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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리액션 이후의 액션 - <호프>의 이상한 ‘상태’를 이해하는 한 가지 관점

*영화 후반부의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호프>의 첫장은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리액션들이 채운다. 인물들의 리액션은 서사를 나르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장면의 운동을 대체한다. 성기(조인성)와 함께 마을 어귀에 도착한 출장소장 범석(황정민)이 죽은 소를 살펴보는 오프닝은 공포스러우면서 어딘가 실없다. 일행들이 소를 둘러싸고 서서 하염없이 어떤 리액션만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40분가량의 시퀀스도 다르지 않다. 대상의 숏은 유예되고 그것이 남긴 잔해만 전시될 동안, 점점 고조되는 리액션숏이 영화를 끌고 간다. 벽이 뚫리고 난장판이 된 시장통을 통과할 때 숨 쉬듯 욕지기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범석의 공포 반응이 곧 스릴의 요체이다. 괴수와 대면하기 직전인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범석이 뜸 들이며 일행과 한담을 나누게 해 장면의 압력을 빼버리기도 한다. 요컨대 <호프>의 리액션은 종종 논리적인 연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자 당면한 사건보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처하는 이의 응답 자체가 중요해진다.

미지의 폭력 앞에서 마을 사람들이 소환하는 대상은 상상 가능한 가장 위협적인 존재, 호랑이다. 호랑이가 넘어왔다면 어떻게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 백두산을 넘고 지뢰밭까지 피해 이곳까지 왔을지에 관한 논쟁은 시답잖게 종결된다. 그러나 마을 곳곳의 반공 푯말은 적이 보이기 전에 이미 기입되어 있음을 증언한다. 외계인들의 최초 목격자인 해술 아저씨(임현식)의 진술이 참전 노인의 무용담처럼 서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을의 현자처럼 취급받는 그가 경험적 진리의 대변자인지, 낡디낡은 인식틀의 소유자일 뿐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식의 범주 바깥에서 도착한 사태를 자기 안으로 수리해 들일 능력이 공동체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비극의 출발지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지연이 만드는 스릴에는 대가가 따른다. 소리와 기척으로만 도사리던 존재가 CGI의 질감을 입고 대낮을 가로지르기 시작할 때 어떤 감흥은 필연적으로 일부 반납된다. 여기서 <호프>가 택한 전략은 은폐가 아니라 노출의 극단화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자연광으로 밀어붙인 <호프>의 백주는 집단 최면의 무대처럼도 보인다. 더는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은데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해술이 아저씨가 그랬다면 맞는 것”이라는 말이 여전히 통용된다. 그 가운데 중책을 짊어진 채 외계인과의 첫 전투에 휩쓸렸던 범석은 추격전 말미쯤 이종(異種)의 눈물을 목격하고 혼란에 빠진다. 범석을 외부의 복잡성에 감응하려는 <호프> 속 유일한 인물로 정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윽고 괴짜 청년이 어린 외계인을 죽인 사실이 드러날 때 그가 보이는 재빠른 동정은, 괴물의 의미를 부단히 다시 쓰려는 자의 인과적 반응이다. 반면 마을을 초토화한 추한 괴물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순경 성애(정호연)의 확신은 벽에 붙은 표어들처럼 의심도 정정도 없이 완연하고 그의 총격과 카 체이싱은 유달리 매끄럽게 빛난다. 그리고 성기(조인성)가 있다. 숲에서 함선에 유인되어 수난에 가깝게 시험을 당하는 성기는 <호프> 속 액션의 화신이라 할 만하다. 모든 리액션은 이미 앞에서 수행되었다. 그는 그저 싸우고 내동댕이쳐지고 다시 일어나 싸운다. 반응하는 자, 확신하는 자, 견디는 자. 이 삼분할이 <호프>가 캐릭터라는 오래된 개념 대신 배치한 세개의 신체다. 지각 없는 행동, 이해 없는 반응, 의미가 비워진 순수 운동의 폭주는 장르적 쾌감만을 위한 설계가 아니라 하나의 논제일 수 있다. <호프>의 하루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먼저 놀라운 광경을 전시하는 매체로서의 영화, 즉 어트랙션의 시작부터 종료까지를 담는 데 충실하다.

이쯤에서 <호프>를 봉준호의 세계와 비교해보자. <살인의 추억>의 무대에서 <플란다스의 개>식 인물들이 벌이는 <괴물>과의 싸움을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한 <호프>는 그 모든 조각들을 끌어온 뒤 통합하기보다 순간의 경이에 베팅한다. 봉준호의 혼종성이 여러 장르를 사회풍자라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통합하는 원리였다면, 나홍진의 혼종은 원심적이다. 공상과학과 스릴러와 컬트 코미디는 서로를 지시하지 않은 채 평행선을 달리고, 톤은 봉합되지 않고 분열적이다. 따라서 <호프>의 인물들은 모든 전투를 마친 이후에 (어쩌면 비로소) 허무해진다. 어트랙션에서 내린 관객도 비슷한 감각을 느낀다. 영화 말미에 도로를 그저 달려나가는 범석과 성애는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 외에 어떤 귀납적 결론도 얻지 못한 상태다. 성애는 그저 아무 말이나 하면서 공허를 채우려 애쓴다. 이 장면에서 범석이 남기는 한마디가 <호프>이후에 대한 유일한 단서일 듯싶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이상하다”고 느낀다. 무엇이 비틀렸고, 무엇을 놓친 것일까. 엔딩에서 추락하는 제국의 함선을 애도하며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인용하는 것은 히브리서 11장1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구절이다. <곡성>이 미끼를 문 자의 의심, 즉 본 것을 믿어도 되는가를 질문하는 영화였다면 <호프>는 본 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무지와 성급함을 시험대 위에 올린다. 판단과 사유가 중지된 리액션, 그리고 무차별적 액션으로 점철된 강렬한 하루가 끝났다. <호프>에 부재하는 것은 그 의미를 내면화하는 정지된 시간이다. 남은 생존자들이 이제 다음편에서 호포항의 새로운 윤리를 세울 차례다.

칸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

첫째, 최초로 등장하는 자이언트 크리처를 비롯해 전반적인 CG 완성도가 개선됐다. 둘째, 미세한 조정을 통해 주제적으로 승격된 요소들이 감지된다. 범석이 크리처의 눈물과 대면하는 장면이 더욱 확실하게 각인되게끔 리듬을 조정했다. 나홍진 감독은 무차별적 액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정지에 가까운 응시의 한순간에 더 많은 시간을 부여했다. 셋째, 유희의 절제. 칸 상영본에서 배우 박영규는 대형 트레일러가 크리처를 깔아뭉갠 현장을 수습할 때 나타난 인물이었으나 현재는 통편집됐다. 앞선 소란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모습으로 갑자기 외부에서 도착한 존재였다. 배우 임현식과 더불어 한국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아이콘을 소환한 나홍진 감독의 유희적 캐스팅이 돋보였던 지점이다. 국내 개봉 버전에서는 흩어진 유머들을 다듬고 중반부의 호흡을 채비하는 과정에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