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집의 연인들>을 이끌어가는 엉뚱한 은자와 팔복이 정애화 배우와 기주봉 배우를 어떻게 만날 수 있었나. 캐스팅이 성사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해달라. 또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느낀 두 배우의 인상도 궁금하다.
김태휘 <갈매기>에서 보고 정애화 배우를 무척 좋아했다. 워낙 캐릭터의 당돌한 이미지가 강했고 당시 한 인터뷰에서 김미조 감독이 말씀하시길 정애화 배우는 무엇이든 빠르게 배운다고 하더라. 그때 은자와 딱 맞아떨어지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루는 인스타그램에서 정애화 선배님 이름을 검색해봤는데 계정이 나왔다. 실제로 운영되는 계정인지 모른 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DM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금세 답장이 왔다. 바로 읽으시더라.
정애화 내가 릴스 보는 걸 너무 좋아해서…. (웃음) 감독님이 장문의 DM을 보내주었다. 전주영상위원회 2022 장편영화 제작과정 지원작으로 선정됐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시나리오라는 믿음이 있었고 은자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가장 좋았던 건 장르. 실버 로맨스라니. (웃음) 최민식 배우도 언젠가 중년 로맨스를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소재가 참 드물다.
김태휘 기주봉 배우는 독립영화쪽에서 건너건너 연락이 닿아 광주에 있는 카페에서 처음 대본을 보여드렸다. 한장 한장 읽으며 궁금한 점을 바로 물어보시는데 마치 교수님한테 검사받는 느낌이었다. (웃음) 하지만 우리 영화의 촬영 기간과 겹치는 다른 작품이 있던 상태라 그 자리에서는 참여 의사를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셨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카페에서 나왔을 때 나무 위에 수건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기주봉 선배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에 걸쳐진 저 수건이 바로 우리의 만남이라고. 무척 시적으로 표현하셨다. 그 순간이 너무나 팔복 같아서 어떻게든 캐스팅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마음에 계속해 어필했다. 그리고 마침내 연락이 왔다. 이전에 논의 중이던 작품은 이미 해본 캐릭터라서 그간 안 해본 팔복이를 해보고 싶다고.
기주봉 처음 시나리오를 보았을 때 전형적이지 않고 일탈의 통로를 찾아가는 팔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정박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팔복의 모습이 나의 어떤 구석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누구나 한번쯤 일탈해보고 싶은 충동이 드니까.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 중장년층이 로맨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많지않다. 어떻게 코미디가 가미된 실버 로맨스를 처음 떠올렸나.
김태휘 첫 번째 장편 시나리오를 쓴다면 꼭 내 인생에 인상 깊었던 캐릭터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게 우리 친할머니다. 나는 슈퍼 하나 없는 농촌에서 나고 자라 스무살이 되어서야 전주에 갔다. 그전까지 충북 증평에서 20여년을 보냈다. 증평을 설명하자면 박보영 배우의 생가가 있는 곳이자 가수 이승기가 군 생활을 한 곳이다. 아버지는 해남으로 일하러 가시고 외딴집에는 나와 엄마, 할머니 셋이서 지냈다. 어린 손주가 있으니 할머니는 늘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가는데 비닐하우스에서 다른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를 보았다. 놀랍게도 내가 알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대낮부터 소주 병나발에 담배를 피우시며 거친 욕설로 사람들의 뒷담화를 하는…. (웃음) 충격이었다. 14살의 나에겐 쇼킹 그 자체였다. 그때 알았다. 내가 모르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따로 있다는 것을. 거기서부터 출발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를 보는데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우리 할머니보다 연세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할머니에게도 낭만을 선물한다면 어떨까. 그때 영화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은자라는 캐릭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애화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감독님이 할머니 이야기를 한번도 안 해주셨다. 그러면 그 선물 같은 영화를 할머니는 보셨나.
김태휘 지금은 요양원에 계신다. 몇년 전부터 치매 증상이 시작되어서.
정애화 우리 엄마도 그래~.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다.
- 자신이 모르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상상하던 측면에서 돌아보면 낭만가 팔복이는 완전히 판타지적인 인물인 셈이다.
