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도 경이도 아닌, 판독 자체가 정지된 얼굴. 숲에서 외계인이 성기(조인성)를 향해 날아올 때의 클로즈업을 준비하면서,조인성은 “흑도 백도, 안도 밖도 없는 상태”라고 해석했다. 경험과 상상 바깥의 존재 앞에서 인간의 연산은 멈춘다. 깊은 산중에 잠입해‘험한 것’들의 진원지를 밝히는 수색자 인성기는 그렇게 단 한번 결정적으로 얼어붙었다가, 이후 단 한번도 쉬지 않고 내달린다. 소일거리를 찾아다니던 사냥꾼이 몇 번이고 내동댕이쳐지고 말과 자동차에 양발을 걸친 채 질주하게 할 정도로 <호프>의 하루는 지독하기 그지없다. <비열한 거리>의 병두로 스크린에 배우의 아우라를 새긴 지 꼭 20년이 되는 해, 조인성은 <휴민트>와 <가능한 사랑>의 고뇌하는 인물들 사이에 이 동물적인 청년을 세워두었다.
- 촬영 순서로 보면 <호프>를 찍고 <휴민트>, 이후에 <가능한 사랑>을 찍었다. <호프>에서 루마니아, <휴민트>에서 라트비아에 머물며 신체적으로도 혹독한 작업을 연달아 한 셈인데 그 시기를 어떻게 통과했나.
<모가디슈> 때 모로코 올로케이션을 경험한 게 도움이 됐다. 처음이어서 오는 힘듦이라는 게 있다. 한번 경험하고 나니 ‘이쯤 되면 이런 힘듦이 오지만 그건 곧 끝나기 마련’이라는 경험으로 직감하게 되니 견딜 수 있었다. 끝을 아는 자에게 생기는 평정심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듯이. (웃음)
- 나홍진 감독과는 첫 작업이었다. 격렬한 에너지와 집중을 요구하는 현장임을 익히 예상했겠지만, 그럼에도 막상 겪어보니 다른 점도 있던가.
나홍진 감독뿐만 아니라 류승완 감독, 이창동 감독 등 모두 영화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그래야만 그만한 역량의 작품이 나오더라. 그 과정을 강렬하게 끌고 가느냐, 뾰족하게 가느냐, 온화하게 가느냐 같은 표현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 에너지는 같다. 그런 현장일수록 어떤 면에서 배우가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심플하게, 주어진 것에 몰입하면서 그냥 한다. 분별심이 들면 오히려 괜한 괴로움을 끄집어내는 셈이 된다.
- 호포 마을을 이루는 남성들의 사회 계급도가 흥미롭게 읽힌다. 성기는 또래 무리 중 큰형으로 보이는데, 그 위엔 어촌계 ‘형님’들이 있는 식이다. 공동체 안에서 성기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나.
서열로 보자면 범석(황정민)이 제일 위에 있고, 그 아래 어촌계 형들, 그 밑에 성기와 일당들이 있는 구도다. 그러니까 성기는 마을 청년회의 리더 격이랄까. 그런 작은 단위의 존재다. <휴민트>의 조 과장이 정제된 책임감을 보여주어야 하는 남자였다면, 성기에게선 동네 친구들과 낄낄대는 소년성을 읽었다.
- 외계 함선을 발견하고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고민할 때, 성기가 “저거 다 돈 되는 거다”라고 말한다. 초현실적 사건 앞에서 인물이 세속과 맺는 끈을 보여주는 대사다.
그 대사는 시나리오엔 없었는데 현장에서 감독님과 이야기하며 만들었다.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 아니야. 저거 서울에 팔면 돈 받아, 인마” 같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어촌계 형들은 입는 옷이나 풍기는 분위기 면에서 여러모로 매끈하고 목에는 금붙이도 두르고 있다. 미지의 존재 앞에서 두렵고 긴장되는 한편 우리도 노력하면 저 형들처럼 더 멋진 차를 타고 더 잘살 수 있다는 성기의 욕망이 건드려지기도 했을 것 같다. 그런 양면이 공존하는 게 곧 인간이라고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 숲속에서 마베이요와 처음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의 클로즈업이 인상적이다. 범석이 외계인의 눈물을 목격하고 낯선 감각을 느끼듯이, 성기 역시 적이기 이전에 미지의 존재로서 그것과 눈을 맞추는 셈이다.
공들였던 장면이다. 숲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죽는다는 건 우리에게 데이터로 전해져 있다. 야생동물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니 일단 총을 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프>의 외계인은 내게 어떤 경험과 지식도 없는, 완벽한 미지의 영역이다. 저들이 날 공격하려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 무지가 만드는 지연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다. 흑과 백, 안과 밖이 없이 그저 ‘이건 뭐지’ 하고 멍하니 질문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고 봤다. 경계가 무너진, 혹은 경계가 사라진 채 대상을 바라보는 얼굴이었으면 했다.
- 변신한 마베이요가 성기를 추격하다가 물어뜯기 직전의 순간에 어촌계 인물이 백마를 타고 뒤에서 성기를 낚아채는 장면은 일찍이 포스터로 공개되었고 메이킹 티저가 풀리기도 했다. 그 밖에도 고강도의 신체적 헌신이 필요한 장면들이 많은데 나홍진 감독은 어떤 요구를 하던가.
