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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대중에게 말을 거는 화자, <인턴> 배우 최민식

기호(최민식)는 국수 냄비가 끓어넘치려 할 때 찬물을 조금 부을 줄 아는 60대 남성이다. 그의 집은 그가 직접 내린 커피 향으로 가득하고, 거실 한쪽엔 연배가 느껴지는 바둑판과 바둑알도 놓여 있다. 기호는 37년간 일한 직장을 떠나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하지만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이민 간 딸은 일상이 바빠 3년째 한국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홀로 지내도, 지켜보는 이가 없어도 기호는 단정하게 하루를 꾸려나가려 노력한다. 그 일환으로 기호는 패션브랜드 ‘WOO22’(우투투)의 실버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낯설어하던 젊은 직원들은 어느새 그에게 삶의 지혜를 얻고 싶어 한다.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끓는 냄비에 찬물을 붓는 정도의 지혜를. 너무 가깝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방식으로 젊은 배우들과 소통하며 <인턴>을 완성한 최민식 배우를 만났다.

- 오프닝 시퀀스에서 기호의 삶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젊을 땐 삶이 여행 가방과 같아서 이것저것 많이 담았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오프닝 시퀀스는 사별한 아내의 사진 앞에 꽃을 놓아두며 “여보, 잘 안된다. 아직도 서툴러”라는 기호의 대사로 마무리된다. 눈물과 미소가 묘하게 섞인 얼굴로 관객을 단번에 기호쪽으로 끌어당긴다.

마지막 대사는 내 애드리브였다. 시나리오에 “아내 사진을 바라본다”라고만 쓰여 있었다. 꽃꽂이도 내가 제안했는데, 우리 집사람이 꽃꽂이를 좋아하고 잘한다. 아내가 꽃꽂이하는 모습을 자주 봤기에 살아생전 기호의 아내가 무얼 취미로 삼았을까 상상하다 자연스레 떠올렸다. 아내를 잊지 못한 행동들을 애잔하게 보여주면 기호의 현 상태와 인품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여보, 잘 안된다. 아직도 서툴러”라는 애드리브는 어떻게 떠올렸나.

아내로 등장하는 조윤희 배우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내뱉게 됐다. 기호가 아내와 꽃꽂이학원을 같이 다니진 않았을 테고 사별 후 아내를 향한 그리움으로 꽃을 사다가 꽃꽂이를 해보지만 잘하기 어렵잖나. 그래서 아내 사진을 향해 대화 같은 대사가 나왔다. 참고로 조윤희 배우는 권해효 배우의 아내다.

- 실버 인턴 기호가 젊은이들과 섞여 일하는 모습은 최근 행보와 겹쳐 보인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파묘> <맨 끝줄 소년> 그리고 <인턴>까지 젊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창작 분야에서 반짝임은 소위 ‘짬밥’과 관계없다. 예를 들자면 황석영 작가의 소설만 좋은 게 아니라 지금 시대의 작가들도 우리에게 굉장히 ‘어필’한다. 예술과 창작 분야에서 선배와 후배는 파트너이고 서로 배우고 보완하는 관계다. 내가 젊은 친구들한테 받는 자극이 엄청 많고, 그 친구들 또한 나한테서 무언가 느낄 것이다. 없으면 마는 거고. (웃음) 그렇게 시너지가 난다.

- 이번 <인턴> 현장에서는 언제 시너지를 가장 크게 느꼈나.

매 순간 그랬다. (한)소희하고도 (김)준한이하고도 (류)혜영이하고도 그랬다. 리허설 때 동선을 맞춰보고 서로의 대사를 알고 연기에 들어가지만 카메라 앞에서 시너지가 생기면 느낌이 딱 온다. 그럼 되게 흐뭇하다. 요즘 배우들은 위축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만만하고 과감하게 표현한다. 그럼 나도 덩달아 ‘릴렉스’하고 어울렁더울렁 함께 파도를 타게 된다.

- <인턴>의 서사는 복잡하게 꼬이지 않은 직선에 가깝다. 실버 인턴에 합격한 기호의 3개월간의 여정을 그린다. 원작의 내용도 널리 알려져서 배우가 신선함을 불어넣고 현실감을 주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하다.

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 <인턴>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버리려 했다. 억지로 새로움을 추구하려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최민식이, 한소희가 연기하잖나. 결과물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김도영 감독의 연출도 낸시 마이어스 감독과 다르기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정서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당연히 차별화가 되리라 믿었다.

- 연작 영화에 출연한 적 없고 드라마 <카지노>도 시즌1과 시즌2를 연달아 촬영했다. 전작의 영향을 받으며 연기한 적이 없다. 리메이크작 <인턴>을 선택하기까지 어떤 기대와 우려가 있었나.

우려가 더 컸다. 잘해봤자 본전이니까. 그러나 연극이든 영화든 오롯이 오리지널인 경우는 거의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든 작품은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만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가 가랑이가 열두번도 더 찢어지겠다고 겁냈다면 출연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식으로 한번 표현하겠다고 마음먹었기에 가능했다.

- 원작에서 실버 인턴 벤을 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다. 그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그 형님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뭐…. 고등학생 때 중앙극장에서 <디어 헌터>를 봤다. 전쟁과 러시안룰렛 같은 잔인한 요소를 다뤄서 청소년관람불가였지만 너무 보고 싶었다. 퇴짜 맞을까봐 담배 한대를 물고 매표소에서 “일반 하나요”라고 말하자 매표소 직원이 나를 아래위로 보곤 휴가 나온 군인인 줄 알고 표를 줬다. 휴~ 담뱃불을 얼른 끄고 극장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 기대만큼 <디어 헌터>가 좋았나.

