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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집요하고 정확하게 - <호프> 배우 황정민

※ <호프>의 중후반 내용에 대한 묘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곡성> 이후 <호프>로 나홍진 감독과 재회하기까지 10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일 정도로 황정민은 쉬지 않고 변신해왔다. 부패한 시장부터 피랍된 국민을 구해야 하는 외교관, 군사 반란의 우두머리까지, 그가 분한 캐릭터 중 강렬하지 않은 인물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번 <호프>에서 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강도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나홍진 감독이 인간 대 인간의갈등이 아닌, 인간과 거대한 외계인이 충돌하는 곳으로 그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호포항에서 그는 압도적 힘의 우위를 지닌 존재로부터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낱 인간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역 주민을 구하겠다는 책임감을 놓지 않는경찰 공무원, 고강도 폭력에 죄책감을느끼는 윤리적 단독자로 시시각각 변한다. 그는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일뿐 아니라 한 작품 안에서도 다면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연기자가 되었다. 집요하고 정확하게 호포항의 출장소장 범석을 구현한 황정민 배우를 만났다.

- 칸영화제 이후로 오늘 다시 영화를 보았는데 어땠나.

정신이 없어서 칸에서는 영화를 제대로 못 봤다. 칸에서는 영화에 영어와 불어 자막이 동시에 나온다. 자막이 화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몰입하기 어려웠는데 오늘은 자막 없이 보니까 괜찮았다.

- 8년 전 나홍진 감독과 함께 준비했던 영화가 잘 되지 않았다. 나 감독이 새 영화 <호프> 시나리오를 건네기 전까지 감독에게 물어보거나 요구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새롭게 준비할 영화가 어떤 장르일지 전혀 몰랐고 나홍진 감독이 알아서 시나리오를 잘 쓰겠거니 여겼다. 믿음이 있으니까 따로 전화를 걸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나홍진 감독의 시나리오를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 감독의 시나리오는 설명적이지 않고 짤막짤막하면서도 여백이 많다. 꼭 시 같다.

- 그렇게 말없이 기다려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호프>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어떤 마음으로 읽었나.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SF 장르영화라고 하니까 더 궁금했다. 긴 이야기를 담은 두꺼운 시나리오를 신기해하면서 읽었는데 그 안에 담긴 서사가 참 좋았다. 한편으로는 “(영화화) 가능한 이야기야?”라며 놀랐다.

- 다작하는 배우이지만 SF 장르영화는 <호프>가 처음이다.

맞다. 한국의 배우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 나홍진 감독이 호포항의 출장소장 범석 역에 황정민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혔다.

아마 <곡성>을 연출하면서 나홍진 감독이 나에 대한 믿음이 커졌던 것 같다. 일광(황정민)을 연출자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연기해서 나에겐 어떤 역할을 맡겨도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쓸 때도 범석을 연기할 배우로 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시나리오를 받아보니 범석 대사에 욕밖에 없네? (웃음)

- 관객으로서는 꼭 10년 만에 나홍진, 황정민의 조합을 보게 되었다. 촬영장에서 나홍진 감독을 다시 만났을 때 어땠나. 첫 촬영 날을 기억하는가.

나야 너무 좋았지. 첫 촬영은 루마니아 숲속 신이었다. 내가 유탄발사기로 외계인을 겨누는 신이었다. 3년 전에 촬영해서 먼 이야기 같지만 기억난다.

- <곡성>과 <호프> 사이에 <아수라> <공작> <교섭>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인질> <서울의 봄> <수리남> 등 14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장르나 문법은 다르지만 캐릭터간의 호흡이 중요한 영화들이었다. 반면 <호프>는 외계인과 마주하는 중요한 순간에 오롯이 배우의 상상력만으로 연기해야 했다. 외계인으로 인해 무전기를 잡은 손이 떨리고, 다리가 떨리는 등의 리액션 연기는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

시나리오에 몸의 움직임, 소리의 강도가 수치로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내가 표현한 공포의 최고조는 외계인과 처음 대면하는 신이다. 그 순간을 100%로 두고 나머지 신들은 몇 퍼센트의 공포와 떨림인지 역산한 수치였다.

- 범석은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마을 주민들과 짧게 여러 호흡을 주고받는다. 마을 청년들과 있을 때 범석은 “행님”이지만 어르신들과 있을 때는 “애”가 된다.

한 마을의 출장소장이면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다. 범석은 마을 청년 성기(조인성)와 육촌 사이인 걸로 보아 영화의 배경인 호포는 집성촌이다. 그렇다면 마을 내 어르신들도 범석 아버지의 친척일 수 있다. 그러니까 범석은 마을 주민들을 경찰 대 시민으로 딱딱하게 대할 수 없다. 나는 7~8살 때 마산시 내에서도 진동리라는 전체 30~40가구쯤 되는 시골 마을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런 작은 마을의 정서를 잘 안다.

- 범석은 선배 경찰로서 질주하는 순경 성애(정호연)를 자제시키기도 한다. 분노로 질주하는 성애와 달리 범석은 왜 멈칫했을까.