기주봉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팔복이는 빈집 털이를 하면서 그곳의 가족사진을 훔친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나 정서를 상상하곤 하는데 그 모습에서 팔복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팔복이가 진짜 훔쳐선 안되었던 건 돈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진들. 가족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족들이 아끼는 것은 그 사진들이었을 텐데.
정애화 은자도 외로워. 은자는 성격상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주변과 부딪히는 거친 성정에 순간순간 자제력까지 잃는다. 그렇지만 의리는 있다. 문제의 발단도 죽은 남편의 반지를 찾으러 가면서 시작되지 않았나. 남편을 의식한 혼잣말도 그런 성정을 잘 보여준다. 어쩌다 보니 팔복을 줍게 됐지만.
- 영화가 챕터로 나뉜 것은 아니지만 팔복이 “나와 함께 가겠소?”라고 말하는 순간 본격적인 로드무비가 펼쳐지는 2막에 진입하는 느낌이 든다. 마치 “내 동료가 돼라!”라고 외치는 <원피스> 같기도 했다.
기주봉 원피스?
정애화 팔복이가 원피스를 한벌 사주잖아~.
김태휘 아니아니, <원피스>는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이다. (웃음) 은자는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욕쟁이에 매일 술도 마시고. 일터에도 지각하고 임금 체불도 스스럼없이 지적한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에게 눈엣가시다. 하지만 은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 구성원들은 보통 남편을 따라 고향을 떠나온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가부장적 마을 사회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남편은 없고, 이웃들은 자기와 안 맞으니 어떻게든 적응해야만 한다. 적응한 척해야만 살 수 있다. 다시 말해 은자에겐 팔복이 나타나기 전까지 죽은 남편밖에 없었던 거다. 팔복을 만나면서 많은 게 은자에게 열린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인연이 생기고, 마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면서.
정애화 사실 은자는 엄청나게 저돌적인 인물이다. 팔복이야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으면서 유유자적하는 반면 은자가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 초반에 은자가 빈집 털이범 팔복을 붙잡아 밧줄로 꽁꽁 싸매고 술 마신 뒤 잠에 드는 장면이 있는데 난 그때 약간의 스킨십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휘 맞다. 그건 완전히 의도했던 바였다. 팔복의 옷이 살짝 풀어헤쳐져 있고 은자가 팔복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관객의 상상에 맡긴 부분이다.
- 영화를 찍을 때 김태휘 감독은 20대였다. 연기 경력으로나 삶의 경력으로나 대선배인 두 배우와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을 듯한데.
김태휘 리허설을 한번 하고 나면 그냥 마음 편히 슛을 돌려버린다. 그 자체가 너무 경이롭다. 추가 디렉팅 없이도 이미 두분이 그 인물이 되어 있다. 테이크도 많이 가지 않았다.
정애화 우리가 연극을 많이 하다 보니 즉흥적으로 합 맞추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인물의 성격이 분석되면 감독님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듯하다.
왔다가 떠나기를 반복하는 것은 파도만이 아니다
- 마음속 결핍을 끌어안은 두 사람에게 빈집 털이라는공허한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기주봉 팔복이는 생각이 크게 복잡하지 않다. 시골에는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는 집들이 많아서 뻔뻔하게 그곳에 드나들며 자기 집처럼 생각한다. 편안하고 아늑한 여백이랄까. 자신이 잠시 몸을 뉘일 수 있는 순간이다. 보통 사람이면 다른 사람 집에 가서 눈치도 좀 볼 텐데 그런 기색이 없다.
정애화 은자는… 팔복과 함께 빈집 털이를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웃음) 은자는 자기 행동과 선택에 있어 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 편집 과정에서 빠진 장면 중 내가 정말 아끼는 장면 하나가 있다. 은자가 팔복에게 하는 말이다. “잘 들어. 나는 말이오. 내 똥꾸멍으로 다시 나오는 것만 가져온단 말이오.” 빈집 털이 집에서 물건과 현금을 들고 나오는 팔복과 달리 자기는 생존을 위한 음식 정도만 탐한다며 분리하는 것이다. 난 너랑 다르다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대사다. 은자의 역사, 가치관, 삶의 태도 등 많은 것을 보여준다.
