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80권의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 소설 전집>을 탐독하던 시절, 작가 소개도 본문 못지않게 열심히 읽었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인생이 소설처럼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시절 간호사로 일하며 독약 조제를 배운 덕분에 청산가리 등의 독극물 트릭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만큼이나(푸른 제라늄 벽지 트릭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눈길을 끈 건 애거사 크리스티가 신인 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 겪은 실종 사건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남편과의 불화로 정신적 불안이 심했던 1926년 12월 초의 어느 날 애거사는 사라지고, 연못 근처에 그가 타고 다니던 차만 남았다. 경찰들이 수색에 대거 투입되고 남편 아치볼드는 곤욕을 치렀다. 11일 후 애거사는 돌아왔고 기억상실 때문이라며 상황은 대충 봉합되었으나, 당시 남편이 만나던 여자의 이름으로 호텔에 투숙한 사실 등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기억상실, 혹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해리성 둔주 때문이 아니라 일부러 실종 사건을 일으켜 남편에게 복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애거사 크리스티 미스터리>는 이 가설을 적극적으로 키운 작품이다. 젊은 날 첫눈에 서로에게 빠진 애거사와 아치는 사회적 관습에 저항하며 결혼했지만 전쟁을 겪으며 관계가 삐걱댄다. 소설가로 인생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애거사는 날로 차가워져 가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골프장에 가까운 집까지 구한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이어 어머니의 집에 수십년 쌓인 물건들을 정리하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애거사에게 아치는 부담스럽다는 말을 꺼내기만 할 뿐이다. 결국 내연녀가 있다며 이혼을 선언한 남편 앞에서 애거사가 택할 길은 많지 않다. 애거사가 실종된 현재, 그리고 두 사람의 과거 이야기가 교차되며 빠르게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겉보기엔 완벽해 보이는 가족 내부에서는 긴장과 배신과 반전이 이어지는 현대적 가정 스릴러에 가깝다.
몇년 전 번역된 애거사 크리스티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첫 번째 결혼 이야기의 경우 초중반까지 소설과 무척 비슷하다. 아치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졌고, 전쟁 때 독약 조제를 배웠고, 소설가로 경력을 다지는 사이 남편과의 사이가 어느 순간 멀어졌고…. 그렇지만 자서전에서는 애거사가 겪었을 슬픔과 충격이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으며 기억상실 부분이 빠져 있고 이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실제로 그때 어땠는지 작가가 언급을 피하는 것이 공식적 입장이라면, 앞으로도 후대 작가들의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무궁무진할 것 같다.
내가 아치라고 생각했던 남자, 내 강점과 재능을 길러주고 실현해줄 수도 있었을 그 남자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35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