 남매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게 김태엽 감독의 전언이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루길 바랐다. 그 적절한 공간을 고민하다가 가맥집 같은 지금의 장소를 연상했다.” 잘 관리되지 않은 창고처럼 보이던 곳이 어떻게 가족의 보금자리로 그려지는지는 영화를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동기 윤가은 감독의 한마디
외계인 역은 김태엽 감독과 스튜디오 좌뇌와 우뇌를 함께하고 있는 종합 예술가 김덥이 맡았다. 김태엽 감독이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다재다능하다”고 소개한 그는 배우이자 뮤지션이며 영상 연출 작업도 겸하고 있다. “외계인 한번 합시다!”라는 김태엽 감독의 전화에도 흔쾌히 응했다. 앞서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 속 단편 <30번 환생한 남자>에서도 광인 역을 소화한 만큼 김덥 배우는 이번에도 김태엽 감독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아닌 밤중에 외계인을 마주친 남매는 최시환 배우와 황봄이 배우가 연기했다. “10살 남자아이가 6살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일찍 철이 든 모습이 직관적으로 보이기를 바랐다. 최시환 배우의 얼굴은 그 짠하고 슬픈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달리 동생은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면 했다. 황봄이 배우에게서 딱 그런 인상을 받았다.” 캐스팅까지는 순조로웠다. 문제는 김태엽 감독이 어린이 연기 연출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영상원 동기이자 어린이 배우의 연기를 끌어내는 것으로는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는” 윤가은 감독에게 전화를 건 이유다. 윤가은 감독과 한 시간가량 통화하며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는 김태엽 감독이 덧붙였다. “통화를 마친 직후에는 자신감이 생겼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린이 배우들도 본질적으로는 성인 배우들과 같다는 윤가은 감독의 한마디가 큰 도움이 됐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웃음) <라면이 떨어지면>을 찍으며 윤가은 감독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커졌다!”
라면의 성을 쌓아라
<라면이 떨어지면>의 클라이맥스는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거대한 라면의 성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김덥 배우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외계인이 은혜 갚는 신에서 멋진 일이 벌어졌으면 하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김태엽 감독의 말에 김덥 배우가 “라면을 쌓아보는 게 어때?”라고 권한 것. 시각적으로도 효과적일 것 같아 제작사에 이 아이디어를 전달하자 농심의 지원이 돌아왔다. 김태엽 감독도 정확한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라면의 양은 약 3500봉. 촬영 전 라면을 쌓기 위해 김태엽 감독을 포함해 미술팀, 연출팀, 제작팀 10여명이 아침 9시부터 모였다. “홍합 가공공장에서 껍데기를 까는 노동자들처럼 둘러앉아 노동요도 부르면서 세 시간 동안 무수한 라면을 쌓았다. 촬영팀, 조명팀까지 거들어준 덕분에 해체는 금방 했다. 농심에서 라면을 회수하지 않은 덕분에 두당 신라면 한두 상자씩은 가져간 것 같다. 일한 만큼 나눠 먹은 기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