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집] 연속성과 차이들 -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시네클럽, 그 과거와 현재

한국의 시네클럽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며 근래 출판된 세권의 저서. 성하훈의 <영화, 변혁운동이 되다>(2023, 푸른사상), 앤드루 데이비드 잭슨의 <독재 말기와 포스트 독재 시기 한국의 시네필리아 붐과 예술영화관>(2023, 에든버러대출판부), 이선주의 <시네필의 시대>(2024, 영화진흥위원회).

시네클럽에 대해 학문적으로 정립된 정의는 없다. 다만 시네클럽에 대한 지배적인 서사는 있다. 이 서사에 따르면 시네클럽은 양차 대전 시기 파리를 중심으로 탄생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제도화된 시네마테크와 더불어 팽창했으며, 영화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가치를 공유하고 이에 근거하여 특정 영화를 선정하고 상영하는 관객과 전문가 집단(영화감독과 비평가를 비롯한 영화인뿐 아니라 인접 예술 종사자와 지식인도 포함한다)에 의해 운영되었다. 상영 및 토론, 출판물 발간 등의 활동을 통해 시네클럽은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정전과 시네필리아 이념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물론 이것은 시네클럽에 대한 서유럽 중심의 서사다. 최근의 영화사 연구는 유럽 내에서도 스페인과 동구권,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시네클럽으로 관심의 저변을 넓혔으며, 이 과정에서 이 지역들의 시네클럽이 고전영화, 예술영화, 전위영화만을 상영하지 않았고 정치적, 교육적 기능 또한 수행했음을 밝혔다. 아시아로 초점을 이동하자면 대만과 홍콩의 시네클럽 및 비제도적 상영 공간(한국의 비디오방과 일정 부분 유사했지만, 1980년대 대만에서 언더그라운드 시네필 문화의 양식장으로 기능했던 MTV 팔러(MTV parlor)의 사례)의 역사 또한 시네필리아와 상영 실천의 지역적, 기술적, 문화적 차이를 고려할 필요성을 제기해왔다.

한국의 시네클럽을 역사화하는 최근 몇년간의 연구들 및 관련 이벤트 또한 이와 같은 필요성에 화답해왔다. 군사독재 체제 시기 프랑스문화원 상영 프로그램인 ‘토요단편’, 동서영화연구회, 얄라셩을 비롯한 대학의 영화 서클(동아리)은 이 시기 영화 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저서(성하훈의 <영화, 변혁운동이 되다> (2023)),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 및 서울독립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의 회고전과 기획전, 구술 및 아카이빙 덕택에 의미 있게 주목받아왔다. 앤드루 데이비드 잭슨의 <독재 말기와 포스트-독재 시기 한국의 시네필리아 붐과 예술영화관>(2023)과 이선주의 <시네필의 시대>(2024)는 비디오의 불법복제라는 독특한 인프라에 근거한 영화공간 1895, 문화학교 서울 등 비디오테크의 활동을 로컬 시네필리아의 형성과 영화의 문화적 합법화라는 관점에서 역사화했다. 박동수의 석사논문 ‘여전히 영화를 ‘트는’ 사람들’(2025)은 영화적 경험이 영화관을 벗어나 PC와 모바일기기의 소형 스크린과 비합법적 영화 파일,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분산된 동시대적 조건에서 마이크로시네마와 비제도권 시네클럽의 상영 실천들을 과거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이들을 ‘자유 상영’(전통적인 저작권의 규제를 벗어난 디지털 시대의 공유적 실천을 가리키는 로런스 레식의 ‘자유 문화’(free culture)에서 착안한 개념)으로 규정하고, 아마추어리즘을 넘어선 디지털 시대 시네필리아의 가능성으로 평가한다.