- 코스모스밭에서 꽃다발을 만들어주고 프러포즈에 앞서클래식 테이프로 갈아끼우는 로맨티스트 팔복은 “적당히 선을 지키자”는 은자의 말을 듣고 돌연 떠나버린다. 개인적으로 영화 전개상 예상치 못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기주봉 나는 그 장면에서 팔복이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공백. 뒤로 계속 연결되는 부재랄까. 빈집 털이를 청산하고 은자와 함께 살고 싶으니 돈을 벌러가든, 무언가를 하러 잠시 어디를 다녀오는 거라 생각했다. 그 공백은 다시 은자에게 돌아온 팔복에게 연결된다.
정애화 나는 은자가 팔복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웃음) 팔복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라지고 자신은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긴급하게 아들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해서 아들 집에 가지만 그것 또한 너무나 불편한 삶이다.
김태휘 아들의 집에 간 은자가 베란다 창문 밖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창을 창살처럼 연출했다. 은자는 무언가 삶이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마을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아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불편하고.
- 그렇다면 마지막에 반복되는 팔복의 부재는 무엇인가. 팔복은 진정 은자를 사랑한 게 맞나.
김태휘 그건 기차역에서의 중요 장면을 잘 들여다보면 누군가가 팔복을 다급하게 찾아오는 작은 요소가 보인다. 일부러 어렴풋이 보이게 연출했다. 이 지점을 단번에 발견하는 사람이 있고 영영 못 보는 사람도 있더라. 이게 무엇인지 알면 팔복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주봉 그래서 팔복이 가방을 두고 간다. 팔복이 나름대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실제로 그 장면을 촬영할 때 팔복이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 감독님에게 물었는데 감독님이 구체적인 답변을 안 주셨다. 애매했다. 그 자체가 답이구나 싶어서 그대로 연기했다.
김태휘 정확하다. (웃음) 팔복에 관하여 정확한 답으로 구획해두고 싶지는 않았다. 열어두고자 했다.
- 은자의 진짜 감정을 비추는 시간대는 늘 새벽녘이다. 영화는 푸르스름한 미명 아래 세번의 은자를 비춘다. 처음과 끝,그리고 팔복을 따라 나서기로 결정한 다음날 세수를 하던 순간.
김태휘 철저한 고증과 경험으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보통 새벽에 일찍 일어나셨다. 그리고 우리를 깨우지 않으셨다. 그 새벽녘은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나 할머니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어쩌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을 때 할머니가 새벽에 홀로 의자에 앉아 있던 모습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은자가 자기만의 사색에 빠진다면 언제여야 할까. 그건 완전히 혼자만의 순수한 시간이 주어지는 새벽이라 생각했다. 영화에서도 새벽을 맞이한 은자의 세 장면에서 모두 감정을 다르게 설정했다.
정애화 마지막에 나오는 새벽에는 은자가 바스락 소리에 놀라 혹여나 뭔가 있는 게 아닌지, 그게 팔복은 아닌지 살핀다. 은자의 그리움이 묻어난다.
- 엔딩에 다다라 다시 마을 주민들과 노동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은자는 전과 다른 반응을 보인다. 덜커덩거리는 트럭에서 반지를 잃어버리지만 더 이상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다른 이웃들과 반짝거리게 웃을 땐 해방감마저 들었다.
김태휘 은자는 남편이든 팔복이든 타인과의 관계에 계속 매달려왔다. 은반지는 그 상징물이다. 반지가 떨어지는 순간 다시 찾아야 하지만 이젠 거기에 매달리지 않고 지금의 행복과 기쁨에 집중한다. 있는 그대로. 그런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 장면은 처음 2~3회차 즈음에 촬영한 것이다. 첫 시작에 엔딩을 촬영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정애화 선배님이 연기를 너무 잘해주셨다.
정애화 역광을 무척 아름답게 촬영해주셨다.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는 이야기를 만든 거야, 정말 대단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