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길면 곳곳이 이야기가 많은 법이니…(중략)…이리로 들어와 거니는 이는 새 힘을 얻어 흐뭇한 웃음을 웃고 가리라.’-탑골공원 사적비(1967)
역사를 보존하는 방법 중 가장 흔한 것은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다.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문이 낭독됐던 탑골공원에는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후, 국가적인 정비사업을 거친 후에야 기념비가 세워졌다. 역사가 기념비의 형상으로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누구의 손에 의해 측정되는가. 언젠가부터 한국영화는 질곡의 역사를 재현을 통해 재정비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가령 <택시운전사> <변호인>과 같은 현대사를 다뤄온 영화들은 이미 확정된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변환하여, 진리를 추구하거나 혹은 교육적 역할에 충실한 페다고지로 기능하면서 올곧은 이미지를 취득했다. 그런가 하면 <1987> <서울의 봄>을 비롯한 몇몇 영화들은 시대상과 인물들을 최대한 정밀하게 묘사하고 재현하는 미메시스의 규칙에 충실하면서,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운 역사적 재현을 고수했다. 이 두 경향에는 자크 랑시에르가 논한 윤리적 체제와 재현적 체제의 논리가 겹쳐 있다. 덕분에 우리는 독재자의 이목구비와 걸음걸이를 알게 되었으며, 국가폭력에 맞섰던 어느 대학생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74년 8월15일 발생한 영부인 저격 사건에서 출발한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은 이제 한국영화에서는 익숙한 시대의 완결되지 않은 역사를 호출하는 영화다.
비문에 남겨진 비문의 역사
하나의 기념비를 제작하는 공정. 다시 말해 역사를 돌에 새기는 과정은 글을 짓는 사람, 쓰는 사람, 새기는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한다. 서두에 인용한 탑골공원 사적비를 포함하여 광복 후부터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세워진 수많은 기념비들은 이 세 주체의 공조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비문(碑文)의 형식은 어딘가 낯설다. 띄어쓰기 없이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과 마침표 없이 맺음하는 문장들은 규칙을 벗어난 비문(非文)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우리가 읽어온 문장이 인과관계를 벗어난 비문이라면, 그리고 그 대상이 아직 닫히지 않은 미완의 역사라면, 그리고 어느 영화가 50여년의 간극을 좁혀 이를 재현하고 있다면. ‘실화 바탕 창작물’을 선언하는 <암살자(들)>이 수행하는 것은 새로운 비문을 쓰는 것일까, 아니면 마침표 없는 비문의 역사를 다시 환기하는 것일까.
<암살자(들)>이 촉발한 영화의 논쟁적 성립 조건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살해된 영부인’이라는 재현 불가능한(혹은 불가능해야만 하는) 대상에 대한 논의고, 둘째는 사건의 영화화를 가능케 한 승인 절차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혐의 속에 있는 <암살자(들)>은 영화의 권능을 과도하게 누리고 있는 영화인가. 장뤼크 고다르의 <마리아에게 경배를>(1985)은 성모마리아의 수태고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다. 당시 영화를 향해 쏟아진 거센 반발에 고다르는 “이미지는 삶과 같다. 이미지는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라고 답한다. 랑시에르는 사건의 특성만으로 재현 불가능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마리아에게 경배를>과 같은 해 공개된 <쇼아>를 예로 들며, ‘재현되어야 할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이중의 제거 과정’, 말하자면 행위를 통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공백을 재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사건의 진리와 허구를 가로지르는 이러한 재현의 방식은 랑시에르가 말한 미학적 체제의 논리와 맞물리는 것이다. <암살자(들)>은 현대사의 빈틈을 파고드는, 띄어쓰기 없는 문장들의 간격을 벌려놓는 미학적 체제의 논리가 작동하는 영화다.
영화의 초반, 박철구(유해진)의 아들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는다. ‘몸과 마음이’이라고 말하는 아들의 비문을 철구가 ‘몸과 마음을’로 정정한다. 중앙정보부에 잡혔다가 풀려난 동성일보 김재환(박해일)에게 중앙정보부 소속의 김상필(박훈)은 기사를 검열하며 ‘왜 자꾸 소설을 쓰냐’며 추궁한다. 사건의 마침표 역할을 하는 탄환이 발견되지 않은 사건을 다루는 <암살자(들)>은 스스로 픽션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자인하는 영화는 아닐까. 바꿔 말하자면 애초 이 영화의 관심사와 야심은 역사적 재현이나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혹 혹은 역사의 텅 빈 자리를 허구적으로 재현하는 데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 불투명한 사건 위로, 비문을 교정하며 진실을 쓴 기사는 픽션으로 탈바꿈시키고 그에 저항하는 몸짓들의 연쇄를 갱신하는 영화. <암살자(들)>은 말과 증언을 수집하여 새로운 문장으로 엮어내는 소설가들의 역량을 드러내는 영화다.
