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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청량한 선의 - <호프> 배우 정호연

※ <호프>의 중후반 내용에 대한 묘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애(정호연)는 나홍진의 비극적 세계관에 떨어진, 낙관이란 이름의 변수다. <추격자> <황해> <곡성>까지, 피할 수 없는 악운을 품었던 나홍진 월드의 뼈대는 <호프>에서도 이어진다. 그러나 성애의 존재로 인해 <호프>는 한결 더 희망에 가까운 이야기로 완성됐다. 호포 출장소의 순경으로서, 소장 범석(황정민)의 부하로서, <호프>라는 세계의 희망으로서 성애는 유탄발사기를 장착한 M16을 어깨에 짊어지고 등장한다. 마을을 초토화한 외계인의 존재와 그로 인한누군가의 죽음을 “운명의 장난”이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희망과 인간의선의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애의 성정은 “인간이 선의를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진정한 비극일 것”이라 말하는 정호연의 마음과도 무척 비슷하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이례적 성취를 이룬 뒤, 자신과 똑 닮은 캐릭터로 첫 한국영화 출연작에 본인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 다른 미디어에서 보여준 평소의 모습과 성애의 성격이 꽤 비슷해 보인다.

좋은 점일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머리에 레이더를 세우고 다니는 편이다. 주위의 눈치를 많이 보고, 사회생활도 열심히 하려 하고, 어느 상황에서나 도움이 되려 노력하는 타입이다. 아마 첫째와 셋째 사이에 낀 둘째라서 그런가보다. (웃음) 성애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마을의 대소사를 다 챙기려 이래저래 부단히 움직이는 친구다.

- 성애의 특성이 대번에 드러나는 장면은 보건소 시퀀스였다. 다친 주민들을 치료하려 동분서주하면서도 마을 어르신들에게 아주 살가운 태도를 보여준다. 해술(임현식)의 다리가 크게 다친 것 같은데, “어머, 다리가 예쁘세요”라며 해사하게 다가가곤 한다.

성애라는 캐릭터를 정말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고, 연기적으로도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해술 아저씨랑 대화할 때를 세밀하게 보면, 초반에는 성애가 상대의 눈을 쳐다보질 않고 있다. 해술이 자기 이름을 잘못 부른다거나 이상한 말을 꺼내도 특별히 리액션하지 않는다. 성애는 어르신들의 장황한 이야기를 한두번 들어본 아이가 아니니까 이 상황이 익숙한 거다. 그러다가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을 때야 눈을 마주치기 시작한다. 이렇게 작은 디테일들을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놓치지 않으려 했다.

- <호프>의 주연들은 인간이 지닌 것들의 일부를 각각 담당하는데, 성애는 ‘선의’를 도맡고 있다. 떠올려보면 <오징어 게임>에서 연기했던 새벽이도 점차 사람의 선의를 알아가는 인물이었다. 배우의 결과 맞는 배역이 찾아오는 것일까.

스스로 메타인지를 잘하려고 노력하며 살긴 하지만, “감독님들이 제 이런 면을 보고 섭외하신 것 같아요!”라고 확신해서 말하기는 어렵겠다. (웃음) 어릴 때부터 정의감이 강한 쪽에 속했지만, 커가면서 내 선의나 정의의 기준만이 정답이 아니란 점을 느끼게 되고 삶을 허무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마침 전작인 <디스클레이머>에 이어 <호프>에서도 이러한 고민에 빠진 인물을 연기하게 된 터라, 혼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이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비극이되, 나 자신의 선의가 무엇인지도 늘 경계해야 한다”라는 결론이었다.

- 성애가 지닌 선의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주 크고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살아온 마을이 큰 사건 사고 없이 평화로운 것. 마을 사람들이 잔잔하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굳게 믿는 아이다. 그 믿음의 크기만큼 분노와 슬픔, 기쁨의 감정 표현도 적극적이다. 덕분에 맞는 건 맞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시원시원한 캐릭터가 탄생한 것 같다.

- <오징어 게임> 때는 새벽이의 입장에서 일기를 쓰며 캐릭터의 서브텍스트를 구축했었다. 성애를 준비하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쳤나.

이번엔 일기라기보다 업무 일지에 가까운 걸 쓰게 됐다. <호프>가 어떤 시대를 특정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1980년대쯤 최대한 비슷한 환경에서 근무하셨을 여성 경찰분을 직접 뵙고 인터뷰하면서 당시 경찰의 일과와 업무를 습득했다. 실제로 M16으로 훈련했다는 사실, 체육 특기생 등 일부 경찰들은 유탄을 다루는 특수 훈련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 등도 배우게 됐다. 성애의 액션이 마냥 비현실적인 설정이 아님을 알고 나니까, 더 거리낌없이 준비하고 연기할 수 있었다. 액션신을 소화하기 위해서 총기 숙달, 웨이트트레이닝, 운전 연습 등 물리적인 훈련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렇게 일과표를 작성하면서 캐릭터의 외적인 측면을 다잡고 난 뒤에는, 성애의 내부로 더 파고들어갔다. 다른 주민들과 성애의 관계성을 정리해보기도 했다. 성애에게 해술 아저씨는 어떤 존재일까, 양배(음문석)의 정체를 알았을까, 낙연(이상희)은 원래 주민일까 이사 온 사람일까 등등을 나름대로 고심했다.

- 가장 자주 붙어다니는 소장 범석과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했나.

