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씨네21 추천도서 - <로열 블러디 헬1>

박소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로열 블러디 헬>은 판타지소설의 ‘김치찌개 맛집’처럼 클리셰들을 충족시키면서도 자기만의 공고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헝거 게임>을 언급하는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실랜도르왕국이 차기 왕을 선발하기 위해서 벌이는 왕이 계승전 ‘로열 블러디 리그’ 때문이다. <헝거 게임>이 계급에 따라 어린 소년, 소녀들이 살인 게임에 강제 차출된다면 <로열 블러디 헬>에서는 왕족이 왕좌를 두고 리그에 출전한다. 왕국이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서로 다른 왕비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자가 여섯, 공주가 다섯이기에 이들은 ‘형제, 자매’라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경쟁자로 길러진다. 왕자와 공주는 13살이 지나면 리그를 준비해야 하고 형제를 잔인하게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거나 지옥에 끌려간다. 잔혹한 리그 규칙뿐 아니라 판타지의 재미를 증폭시키는 장치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왕이 리그에 출전할 자기 자식에게 선물이랍시고 하사하는 에코셸이 그 예다. 거기에는 지난 로열 블러디 리그에서 겨우 8위에 그친 인물이 화산 감옥에 투옥된 ‘소리’가 담겨 있다. 화산 감옥에서 용암의 열기에 각막이 녹아 시력을 잃고 식도가 익어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채 남은 여생을 보내는 사촌의 고통스러운 소리가 담긴 소라 껍데기를 아들에게 선물하는 아버지라니. 이처럼 현대의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가혹한 일들이 반인반신의 인물들에게 계속 펼쳐진다. 물론 가장 예측 못했을 사건은 남녀 주인공의 몸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고귀한 신분의 왕자 아트와 성 밖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사냥꾼 소녀 해나의 몸이 바뀐 것이다. 마치 <너의 이름은.>과 같은 상황이 남녀 주인공에게 일어난 셈인데 이들이 상대의 알몸을 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장면은 귀여운 에피소드처럼 읽힌다. 성별과 처지, 성격과 능력치가 다른 두 사람의 몸에 서로의 영혼이 들어가 있기에 이들은 협조를 해야만 로열 블러디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여기부터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적인 장면이 이어지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는 당연히 연모가 싹트게 되고…. 게다가 해나는 자라는 내내 할머니에게 ‘불행을 몰고 올 계집애’라며 구박을 받았고, 그럼에도 꿋꿋하게 자라 가장의 역할을 하는 소녀이다. 동물로 변하는 화신술을 가진 아트는 붉은 머리를 가진 고독한 왕자이고. 리그 출전 캐릭터가 많다 보니 첫권 초반에는 친절하게도 인물들의 일러스트가 전면 수록되어 있다. 무려 <상수리나무 아래>의 표지를 작업한 라펫 작가의 그림이다. 라펫 작가의 그림을 보고 읽기 시작하면 마치 웹툰을 한장씩 넘기는 것처럼 캐릭터에 심하게 몰입될 것이다.

미래를 발설한 자, 그리고 그 미래를 들은 자.앞날을 알 수 있다는 건 아주 강력한 힘으로,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랐다. 자신이 본 미래를 타인에게 그대로 발설하는 순간 입부터 심장까지 썩어버리는 것이다. 미래를 들은 사람은 귀부터 썩어들어가며 죽음에 이른다.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