이 짧은 글 또한 한국 내 시네클럽과 시네필리아의 역사적 변동에 대한 이와 같은 최근의 선행 연구들에 근거하고 있다. 이 작업의 또 다른 재료는 학부생 시절 서울 여러 대학의 영화동아리 상영과 영화마을 및 으뜸과 버금 비디오대여점 등과 함께 서울의 여러 비디오테크를 순회한 경험이다. 1994년 늦여름 신사동 한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시네포럼을 시작으로, 대치동 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가 이후 홍대 근처로 이사한 오피아(내 기억이 맞다면 심지어 이곳은 불법복제 비디오를 렌털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비디오테크(일원동 오피스텔에 자리했고 무려 LD로 레어한 작품들을 상영했기 때문에 화질의 강점이 있었다)도 출입했다. 무엇보다 단순한 영화 관람을 넘어 영화를 진지한 사유와 분석 대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문화학교 서울 연구4팀의 공동체적인 활동 덕분이었다. 그 시기의 시네클럽이 한국 시네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당시 운영진이 기록한 영상과 방송용 푸티지를 장건재 감독이 편집한 홈 비디오에도 남아 2024년 인디스페이스의 ‘한국영화에 대한 질문’ 행사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개인적 체험에 대한 기억에 학자로서의 연구를 축적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영화사에 대한 역사적 조망을 더하여, 오늘날 서울을 넘어 여러 곳에서 번성 중인 동시대 시네클럽 및 마이크로시네마의 위상을 제한된 경험의 한계를 고려하며 생각해볼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비디오테크는 동시대의 시네클럽 및 마이크로시네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사와 관계했다. 1990년 6월27일 <한겨레> 기사에서 이언경은 사재를 투자한 영화공간 1895의 설립 동기를 “를 보지 않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얘기한다면 얼마나 공허한 말장난이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와 같은 동기는 1980년대 영화 운동 시기 서울영화집단이 발간한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1983) 및 <영화운동론>(1985) 등이 예시한 시차를 둔 수용과 번역의 연장이었다. 이같은 번역이 네오리얼리즘, 제3영화, 68혁명 이후 프랑스 전투영화(cinéma militant) 등 사회변혁을 위한 도구로서의 영화에 부합하고 표면상으로는 현실도피적인 충무로 영화에 대한 대안으로 상상되었던 영화사의 국면들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6월항쟁 이후인 1980년대 후반부터 번역의 대상은 동구권 영화와 홍콩, 중국 5세대 영화까지 확장된 ‘세계영화사 일반’이 되었다. 대중잡지라는 한계 내에서도 영화사와 영화이론, 영화작가들을 진지하게 소개했던 <스크린>과 <로드쇼>의 배포, 가정 내 시청과 녹화 장치를 넘어 전파월경과 불법복제를 포함하는 미디어 인프라로 확장된 비디오의 위상, 그리고 영화 운동의 내부와 주변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에 의한 영화 관련 서적의 증가에 힘입어 비디오테크는 세계영화사의 뒤늦은 수용과 학습, 시네필리아 배양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되었다. 수전 손택이 ‘영화의 쇠퇴’(이 글의 원본은 올해 출간된 <영화에 관하여>에 수록된 ‘영화의 한 세기’로 만날 수 있다)에서 종언을 알린 대상인 정전적 작가영화와 시네필리아는, 이 글이 <뉴욕타임스>에 발표된 1996년 2월25일 비디오테크와 동숭씨네마텍의 스크린에 집단적으로 투사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차적 수용은 사실상 영화사의 주류와 비주류 모두에 속하는 영화들이 공식적인 플랫폼과 비합법적인 공유 네트워크 모두를 통해 접근 가능한 동시대 시네클럽과는 무관한 정세다. 따라서 오늘날 시네클럽은 다른 방식으로 영화사 및 동시대 영화, 나아가 무빙 이미지와 관계한다. 소리그림의 캐치프레이즈는 ‘formless community for moving images’이며, 키니마는 “초기-고전기 영화와 동시대 무빙 이미지 작업 각각의 역사성과 유효성, 관계성”을 탐구와 상영의 목표로 설정한다. “시네마, 섹슈얼리티, 공동체가 만나는 접점”의 실현을 목표로 내건 원모어핑크는 포르노그래피와 퀴어 시네마 등의 영화적 신체와 관객과의 친밀한 접촉을 주재해왔다. 로트링겐은 현재 활동하는 시네클럽 중 가장 명확하게 영화사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매개변수로 입력한다. “(1) 영화사적으로 주요한 위치에 놓여 있지만 한국에 소개될 기회가 없었던 영화/영화인 (2) 최근 복원되었지만 한국에서 아직 상영되지 않은 영화 (3) 확장영화를 포함한 실험영화 (4)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사이의 회색 지대에 놓인 작업들 (5) 산업을 경유하지 않고 제작되는 동시대의, 개인에 의한 영화.” 동시대 시네클럽들에 상설 공간의 유무는 기획 및 활동 방식을 규정짓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데, 로트링겐은 KU시네마테크, 원모어핑크는 인디스페이스의 공모전 ‘보여줘, 시네클럽!’과 같은 독립예술영화관과의 협력을 통해 유동적으로 영화를 상영해왔다.

