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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란다가 남자였어도 그런 평가를 받았을까요?”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과거와 현재, 안과 밖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디(앤 해서웨이)가 ‘런웨이’ 면접을 보러 뉴욕 거리를 바삐 뛰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2편 역시 분주한 뉴욕 거리를 걸어가는 앤디의 장면으로 문을 연다. 노점상에서는 두개의 파란 벨트를 들어올리며 판매 중이다. 맞다, 바로 그 세룰리안 블루의 벨트다. 탐사보도로 저널리즘상을 받는 기자가 됐지만, 시상식 도중 앤디와 동료들은 모두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는다. 앤디는 수상 소감 대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방금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은 지켜내야만 합니다!” 이 영상은 곧 쇼츠로 퍼진다. 소신껏 발로 뛰는 기자도 고용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다. 해고와 노동 이슈로 SNS에서 집중포화를 맞고 있던 ‘런웨이’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앤디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신문사에 재직 중이던 앤디도, 종이 잡지 편집장인 미란다(메릴 스트리프)도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생존’하기 위해 안 하던 일, 혹은 절대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한다.

속편 제작을 결심한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과 각본가 엘린 브로시 매케나가 꼽은 제작 배경에는 인쇄매체와 저널리즘의 쇠퇴가 있다. 인쇄매체가 여전히 미디어 업계의 권위를 쥐고 있었다면, 이들은 후속작을 만들 명분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종이 잡지를 만들며, 또 이 글 역시 종이 잡지에 실림에도 이런 글을 쓰는 건 역시 서글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양 산업이라는 진단과 함께 생존을 위한 ‘다음 먹거리’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지 10년이 넘었다. 경영진의 다급한 전체 회의마다 야심차게 호명되던 (신 사업)은 웹진, 온라인 매체, SNS 활성화, 유튜브 채널 확장, 인스타 매거진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등장했다. 유망 미디어 예측은 계속 바뀌었고 인쇄매체는 그 괄호의 자리를 끝내 채우지 못했다.

한때 장르 비하의 뉘앙스를 담았던 칙릿(젊은 여성을 뜻하는 속어와 문학의 합성어, Chick Lit)은 워킹걸 장르 등으로 세밀화되었는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바로 이 장르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칙릿 하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섹스 앤 더 시티>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 두 작품에 비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일’의 비중이 훨씬 크다. 1편에서 앤디는 안정적인 남자 친구 네이트(에이드리언 그레니어)와 동거 중이고, 애정 전선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적다. 물론 앤디의 마음을 잠시 흔드는 메기남 크리스천 톰슨(사이먼 베이커)도 등장하지만, 이 캐릭터는 팬들이 가장 얄미워하는 인물로 남았다. 2편에는 앤디의 남자 친구였던 네이트 캐릭터는 소거되어 있다. 더구나 1편을 돌아보면, 앤디는 네이트보다 미란다를 더 사랑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네이트와 함께라도 미란다가 부르면 바로 달려나갔으며 집에 와서도 머릿속엔 미란다, 미란다뿐이었으니 말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1편이 만약 소설과 같이 미란다와 앤디의 관계를 단순히 갑을로 그리며 미란다를 공공의 적으로 묘사했다면 이 영화가 이토록 오래 사랑받진 못했을 것이다. 1, 2편의 각본을 쓴 엘린 브로시 매케나가 인정했듯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두 여자의 러브 스토리에 가깝다. 미란다를 대하는 앤디의 태도는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미란다의 세계, 그중에서도 패션에 대해 무감하던 앤디는 세룰리안 블루에 대해 통렬하게 혼나고 난 후 자신이 이 세계를 그저 거쳐가는 단계로 여기고 어설피 대해선 안된다고 깨닫는다. 앤디가 영화 내내 갈구하는 것은 미란다의 인정이다. 앤디의 ‘썸남’ 크리스천은 미란다에 대해 악명 높은 사디스트 마녀라고 험담한다. 앤디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무려 미출간 <해리 포터> 신간 원고를 구해준다!), 이성적 호감을 가진 남자임에도 앤디는 크리스천에게 단호하게 대답한다. “미란다가 남자였어도 그런 평가를 받았을까요?”

미란다에 대한 메릴 스트리프의 해석도 다르지 않았다. 원작 소설을 읽은 그는 “이 책을 보면 지도자 위치에 있는 여성에게 바라는 시선의 문제점을 알 수 있어요. 여성 리더들에게는 끊임없는 이해심을 바라죠. 남성 리더들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도 하지 않아요.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는 애나 윈투어가 더 많이 웃고 더 상냥하고 더 사랑스럽게 행동하길 기대한다는 거예요. 여성이라면 당연히 상냥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퀸 메릴>, 에린 칼슨 지음) 메릴 스트리프는 미란다가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 인물의 카리스마를 드러내는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화보 촬영 모델의 벨트를 고르는 장면, 직원들의 기획안이 마음에 안 들 때 무안을 주는 장면에 공을 들인 이유다. 예의 세룰리안 블루 장면 역시 스트리프의 제안으로 더 길어졌다. 스트리프는 그 장면에서 미란다가 앤디에게 패션 산업에 대해 일러주는 대사가 더 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은 일에 대한 미란다의 애정과 전문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능력과 정무적 감각, 자기 일에 매진하는 모습이 인물을 완성한다고 본 것이다. 비서에 대한 배려와 부드러운 말씨는 없을지 몰라도, 미란다는 결국 일을 ‘되게’ 하는 사람이다.