기자간담회에서 황정민 선배님의 욕설 연기를 많이 참고했다고 말했는데, 정말로 농담이 아니다. (웃음) 성애가 범석과 지내는 시간이 길 테니, 자연스럽게 범석의 말투를 배웠을 것이고 욕설의 뉘앙스나 톤도 비슷해졌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황정민 선배님이 전작에서 욕설 연기를 자주 하셨기에, 그 작품들을 보면서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호프> 찍으면서 욕설이 너무 입에 붙은 나머지, 평소에도 욕을 자주 쓰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었다…. 고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 지금은 완치됐는지.

글쎄. 아직 한 10%는 남아 있는 것 같다. (웃음) 아, 범석과의 관계성을 더 설명한다면 기본적으론 서로에 대한 신의가 두터운 관계라고 생각했다. 다만 성애는 범석을 착하고 정이 깊지만 부족함도 많은 소장이라고 여긴다. 범석이 마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담당한다면 실무는 성애가 다 보는 느낌이랄까. 초반에 범석이 죽은 소를 발견한 일도 본격적으로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기보다 성기(조인성)와 동네에 마실 나갔다가 엮이게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전으로 대화할 때 성애가 시큰둥하게 듣고 답하고 만다. 성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판단내리지 못했다. 뭐, 영화 초반까지는 동네에 무리 지어다니는 사고뭉치 오빠 중 하나로 여기고 특별히 생각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함께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뭔가 짧게나마 깊은 감정을 느꼈을 것 같기도 하고….

- 초반부의 무전 이후, 본격적인 첫 등장까지 성애가 나오지 않은 공백이 있다. 얼굴에 피와 흙이 묻어 있는 것을 보니 범석과 합류하기 전에도 나름의 전투를 치른 것 같은데.

그 공백에 대해서도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성애의 성격상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신고에 가만히 있진 않았을 거다. 창고에 있는 온갖 무기를 모아서 전투 준비에 나섰을 테고, 중간중간에 주민들을 구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이 다치진 않았겠지만, 여기저기에 쓸리고 까지는 정도의 부상을 입었겠다는 설정으로 분장을 조절했다.

- 첫 등장부터 고난도의 액션 연기를 보여줬고, 아주 매끄러운 경찰차 드리프트가 특히 백미였다. 훈련 과정은 어땠나.

수동 면허를 따고 바로 드리프트 훈련에 돌입했는데, 차량마다 클러치 감도가 다르다 보니 도로 연습에서 자꾸만 시동을 꺼트리곤 했다. 2시간 동안 수많은 실패를 거친 뒤에 너무 우울한 상태로 <호프>팀을 만났다. 알리시아(조르 역을 맡은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편집자)가 한국에 온 날이었는데, 내가 너무 시무룩하게 있으니까 왜 그러냐고 묻더라. “시동이 자꾸 꺼진다. 너무 무섭고,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울먹였다. 그랬더니 알리시아가 예전 경험을 말해주면서 “절대 연기를 무서움이라는 감정으로 접근하면 안돼. 한 사람이 한 인생을 산다면 웬만하면 못해볼 체험을 배우이기에 누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임해. 네가 또 언제 총을 쏴보고 드리프트도 해보겠니”라고 조언해줬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훈련과 연습이 다 재밌어졌고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 드리프트도 더 잘 풀렸다. (웃음)

- 그 즐거움과 밝음이 성애라는 캐릭터에도 고스란히 스며든 것 같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고 꽤 비관적인 이야기인데, <호프>의 분위기는 왠지 낙천적이다. 이 기조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성애라고 느꼈다. 영화의 전반적인 성질을 완전히 주도하는 캐릭터였다.

그런 역할로 느껴졌다면 정말 다행이다. 감독님이 해줬던 말씀 중에서 가장 기분 좋았던 게 “호연이가 나오면, 성애가 나오면 아주 사이다 같아! 청량해! 영화가 청량해져!”라는 거였다. (웃음) 그런 성애의 매력이 결과물에도 잘 드러날지 요 며칠 동안 정말 많이 걱정했는데, 질문을 듣고 나니 큰 응원이 됐다. 칸에서 받았던 박수만큼, 그것보다 더 힘이 된다! 관련해서 또 생각나는 감독님 말씀이 있다. <호프>의 캐릭터들이 너무 사랑스럽지 않냐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다들 어딘가 조금씩 부족해 보이는데 정이 가고, 악해 보이는데 선해 보이고, 욕심꾸러기 같기도 한데 사랑스럽기도 하다. 이런 캐릭터들을 더 보고 싶지 않나! <호프>후속편이 꼭 나오면 좋겠다.

성애의 디테일

성애의 주요 무기는 유탄발사기가 장착된 M16이다. 유탄발사의 훈련 과정과 사용 방법 등을 묻자, 정호연 배우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호프>의 포스터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내 포스터를 교보재 삼아 사격 자세를 시연하며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일반 총탄을 쏠 때는 여기 조준경을 쓰는데, 유탄을 쏠 때는 이 위에 장비를 열어서··· 이렇게 위로 보고 쏴야 한다. 사실 실제 유탄은 포물선으로 뿅 날아가서 펑 터지는 느낌이라 크게 극적이지가 않다. 총기 반동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서 최대한 영화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반동도 조금 가미하고, 카메라앵글에 따라서 견착하는 각도를 조금씩 다르게 하는 등 미세한 조정을 거치기도 했다.”

사진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