범석이 외계인이 흘린 눈물을 보게 되면서 그 순간 동질감을 느꼈던 장면의 의미가 크다. 그 순간 내가 표현하는 얼굴도 배우로서 정말 중요한 얼굴이었다. 범석은 서로 입장의 차이가 있을 뿐 ‘저 친구들(외계인)이 살려고 하는 행동이구나’라는 동질감을 느낀다.

- 그 중요한 장면을 어떻게 연기했나. 대상 없이 테니스공만 보고 연기했을 텐데.

카메라 옆에 박아놓은 테니스공을 보며 상상하면서 연기했다. 배우니까 해야지. 연기하고 그걸 다시 모니터로 보고 다시 연기하고…. 나도 그 순간 내가 짓는 표정이 어떠한지 잘 모르지만 알 듯 모를 듯한 눈빛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같은 장면을 찍었다. 감독의 오케이가 있었는데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몇번이나 계속 하겠다고 했다. 그 장면으로 인해 관객은 범석이 아닌 외계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었다.

- 범석에게 따라다니는 질문은 낙연 아저씨(이상희)가 첫 만남에서 일갈한 “놀랐다고 사람한테 총을 쏴?”라는 딜레마다. 범석은 그 윤리적 딜레마를 가장 먼저 느끼고 가장 마지막까지 안고 가는 인물이다. 어쩌면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존재가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고픈 범석의 딜레마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그 지점이 이 영화에 깊이 박혀 있는 주제 의식이다. 구태여 우리가 먼저 끄집어내서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고,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느껴주었으면 한다. <호프>는 외계인과 싸우는 큰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작게 보면 지금 우리 지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과 맞닿아 있다.

- <호프>의 특징 중 하나는 이런 충격적인 일을 대낮을 배경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쾌청한 날씨를 위해서 기다리는 시간들도 있었을 듯하다.

영화 초반에는 날씨가 좋고 쾌청하다. 후반부에서는 해가 뜨면 안되고 구름이 가득 끼어 있어야 했다. 날씨 때문에 재촬영을 거듭했다. 특히 후반부 신을 합천군에서 찍을 때 완전 겨울이라 너무 추웠고 눈도 많이 와서 정말 애먹었다. 눈이 내리면 도로만 하얘지는 게 아니라 주변 산도 다 하얘진다. 며칠을 기다렸더니 다행히 비가 내려 눈이 녹으면서 주변 산에 쌓인 흰 눈을 CG로 지울 수 있을 정도가 되어 계속 촬영했던 기억이 난다.

- 영화 속 인물들이 많은 고초를 겪고도 밤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어디로든 향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관객으로서도 인물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하다. 이 영화의 열린 결말을 어떻게 보나.

말 그대로 열린 결말이다. 나홍진 감독의 작품에는 특유의 열린 결말과 비틀림이 있다. <곡성> 때는 출연한 나 자신도 그 결말이 답답했다. 하지만 관객들이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쾌감을 느꼈다. 물론 나 역시 답을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가 생각하지 못한 전혀 다른 논쟁을 벌이는 걸 지켜보는 게 재밌었다. 이번 작품도 분명히 논쟁거리가 될 터이니 열린 결말에 대한 해답을 오히려 관객들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나홍진 감독은 이번 작업에 대해 미련이 없고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이 프로젝트를 함께해온 황정민 배우는 어떠한가. 시원섭섭한가.

물론이다. 다만, 우리 배우들이 연기한 건 10%밖에 안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특히 SF 장르는 후반작업이 90%를 차지한다. 후반작업에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배우로서 촬영할 때 고되고 촬영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이후에 정말 많은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홍진 감독이 그 긴 여정에서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는 데 ‘엄지 척’을 해주고 싶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 나홍진 감독이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압도적인 존재인 외계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설명하지 않고 공백으로 두겠다고 했다. 배우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황정민이 느끼는 압도적인 두려움은 무엇일까.

너무 많다. 특히 나이를 먹으니까 두려운 게 더 많아진다. 요즘은 한국영화를 바라보는 선배의 입장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한국영화가 예전에는 정말 잘됐는데 지금은 좋은 시기가 아니다. 선배 세대로서 그에 관한 미안함과 두려움이 있다.

- 영화 막바지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대사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황정민 배우가 개인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같이 작업했던 영화인들, 가족들, 그리고 회사 식구들.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나를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몇 안된다. 그래서 더 고마움을 느낀다.

범석의 디테일

(황정민 배우의 신 중에서 나홍진 감독이 집요하게 매달린 장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글쎄, 내게는 딱히 그런 적 없었다. 다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 장면은 다르게 가야 한다고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며 감독과 이야기를 많이 나눈 장면은 있다. 예고편에도 공개된 아기 외계인을 목수 양배(음문석)가 보여주는 신이다. 그 장면에서 범석이 양배에게 감정을 폭발시킨다. 대본에 없는 감정과 애드리브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나는 그 신 이전과 이후의 범석이 다르다고 생각해서 나홍진 감독과 캐릭터의 감정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나홍진 감독이 내 생각을 많이 믿어주었다.”

사진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