KU시네마테크 × 로트링겐의 상영회 포스터. 사진제공 원모어핑크

구별되는 동시에 중첩되기도 하는 이와 같은 프로그래밍 전략은 다양한 영화제와 서울아트시네마, 한국영상자료원, 국립현대미술관 영상관 등 공인된 상영 공간과 제도 사이에서 일종의 틈새시장을 찾으려는 모색의 결과다. 로트링겐의 프로그램은 독립된 필름&비디오 부서는 고사하고 전담 학예사도 채우지 못한 채 준파행 운영되어 본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MMCA 영상관과 실험영화 및 비디오에 대한 자체 프로그래밍 여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영상자료원 및 서울아트시네마(실험영화 월례 정기상영회 ‘프레임워크’는 자체 프로그램이 아니라 실험영화 작가이자 배급자인 핍 초도로프에 의한 외주 프로그램이다)의 공백을 대체한다.

여기서 과거 비디오테크와 동시대 시네클럽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가 드러난다. 바로 비제도적 공간과 실천을 둘러싼 제도적 공간의 생태계 구성이다. 과거 비디오테크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영화제 및 민간 시네마테크, 예술영화관과 같은 제도적 공간들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한 유토피아적 충동을 일정 부분 공유했고, 그 충동을 결국에는 이런 제도적 공간들의 설립으로 승화했다. 지금의 시네클럽 및 마이크로시네마는 이러한 제도와 공간을 주어진 조건으로 상정하고 자신들의 프로그래밍과 활동을 설계한다. 그 설계의 결과는 기성 제도와 일종의 양가적 관계다. 한편으로는 영화제 및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래밍과는 구별되는 상영 목록과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제와 시네마테크 프로그램에 GV 진행 또는 상영 관련 패널토론에 진출해왔다.

한국영화라는 구성물과 맺는 관계 또한 두 시기의 시네클럽을 구별해주는 또 다른 지표다. 영화 운동에서 일정 부분 파생된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시네클럽은 대문자로서의 한국영화에 대한 대안 모색과 실천을 제작 및 상영 활동 모두에서 목표했다. 영화공간 1895의 제작 워크숍 운영에는 ‘영화마당 우리’와 이언경이 1989년 결성된 여성영화인 모임 ‘바리터’에 참여한 최초 14인 중 한명이었던 배경이 있었다. 문화학교 서울은 워크숍 운영을 비롯한 제작 활동을 운영의 한축으로 분명히 설정했고, 세계영화사와 금지된 영화에 초점을 맞춘 간행물 <시네필>뿐 아니라 1995년 개봉한 22편의 한국영화에 대한 평론을 모은 (1996)를 발간했다. 문화학교 서울의 주요 운영진이 필름 시네마테크로의 전환에 발맞추어 한국독립영화협회와 인디스토리로 활동 반경을 이동하여 한국 독립영화의 제도적 생태계 구축에 기여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인디스페이스 × 원모어핑크의 상영회 포스터. 사진제공 로트링겐

