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세 파트로 나뉘어 픽션과 논픽션을 혼재한다. 첫째, 강원도 홍천군에서 찍은 농촌의 풍광이 그려진다. 5월부터 추수철까지, 농번기에 접어든 논밭의 경치가 화면에 너르게 펼쳐진다. 둘째, 홍천군에 거주하는 실제 주민들의 일상이 있다. 마을을 가꾸는 이들의 생활감 넘치는 모습이 넉넉하고 자연스러운 생동으로 포착된다. 픽션의 성질을 아주 조금 가미한 논픽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셋째는 픽션이다. 공무원 생활을 포기한 청년 민우(김민혁)가 아버지(문영동)의 일을 거들기 시작한다. 할머니도 함께 산다. 민우는 모종의 권태로움에 빠진 듯하면서도 하루하루를 버틴다. 민우의 친구 성훈(김현섭)은 가업에 따라 소를 치며 생업을 이어가고, 종종 민우와 만나 술 마시며 일일을 보낸다.
세 파트는 분리되기보다 서로를 품어가고 섞여간다. 각 파트의 장면들이 다른 세계를 적극적으로 침범하지는 않되, 분명히 한 시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감각을 전한다. 세개의 시간대도 나뉘어진다. 가뭄, 장마, 추수로 이어지는 세개의 챕터는 픽션과 논픽션 파트를 구분하지 않고 적절히 교차시킨다. 이로써 2022년 여름의 강원도 홍천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세 파트와 세 챕터가 은근슬쩍 공유한다. 이 조각들을 꿰뚫는 핵심적 공통 의식은 명백하다. <지난 여름>의 모든 요소는 생사의 대계(大界)를 다룬다. 다룬다는 표현은 틀릴지도 모르겠다. 생사의 대계를 받아들인다. 농촌의 풍광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색깔과 모양을 달리하고, 주민들은 그 다름을 수용하며 각자의 삶을 지탱한다. 민우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사의 순환이란 섭리를 더욱이 강하게 느끼게 된다. 카메라를 지탱하는 삼각대의 모양처럼, <지난 여름>의 세 파트와 세 시간대는 세상의 순리라는 커다란 개념을 이고 있다.
언뜻 보면 <지난 여름>엔 커다란 사건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사계의 흐름, 농사의 노력, 거두는 곡식, 장마의 습기, 사람과 가축의 (예견된) 죽음, 사망의 신고. <지난 여름>은 개개의 삶이 대할 수 있는 거대한 사건들을 극 속에 품고 있다. 다만 그 사건을 극적으로 다루지 않을 뿐이다. 엄연한 극영화의 플롯을 갖추고 있으며 캐릭터의 구축 역시 무척이나 상세하다. 하지만 그들을 현실 이상의 무언가로 다루려는 과잉을 절제하며 나아간다. “사람이 20% 농사짓고, 하늘이 80% 농사짓는 거다”라며 대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는 작중 실제 농부의 경구(警句)와 같이,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그 과정의 사건들을 영화라는 공간에 자연주의적으로 채록하는 쪽에 가깝다.
말 그대로 채록이다. 카메라는 크게 움직이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은 격정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어조의 변화 하나 없이 장례를 준비할 뿐이다. 음악은 자연의 소리로 대체되고, 장르적 쾌감이라 할 법한 장면의 도식도 없다. 가뭄이든 장마든 죽음이든 계속하여 자연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 무언가를 받아들인다. 상당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종종 <지난 여름>의 느긋한 외피를 보고 이것을 슬로 시네마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금은 다르게 살펴볼 수도 있겠다. <지난 여름>의 숏은 사건을 지연하거나 유예하고, 그 상태를 지속하려는 목적에서 이탈해 있기 때문이다. 즉 통상의 슬로 시네마와는 숏의 원형적인 지향성이 다른 것이다. 하여 <지난 여름>은 차라리, 세상사의 순리를 몇개의 사건으로 단 76분에 압축한 패스트 시네마라 부르는 편이 합당할 수 있겠다.
주어진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성정의 영화인 동시에, <지난 여름>의 형식미는 엄정할 정도로 일관적이다. 확연한 틀이 있기에 어떠한 현실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여름>의 이야기가 유장한 속력으로 이어지는 동안 영화는 눈을 떼기 힘든 형식적 긴장감을 선보인다. 연출자의 한결같은 고집이 묻어난, 너무나도 섬세한 프레이밍을 이 영화에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여름>의 문틈들은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가시화하듯 세상을 무정하게 가른다. 카메라는 인물들이 문 사이를 돌아다니는 장면을 거의 담지 않는다. 편집 역시 문 너머의 각 세계를 분리하는 편이다. 통일감이 뚜렷하니, 그 예외의 등장에는 더욱 큰 감흥이 따른다. 누군가의 죽음이 도래하여 생사의 틈이 흐릿해졌을 때, 그제야 화면 속 인물들은 문지방을 넘어선다.
또 다른 한 장면은 영화 전반의 태도를 함축한다. 축산업자들이 두 마리의 소를 트럭에 태우려 한다. 인간과 소는 가감 없는 힘싸움을 펼치고 결국 소들은 트럭에 오른다. 소가 카메라쪽으로 뒷걸음질 칠 때마다 화면이 몇번씩 들썩인다. 통상적인 극영화라면 쓰기 어려울 녹화본이다. 최승우 감독은 이 숏을 두 테이크 찍었다고 한다. 첫 테이크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소들을 찍었다. 너무 가까웠다고 느낀 뒤, 카메라는 조금 뒤로 가 두 번째 테이크를 촬영했다. 그럼에도 촬영자는 소들의 격렬함에 실제로 놀라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카메라가 흔들렸다. 그렇지만 소들이 트럭에 타는 죽음의 현실을 영화가 재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영화는 이 카메라의 흔들림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렇다. 이 소들은 죽음을 향해가는 것이다. 죽음을 둘러싼 인간과 소의 몸짓이 섞인다는 점에서 이것은 마치 <고독의 오후> 속 투우 장면과 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투우가 그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면, <지난 여름>의 이 장면은 죽음에 맹목적으로 향하는 전투가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세간을 통하여 무언가의 작고 거대한 움직임이 늘 오고 간다는 현실. 이 사태의 가치나 당위를 애써 판단하려 하지 않는 카메라의 수용성. 그렇게 <지난 여름>이 받아들인 인생과 축생의 권태롭고 맹렬한 움직임들. 이것 모두가 우리의 대계를 구성하는 생멸의 문제이며, <지난 여름>은 이 과정을 현시한다.
<지난 여름> 안에 사실성과 허구성이 어떻게 배합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소의 죽음과 카메라의 흔들림은 지극히 현실이지만, 이것은 극영화의 플롯 안에 배치된다. 이를 다큐멘터리의 태도로 만든 극, 혹은 극의 틀에 주입한 다큐멘터리라 풀이할 수도 있겠다. 조금 더 고심해보자. “다큐멘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픽션은 바로 나에게 일어나는 일”(<씨네21> 1567호 ‘시네마 오디세이’ 이윤영 영화학자의 글)이라던 고다르의 말을 빌린다면, <지난 여름>의 일은 다른 사람도 나도 아닌 바로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총체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 정답을 함부로 규정할 순 없겠지만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