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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시간이 남긴 무늬 - 해악이 만연한 시대 1977년은 어떻게 2026년에 도래했나

주유소 앞마당에 버려진 시체 한구. 종이 박스로 대충 가려진 주검은 고약한 악취와 파리 떼로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구는 주인장은 노란색 폴크스바겐 비틀의 주인인 마르셀루(와그네르 모라)에게 능청스럽게 말한다. “걱정 마요, 손님은 상관없으니까. 아셨죠?” 하지만 정말 상관없는 걸까. 마침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온 경찰은 시신이 아닌 마르셀루에게 관심을 보인다. 신분증을 보여달라, 소화기를 꺼내달라, 차에서 내려달라. 그리고 약간의 금전적 여유가 있다면 자기들 경찰 카니발 기금에 기부 좀 해달라. 치안이나 안전보다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혈안인 경찰의 얼굴은 길 위에 방치돼 들개들에게 잡아먹히는 시체의 사정을 역설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비상식적인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이곳은 브라질 북동쪽의 도시 헤시피. 해악이 만연한 시대, 1977년이다. 브라질에서 흘러가는 1970년대 후반이란 어떤 시기인가. 군사독재로 숨통이 조여오는 암흑기. 통제 완화와 개방을 향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와중에 군경의 비인권적 지시가 일상의 여기저기를 맴돌고, 저항을 시도한 자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수난의 시대다. 지난 주말부터 시작됐다는 카니발의 흥겨운 분위기조차 차마 가리지 못한 음습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헤시피 곳곳에서 툭 튀어져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축제가 한창일 때 상어에게 잡아먹힌 인간의 다리가 발견되면서 온 동네 사람들의 이목은 그곳에 집중돼 있다. 이 다리의 주인은 누구이고, 어떻게 상어의 제물이 되었나. 무자비하게 버림받은 주유소 앞 시체와 고깃덩어리처럼 해체돼버린 다리 한쪽. <시크릿 에이전트>는 찝찝하고 꺼림칙하게 헤시피를 소개한다.

노란 비틀은 임시 목적지인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도나 세바스치아나(타니아 마리아)가 꾸리고 운영하는 피난민 공동주거 공간이다.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빌라촌에는 독재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친 마르셀루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앙골라 내전 등 포르투갈어권 아프리카 전쟁의 난민까지 발붙여 지낸다. 단, 다른 누군가의 이름 아래 제2의 가짜 신분으로 가장한 채로. 도나의 공간은 단순한 배경지가 아니다. 이곳은 독재가 만들어낸 사회적 난민의 임시 공동체이자 국가가 지워버린 피해자를 보존하는 장소다.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 속에 서로를 의지하고, 어느덧 자신의 진짜 이름을 고백하면서 각자 숨겨둔 마음의 한 자락을 내놓는다. 난세를 딛고 선 정서적 유토피아. 동시에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가장 모순적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마르셀루는 결국 도나의 도움으로 신원확인소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그는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실제 사건들, 진짜 살아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가까이서 목격한다. 공동 주거지의 구성원들은 누구보다 투명하게 서로를 이해하지만 사실상 기본적인 신원조차 모두 거짓이고, 자신을 다른 신분으로 피난시킨 마르셀루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신원을 증명하는 일을 한다. 게다가 오래전 죽은 아내를 여전히 그리워한다던 그는 싱글 맘 클라우디아(에르밀라 게지스)와 장난스러운 잠자리를 갖고, 거처를 이주한 난민들은 자기 스스로를 난민이라고 칭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듣는다. 어쩐지 이곳에선 모든 것이 모순적이다. 마르셀루가 공동 주거지에 처음 온 날 집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두 얼굴을 지닌 샴쌍둥이 고양이 라이자와 일리스인 것도 이 모순을 일종의 운명처럼 짚어낸다. 빛과 그림자. 흑과 백. 진짜 이름과 가짜 신분. 정의로움과 우스꽝스러움. 머리가 둘 달린 고양이처럼 영화는 서로 다른 곳을 ‘동시에’ 바라본다.

중요한 건 1977년의 기억이다. 구체적인 시간선을 명시한 영화는 엄혹한 시대를 통과하는 여러 인물을 정지시켜 기록한다. 세 챕터로 구성된 <시크릿 에이전트>는 정치 스릴러이자 수사극, 기괴한 B 무비적 활기를 리드미컬하게 끌고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타임머신을 타고 2025년 한가운데로 도달해버린다. 독재 피해자를 돕는 에우자(마리아 페르난다 칸지두)와 마르셀루의 대화가 녹음된 테이프를 분석하는 현대 연구자 플라비아(라우라 루페스쿠)의 모습이 화면 정중앙에 소환되는 것이다. 최신식 컴퓨터와 형광등 색깔,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까지 정확히 2025년의 그것이다. 그 순간 지금까지 펼쳐진 영화 속 이야기는 마르셀루 개인의 일화가 아닌 역사의 중심으로, 잊힌 과거가 아닌 정치적 증명으로 단번에 확장된다. ‘시간이 흐른다’는 명제만큼 당연한 일도 없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마치 1977년이 기어이 2025년이 되는 것을 일종의 반전처럼 풀이한다. 다시 말해 현재가 다루지 않는 과거란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회색지대라는 것을. 역사란 오직 현재의 재구성이 있어야만 아카이브와 기억으로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의 인장처럼 담아낸 것이다. <시크릿 에이전트>는 계속해서 묻는다. 과거란 도대체 언제 끝나는가. 지난 전쟁의 상흔을 나이테처럼 안고 있는 한스(우도 키어)의 몸, 상어에 물려 죽은 인간과 영화 <죠스>를 교차시키는 극장가, 헤시피의 부도덕을 반복해 질타하는 신원확인소 사람들. 역사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록, 소문, 사물, 장소, 소리에 남는 것이라고 영화는 계속해 말한다. 작품 내 모든 핵심 인물과 사건이 모여드는 공동 주거지의 창조자 도나의 인물 정보 또한 이를 입증한다. 1900년생이라는 그의 설정.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의 반란과 저항, 폭력과 부조리, 피난과 연대의 어귀를 정면으로 돌파한 그는 과거를 목격한 산증인이다. 1977년을 살아가는 77살의 노인. 그리고 마침내 그가 오랫동안 보존한 공동체의 성문은 21세기의 관객에게 가닿고야 만다.

다만 그것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2025년, 마르셀루의 아들 페르난두를 만난 플라비아가 말한다. 기록 사본을 당신에게 돌려주겠노라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여기에 저장돼 있다고. 한참을 망설이던 페르난두가 답한다. “솔직히 아버지의 기억이 안 나요.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로 기억을 만들어낸달까요. 당신이 나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기억해요.” 기억은 어떻게 소생하는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의향과 의지가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시간의 무늬를 이어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