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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온화하고 무해한 이미지로 방어하기 – 이병현 평론가의 <마이클>

밥상 위에 히트곡이 너무 많아 접시를 비우기도 전에 다음 곡이 밀려온다. 영화 <마이클>은 127분의 러닝타임 중 절반가량을 노래로 채운 ‘히트곡 메들리’다. 놀라운 건 1988년까지만 다루면서도 <Man in the Mirror> <Smooth Criminal> <Rock with You> 등 수많은 대표곡을 미처 담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팝의 제왕이라는 수식어는 이것만으로도 완벽히 증명된다.

영화의 맹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어떻게 이 위대한 노래보다 더 위대한 삶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 노래를 만든 장본인의 삶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앤트완 퓨콰 감독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정면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영화는 춤과 노래를 담는 데만 전심전력을 다한다. <마이클>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영화적 리듬이 뛰어나서라기보다 플레이리스트가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전반부까지는 비교적 잘 작동한다. 서사적으로 아버지 조 잭슨이라는 명확한 적대자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조 잭슨은 어린 마이클에게 공포와 수치심을 심어주는 인물이다. 아버지에게 위축된 소년이 그 심리 상태를 극복하고, 마침내 슈퍼스타로서 타인에게 빛을 전달하는 운명을 성취하는 것이 영화의 큰 줄기다. 아버지를 팩스로 해고하고 <Off the Wall>과 <Thriller>로 달려가는 구간에서 영화는 분명한 쾌감을 준다. 그러나 이후 이야기는 다시 조가 마이클을 괴롭게 하고, 마이클이 또 탈출구를 찾고, 한번 더 무대 위에서 승리하는 식으로 반복된다. 바뀐 것은 배경음악뿐이다. 그 음악이 아무리 세기의 명곡이어도, 이미 본 이야기가 반복되면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다. <Thriller> 뮤직비디오를 찍은 직후 CBS 레코드를 찾아가 MTV에 <Billie Jean>을 틀어 달라고 강짜를 놓는 장면도 각본의 허술함을 드러낸다. <Billie Jean>뮤직비디오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유명세를 참작해도, 영화만 놓고 보면 전개가 매끄럽지 않다. 직전에는 <Thriller> 뮤직비디오를 찍고, 직후에는 <Billie Jean> 뮤직비디오가 아닌 모타운 25주년 특별 공연이 이어지는데, 결국 이야기가 인물의 내면이 아니라 관객이 기억하는 한 아이콘의 상징적 순간을 중심으로 억지로 꿰어맞춰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가 마이클 잭슨을 신화화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마이클>에서 아버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변 인물은 희한할 정도로 사람들이 좋다. 프로듀서, 경호원, 매니저, 가족 대부분이 마이클을 이해하고 아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선량한 조력자의 실제 기여는 축소된다. 베리 골디나 퀸시 존스 같은 인물은 좋은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그들이 음악적으로 무엇을 해냈는지는 스쳐 지나간다. 그 결과 마이클 잭슨은 홀로 모든 걸 창조한 독보적 천재로 추켜올려진다. 물론 그는 천재였다. 그러나 위대한 대중음악은 천재 혼자 만들지 않는다. 이 영화는 모든 이를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그 모두를 터무니없이 깎아내리고 있다. 이는 주인공인 마이클 잭슨을 묘사할 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문제다. 현지 언론이나 평단의 지적과 달리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아동 성추행 논란을 단순히 생략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마이클>은 이미 그 논란에 대해 충분히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다만 동화와 멜로드라마의 언어로 말할 뿐이다.

영화 속 마이클은 성인이 아니다. 적어도 영화는 그를 온전한 성인으로 다루려 하지 않는다.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 앞에서 얼어붙은 소년이고,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고전 할리우드, 호러영화를 사랑하는 영화광이며, 형제가 농구할 때 트위스터 같은 놀이에 더 편안함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는 여성과 관계를 맺기보다 쥐, 말, 원숭이 같은 동물을 돌보는 데 더 애착을 보인다. <피터 팬> 그림책을 보며 피터 팬의 그림자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암 병동에 있는 아이들에게 인형을 선물하고, 곧 죽을지도 모를 아이들 앞에서 가장 편안해 보인다. 이 모든 장면은 ‘그는 순진무구했다’는 결론을 향해 쌓인다. 그리고 이 순수성에 대한 강조는 단순한 캐릭터 묘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방어논다. 마이클 잭슨이 2003년 다큐멘터리 <마이클 잭슨과 함께 살기>에서 언급했던 ‘혈연관계가 아닌 아이와 같은 침실에서 자는 일’은 성적 접촉 유무와 별개로 성인으로서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마이클>이 쌓은 세계 안에서라면, 그런 행동조차 ‘상처 입은 소년이 아이들과 있을 때만 비로소 안전함을 느꼈다’는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유무죄의 판정 이전에, 영화는 마이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인성 자체를 제거한다. 이것은 면죄부를 주기 위한 퇴행적이고도 모욕적인 묘사다. 영화는 세 자녀를 둔 한 아버지이자 걸어다니는 금융제국인 마이클 잭슨을 복잡한 욕망과 판단력을 지닌 성인 남자로 다루지 않는다. 그를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멈춰버린 아이, ‘리틀 트램프’와 같은 성스러운 바보, 네버랜드의 피터 팬으로 만든다. 영화는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기 위해, 그에게 금치산자 선고를 내린다.

CBS 레코드 회사 앞 자동차 장면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마이클은 팬들의 환호에 답하듯 자동차 위로 올라가 손을 흔든다. 실제로 생전에 마이클 잭슨은 여러 차례 군중 앞에서 자동차 위로 올라가 인사하는 행동을 했다. 복장의 유사성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환기되는 것은 1990년 런던 마담 투소 방문 당시 장면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미지는 2004년 1월, 아동 성추행 혐의 기소 당일 법원 출석 뒤 SUV 위에 올라 팬 앞에서 춤을 추고 손을 흔들었던 장면을 강하게 연상시키기도 한다. 마이클 잭슨의 공적 이미지에 새겨진 논쟁적 제스처가 이 영화 안에서는 오직 팬서비스와 승리의 몸짓으로만 재맥락화된다.

따라서 <마이클>의 진짜 문제는 무엇을 생략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준비했느냐에 있다. 이 영화는 후반부 논란을 다루지 않지만, 그 논란을 해석할 틀을 이미 제공했다. 그것은 “마이클은 순수했다”는 틀이다. 아마 2편이 만들어진다 해도 억울한 슈퍼스타가 언론과 탐욕스러운 주변 인물, 왜곡된 대중의 시선에 희생되는 이야기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1편이 이미 그 토대를 마련해두어서다. 그러나 바로 그 순수성의 과잉이 영화 속 ‘마이클’을 불신하게 만든다. 인간은 순수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마이클 잭슨처럼 거대한 권력과 상처, 천재성과 기괴함, 음악적 혁신과 윤리적 의혹이 한몸 안에서 충돌한 인물은 더더욱 그렇다. 좋은 전기영화라면 노래 사이의 침묵, 조명 밖의 얼굴, 환호가 끝난 뒤의 불편한 공기를 견뎌야 한다. 이 영화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음악이 멈추려 할 때마다 다음 히트곡을 재생하고, 성인이 등장하려 할 때마다 피터 팬을 불러낸다. 이 잔치에는 먹을 것만 너무 많다. 그리고 그 과식 끝에서, 우리는 이상한 허기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