그땐 좀 지루했다. 영화가 길었다. 하지만 사운드트랙인 존 윌리엄스의 <Cavatina>를 한때 휴대전화 컬러링으로 설정해놓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 지금은 로버트 드니로의 영화 중 <디어 헌터>를 가장 좋아하나.

그건 아니다. 30대 때 연기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경이로운 <대부 2>가 있지 않나. 그 작품에서 돈 콜리오네의 젊은 시절을 차갑게 연기했는데, 다혈질인 첫째 아들 소니 역으로 <대부>의 오디션을 보는 영상이 남아 있다. 아, <대부 2>도 그렇고 <분노의 주먹>도 그렇고 주옥같은 영화가 많다.

- 로버트 드니로의 영향을 지우기 위해 원작 <인턴>을 딱 한번만 관람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예전에 본 적 있지만,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 딱 한번 더 봤다. 이거 큰일 났네. 내가 괜히 한다고 그랬구나 후회했다. (웃음)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인턴>에는 특유의 품위와 품격이 느껴진다. 그를 잃지 않으면서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유머와 정서를 담아내는 작업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 더는 보지 않은 이유는.

자꾸 보면 뭐 하겠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최민식이 표현하는 한국 아저씨로 가야 된다는 믿음으로 몰아붙였다.

- 12년 전 뤼크 베송 감독이 <씨네21>인터뷰에서 최민식 배우를 “악마 같았던 존재가 컷 사인만 돌면 곧바로 부드러운 천사로 바뀐다”라고 표현했다. 주변 영화인들도 늘 당신의 인자함, 따뜻함을 이야기한다.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웃음)

-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최민식의 따뜻한 연기나 인자한 미소를 볼 때 배우 본인이 깃들어 있다고 느낀다. 배우로서는 <인턴> 속 기호처럼 따뜻한 인물, <올드보이>와 같은 지독한 이야기로 새 옷을 입는 경우, 어느 쪽을 더 편안하게 느끼나.

연기를 하다 보면 내 몸에 딱 맞는 옷 같은 캐릭터가 있다. 그러나 10작품 중 8~9편이 내 몸에 안 맞는 옷이다. 많은 배우가 작품을 택할 때 표현하기 쉽나, 어렵나, 멋있는 역할인가, 지질한 역할인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쉬운 역할이란 것도 없다. 다만 나는 <인턴>이 내게 일종의 자극제가 되길 기대했다. 아직도 내겐 그런 자신감이 있다. 여태 배우로 활동하면서 대중과 통했던 많은 작품이 있지만 아직 보여줄 게 많다는 자신감. 나이를 자꾸 먹어가지만 그 자신감은 여전하다. 그리고 배우로서 욕망도 넘친다. 드니로 형님과 비교당해서 욕을 먹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할 일 아닌가.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가 관객이다. 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떠들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미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을 위해 연기한다. 이렇게 말하면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받겠지만 나는 대중에게 말을 거는 화자다.

- 대중의 응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그렇다. 나는 ‘이런 인간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질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스스로 뿌듯해하기 위해 이 일을 한다. 비유하자면 완성한 그림을 앞에 둔 화가가 내가 이런 걸 표현했구나, 뿌듯함과 만족감을 느끼듯이. 전시회를 열어 그 그림을 얼마에 팔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창작은 한 사람의 에고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에고. 그에 충실해지려 한다. 물론 관객과 소통이 잘돼 많은 사람이 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더 행복하다. 그렇다고 내가 흥행작만 택한 건 아니다. 쫄딱 망한 작품도 많았다. 그러나 <파이란>같은 작품을 택한 건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많은 걸 느끼고 배웠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작품 속 인물과 세상에 관해 알아가는 과정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의 재료가 되길 바란다.

- 그동안의 작품들을 볼 때 만족을 느끼는 편인가.

그렇지 않다. 겸손 떨려는 말이 아니라 예전 작품을 보면 당시엔 생각하지 못한 게 눈에 들어온다. 결과물을 향한 나만의 평가도 시시때때로 변한다.

- 필모그래피에 강한 폭력의 기류가 있지만 따뜻한 캐릭터들의 계보도 있다. <꽃피는 봄이 오면>부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까지. 고독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서민적이면서 지성적인 캐릭터들이다. 최근 들어 이런 따뜻한 이야기가 느는 건 나이 듦과 연관이 있을까.

나는 ‘짬뽕공’같이 연기하고 싶다. 말랑말랑하고 통통 튀는 생고무 공처럼 유연해지고 싶다. 배우로서 더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은 점점 커져간다. 따뜻한 역할, 차가운 역할, 좋은 놈, 착한 놈이 아니라 다양한 인격을 그리고 싶다. 사람이란 선악으로 단정되지 않는 존재다. 좋은 사람이라도 교활한 구석이 있을 수 있다. 배우로서 아주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 서로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한마디로 분류되지 않는 인간을 그려나가고 싶다. <맨 끝줄 소년>을 뒤도 안 돌아보고 결정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리고 문학적인 향기가 나는 작품을 오랜만에 만나 참 좋았다.

- 차기작 계획을 들려줄 수 있나.

아직은 없다.

- <인턴>에서 기호는 CEO 선우(한소희)와 회사 창고에 앉아 함께 남산타워를 바라본다. “생각이 많아지거나 일이 손에 안 잡힐 때 가끔 여기 와서 달 구경을 했습니다”라고 기호는 말한다. 배우이자 자연인 최민식은 그럴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생각은 많지만 스트레스에 함몰되지 않는 편이다. 의외로 낙천적이다. 생각이 많을 땐 그냥 걷는다.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이나 상원사 꼭대기의 적멸보궁까지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서너 시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음악도 들으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이 정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