반면 동시대의 시네클럽은 대문자로서의 한국영화라는 이념과 산업으로서의 한국영화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경향을 보여왔고, 제작을 비롯한 한국영화 일반과의 연결성을 주요한 목표로 추구하지도 않는다. 로트링겐의 주요 구성원은 실험영화 작가들이지만 이들의 영화 만들기는 로트링겐의 프로그래밍 및 상영과는 어느 정도 독립적이며 개인적이다. 대신 무빙 이미지 미술과 실험영화, 실험적 다큐멘터리를 비롯하여 한국영화라는 이념의 동일성에 균열을 내고 제도적 한국영화 배급망에서 벗어난 젊은 감독과 작가들이 동시대 시네클럽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소리그림의 경우 무빙 이미지 작가 또는 미술작가로 불릴 만한 작가들의 작품 상영을 시인, 음악가 등 다른 예술가들의 토크 및 워크숍과 병치했다. 키니마의 경우 임철민, 장윤미, 정여름, 이은희, 김민정 등 한국영화사의 주변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을 회고전 형식으로 상영하고 이들을 비평적으로 조명해왔다. 그렇다고 대문자로서의 한국영화에 대한 개입이 동시대 시네클럽에서 부재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이 점은 키니마와 이미지북, INK 구성원 등이 일부 필진으로 참여했고, 평론가 유운성이 기성 영화 저널리즘과 구별되는 “팸플릿과 같은 전술적 개입”으로 평가했던 <호프 끝장>이 입증한다.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덜 감지될 수 있는 과거와 현재와의 차이 한 가지를 짧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비디오테크는 한국 내 영화학의 제도화 과정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었다. 영화공간 1895와 관련된 기사는 이곳을 ‘영화 전문 공부방’으로 소개했고, 실제로 이 공간에서는 국내 대학 강단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정재형, 이용관 등이 강의를 했으며, 이같은 흐름은 민예총과 문화학교 서울에서의 영화이론 및 영화사 관련 강좌로 이어졌다(내가 처음 수강했던 강좌는 1994년 10월 시네포럼에서 정성일 평론가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에 대한 6시간 강연이었다). 문화학교 서울에 5개가 존재했던 연구팀 대부분은 각자 멜로드라마, 포스트모더니즘 등 관심 있는 주제에 집중하기도 했지만 중앙대학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및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과정의 진학 준비를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아카데미아와의 긴밀한 접속은 지금의 시네클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었고, 이는 일정 부분 한국 내 영화학의 위상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의 영화학계는 형성을 넘어 작가주의 비평과 대중영화 연구 모두에 방법론과 개념을 적용하며 빠르게 성장했고, 지금의 학계는 과거 영화학의 제도화에 기여했던 세대의 은퇴와 함께 정체상태와 영화미디어학으로의 갱신을 위한 모색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회적인 상영을 넘어 상영되는 영화에 대한 가치를 관객과의 대화, 비평, 번역 및 연계 강연의 형태로 형성하고 관객과 공유하는 실천은 과거 비디오테크와 현재 시네클럽 및 마이크로시네마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속성이다. 상영작과 관련된 감독 인터뷰나 실험영화 관련 비평문 등 중요한 관련 자료를 꾸준히 번역해온 로트링겐, 그리고 특별전에 초대된 감독 및 작가와의 대화 녹취록을 비롯한 행사 기록을 홈페이지에 게시해온 키니마의 사례는 상영 차원에서의 아마추어리즘과 수용 차원에서 취향의 구별짓기를 넘어서는 생산적 활동이기에 의미가 있다. 이렇듯 제도권을 넘어선 다양한 시네클럽들이 미래의 영화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확장시킬 것인지를 앞으로도 관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