감독님이 종종 현장에서 다가와 독려할 때 하는 말이 있었다. “꺾이지 말라”는 거였다. 한번 기세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건질 수 없으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 말을 되새기면서 기운이 꺾이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던 게 큰 에너지로 이어진 것 같다.
- 루마니아 숲에서의 촬영은 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나.
8월 말에 들어가 1, 2주간 적응 기간을 가졌다. 말 훈련을 하고, 헌팅한 장소에 A, B, C, D 네개의 스폿을 베이스로 두고 최종 리허설을 순서대로 진행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슛에 들어갔다. 단계별로 하나씩 성공시키면서 넘어갔고, 숲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제주도에서 찍은 뒤 도로 위에서 클라이맥스가 펼쳐지는 장면을 찍기 위해 합천으로 넘어갔다.
- 말 한쪽과 차 한쪽에 양발을 걸치고 달리는 도로 위 액션 시퀀스가 완성됐다. 상당 부분을 직접 소화했는데.
배우가 직접 소화한 원본이 좋을수록 그 안에서 VFX의 결과물도 잘 나온다. <무빙>에서 하늘을 나는 장면을 찍어보니 시작점과 착지점을 배우가 잘 연기해두어야 중간에 공중을 날아가는 동선을 VFX로 처리하는 것이 수월한 것이더라. <호프>의 경우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또 다른 게 사실이었다. 확실히 고강도의 액션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처음엔 어떻게 구현할지 막막했던 게 사실이다. 승마 연습을 꾸준히 하고, 현장에 상주하는 피지컬팀이 내 몸의 컨디션과 안전을 계속 세심히 살펴준 덕분에 소화해낼 수 있었다.
- 합천 촬영은 한겨울이었다고.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쯤이었는데 날씨가 정말 추웠다. 차에 매달려 촬영해야 하니까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다. 극 중에서 인물들이 달리는 다리 위 가드레일이 차 높이를 기준으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말을 탄 사람의 위치에서는 가드레일 너머 낭떠러지가 고스란히 보인다. 일종의 고소공포까지 이중으로 느끼면서 촬영했다. 바들바들 떨며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면 식당을 운영하는 마을 주민분들이 따뜻한 국물을 챙겨주곤 했다. 그분들이 지금도 생각난다.
- 저마다 홀린 듯 추동되는 <호프> 속 여러 인물 중에서도 성기가 뿜는 아드레날린은 남다르다. 아무리 내동댕이쳐져도 다시 일어나는, 불사조적인 면모가 있는데.
되살아난 성기가 겪는 고통을 단계별로 표현하려고 감독님과 노력했다. 처음엔 맞장도 떠보려 하고, 안되니까 허세도 나온다. 어차피 질 걸 알면서도 “안 아파, 덤벼, 이 개새끼야” 하고 지르고 보는 남자의 이상한 객기다. 장르적 톤이 중요했고 현실적이냐 아니냐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성기가 느끼는 아픔의 단계를 어떻게, 이 친구답게 표현할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나중에는 흙바닥의 풀때기를 쥐어 뜯으며 일어나려고 발악해본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괴수 앞에서 얼마나 미약한가. 풀이라도 잡고 싸우려는 그 덧없음, 나약함이 좋았다.
- 도망가는 와중에 감자도 먹는다.
살려고. 그 와중에도 배는 고프니까. 인간이 참 웃기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이 <호프>에도 적용되는 게 아닐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성기가 하나의 군상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다. <호프>의 유머라는 게 곧 이런 부분이기도 한 것 같다.
- 범석과 성애(정호연)에겐 직업적 의무가 있지만 성기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니는 책임감 반, 호기심 반으로 상황에 합류한 뒤 문자 그대로 걷잡을 수 없이 휩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휘되는 초인적인 힘의 원천을 배우 조인성은 무엇으로 해석했나.
인간이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힘의 상대를 만났을 때, 어차피 죽는 거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알리려는 것. 그렇게 부딪히고 떨어져도 살려고 하는 의지가 강렬하다면, 매번은 아니겠지만, 신이 기회를 한번 더 주실 수도 있지 않겠나.
성기의 디테일
“성기가 범석 일행과 합류해 벌인 전투 끝에 ‘한방’을 해내고 환호하는 장면이 있다. 시나리오에는 격렬한 기쁨으로 묘사돼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연기하는 순간에는 장면의 시작점에서 울컥하며 감정이 올라왔다. <호프>는 모두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이다. 성기의 입장에서는 숲속의 존재가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외계인인 줄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졸지에 친구들을 모두 잃었다. 성기에게 마침내 어떤 승리감 혹은 안도감이 찾아올 만한 시점에 지난 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칠 거라 생각하니 감정이 벅차올랐다. 사명감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전쟁에 나갔다가 혼자 살아돌아온 사람이 전쟁 영웅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성기로서는 뜻모르고 치른 일이라는 게 슬펐다. 환호의 순간, 성기가 회한에 젖어드는 찰나를 녹인 건 그래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