<섹스 앤 더 시티> <브리짓 존스의 일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여러 공통점을 지니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 작품의 여주인공이 모두 출판업에 종사한다는 점이다. 캐리는 작가, 브리짓은 출판사 직원, 앤디는 패션 잡지의 비서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프로듀서 대런 스타가 만든 넷플릭스 <영거>의 주인공 라이자 밀러 역시 출판사에 근무한다. 왜 이 장르의 여성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미디어 업계에서 일하는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저 에밀리가 아니라 이 에밀리가 파리에 갔어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저 에밀리는 <에밀리, 파리에 가다>의 에밀리(릴리 콜린스)이고, 이 에밀리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에밀리(에밀리 블런트)이다. 회사에서 고난이 닥칠 때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를 세번 되뇌며 눈물을 꾹 참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에밀리의 파리행을 응원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에밀리, 파리에 가다>의 에밀리는 홍보 회사에 근무하며 SNS를 적극 활용하는 인물로, 미디어 업계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이처럼 주인공들이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이 작품들에는 자연스럽게 미디어의 흥망성쇠가 배경으로 깔린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는 후속작 <앤 저스트 라이크 댓: 섹스 앤 더 시티>에서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신간 홍보를 위해 인플루언서 라이브 방송에도 나가는데 그 팟캐스트마저 광고가 끊겨 폐지된다. 그럼 뭐 어떤가. 캐리야 어차피 먹고사는 걱정을 하는 캐릭터가 아니니 상관없다. 캐리는 새 시리즈에서 남편 빅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허드슨강이 보이는 새 아파트를 매입하고도 집이 썩 맘에 들지 않는 것이 고민이다. 반면 먹고살 걱정에 40대임에도 20대라고 속여 출판사 비서로 취직한 <영거>의 라이자가 다니는 출판사야말로 진짜 불황에 휘청인다. 대형 출판사임에도 책 판매량이 줄어 IT 업계 억만장자의 투자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시인을 발굴하겠다는 에디터들에게 IT 억만장자는 “요즘 시는 비욘세가 와도 못 띄우니, 유명 유튜버의 책을 내라”고 단언한다.

비교적 최근작인 <에밀리, 파리에 가다>와 <영거>는 모두 주인공이 연애보다 자신의 일에 더 비중을 두고 삶을 이어가고, 여성의 동료애(워맨스)를 더 짙게 그린다. 에밀리에게는 민디(애슐리 박), 라이자에게는 켈시(힐러리 더프)와의 우정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이 장르의 한계는 여기서도 명확하다. 주인공을 제아무리 평범한 여성이라고 내세우며 그가 먹고사니즘에 집중하는 것으로 설정해도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줘야 하니 캐릭터 설정을 자주 배반한다. 주인공을 빛나게 하기 위해 주변 여성 조연을 도식적인 악녀로 등장시키기도 하고, 연애 서사를 억지로 만들어내기 위해 총명하던 주인공이 개연성 없는 일을 벌이기도 한다. 또한 이들은 일을 사랑하고 성과를 냈을 때 큰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직책이나 연봉 인상에는 놀랍도록 미련이 없다. 마치 여자주인공은 야망을 드러내면 안된다, 는 불문율이라도 있는 듯 자신의 모든 시간을 쏟아 이뤄낸 성과를 동료에게 쉽게 양보하고 씩씩하게 다음 일을 향해 미소 짓는다. 게다가 이들은 연애만 시작하면 일할 때 보였던 빛나는 지성이 사라지고, 반복적으로 멍청한 선택을 한다.

다 좋다. 어차피 위에 언급된 모든 영화의 목록은 기분 좋은 현실도피용이다. 아, 어쩌면 올드 미디어라 불리는 종이책을 여전히 사랑해서 출판사 인턴이라도 하려는 선택, 책이 안 팔리니 이제 다른 일을 해보자는 주변의 조언을 무시하고 계속 책을 쓰려는 미련, 종이 잡지는 아무도 안 본다는 말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이 전통적인 매체를 선택해줄 거라는 믿음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이들의 ‘멍청한 선택’이려나. (울지마, 바보야~) 물론 이건 내 이야기는 아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개봉에 맞춰 내한한 배우들이 종이 잡지 인터뷰 대신 유튜브 채널에만 잔뜩 출연하고 떠난 현실이야말로 미디어의 격변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