상이한 두 체제가 서술하는 픽션의 영화
영화는 사건 발생 이후, 중앙정보부와 동성일보가 각각 쏟아내고 찍어내는 말과 글을 병치시킨다. 김재환을 주축으로 한 동성일보 기자들은 중앙정보부가 발표하는 사건일지 혹은 수사 결과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문장을 덧붙인다. 이와 대립항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정부와 수사본부는 언론인들이 낱낱이 취재하여 육필로 쓴 기사를 기자 나부랭이들이 쓴 소설로 치부한다. 한영일(이민호)은 일본으로 건너가, 끊임없이 새로운 문장들을 부지런히 기록하고, 카메라는 이를 클로즈업숏으로 주시한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수행하는 것은 영일의 손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문장은 그곳에서 멈춘다. 8월27일, 28명의 경찰이 파면한다는 새로운 문장이 발표되고, 재환은 극동상사의 한 회장(정우성)을 찾아가 사건의 배후를 추측한다. 한 회장은 “이 양반 소설을 쓰시는구먼”이라 하며 또 다른 문장의 잠재성을 일갈한다. <암살자(들)>은 이른바 거대 정치와 미시정치의 대립을 드러내면서, 상이한 두 체제가 서술하는 텍스트를 쌓아가며 추출되는 긴장감을 장르적 동력으로 삼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두 체제 사이의 대립은 같은 페이지에 쓰일 수 없는 충돌하는 역사를 주장하면서도 서로에게 상보적인 존재로 기능한다. 정부의 발표와 동성일보의 기사는 서로의 성립 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팽창한다. 거대 정치가 서술하는 글은 언론의 질문을 받지 않고 빗장을 걸어 잠그면서 완성되는 매끈한 선언문의 형상을 띤다. 동성일보가 집필하는 미시정치의 소설은 거대 정치측이 선언하는 문장들의 어긋남을 발견하면서, 그들의 뒤틀린 비문 틈 사이로 좁은 구멍을 낸다. 그리고 그 구멍에 질문을 이식하고 새로운 문장을 덧붙이며 생성된다. 이 두측은 총탄들이 사라진 깨끗한 빈자리에서, 서로의 주장이 갱신되기를 부추기면서 각자의 문장을 집필하는 동시에 반대측의 공저자로 역할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공동 저술한 <천개의 고원>(1980)에서 단편소설은 대체로 비밀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사건을 가로지르는 세 선의 양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대한 영토 위에 걸쳐진 견고한 분할선, 영토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유연한 분할선, 그리고 배치를 이탈하는 도주선이 그것이다. 재환이 주도하는 동성일보의 기사이자 단편소설은 이 도주선의 궤적을 따른다. 그들은 문태광(박정민)의 총에서 발사된 탄환의 선들을 추적한다. 나아가 공식적 사건일지가 포획하지 못한 탄환의 흔적을 좇아, 진실을 조직하는 기존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선을 그려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동성일보 기자들의 ‘손’과 문태광의 삶과 동선을 응시한 사람들의 ‘말’이다.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싶다. <레러미 프로젝트>는 1998년 미국 와이오밍주 래러미에서 발생한 살해 사건 이후 주변인들의 증언과 기록으로 완성된 희곡이다. 이후, 영화화되어 2002년 선댄스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된 이 희곡이 되살리는 것은 사건의 ‘장면’이 아니라 ‘순간’이다. 순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말들. <암살자(들)>의 속도감은 시퀀스마다 등장하는 식별 가능한 배우들이 내뱉는 말에서 기인한다. 이들의 발언은 동성일보 기자들의 육필을 통해 기록되면서, 소설에 각주를 더한다.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어김없이 등장하여 약속한 듯 필요한 말들을 읊는 배우들의 얼굴과 이로부터 주입된 반복적인 소격효과는 사건 주변부에 있었을 익명의 몸과 마음이 역사의 주체로 승격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다소 과도하게 투입된 이 방식은 낯설게 하기의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 오히려 영화 후반부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하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상이한 두 소설의 결말은 어디를 향하는가. 실종된 탄환, 그러므로 상실된 결말을 전제하는 두측의 이야기는 서로에 의해 중단된다. 서윤희(류혜영)는 중앙정보부 관리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소설 지면이 펑크가 나게 생겼다”며 재환에게 위장된 서류 뭉치를 건넨다. 그는 말 그대로 소설을 건네받은 후, 수사본부 발표 현장으로 향한다. 재환과 기자들의 항의로 정부의 발표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동성일보는 재환의 주도로 문을 걸어 잠근 채 1면 기사를 준비하지만 중앙정보부의 폭력으로 윤전기는 멈춘다. 그 어떤 비문에도 새겨지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던 두 이야기는 나름의 대체 결말에 닿는다. 하나는 문태광의 사형선고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이다. 서로의 체제에 불응하면서 도출된 두개의 결말. 영화가 겨냥하는 암살자(들)은 누구인가. 영화는 영부인과 문태광을 죽음으로 이끈 복수의 혐의자들을 공표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가. 사건 발생 15년 후인, 1989년 10월. 감식계장 이현도(박지환)의 발언은 새로운 문장을 생성하고 비문의 공저자였던 이들은 TV화면을 응시한다. 그러나 어쩐지, 이 응시의 시선을 가져야 할 새로운 주체들이 잔상에 남는다. 영부인 사망 소식을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낸 이는, 뜻밖에도 서울중부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던 어린 소년이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번안하면서 ‘몸과 마음’을 주체로 자리바꿈한 것 또한 철구의 어린 아들이었다. 그뿐인가, 철구가 이와사 사토시로 추정되는 인물과 몸싸움을 벌일 때, 어두컴컴한 공간에선 청소년들이 쉬지 않고 타자기로 문장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 대신 비명을 질러야 했던 최승화의 친구들. 목격자였던 이들은 어떤 얼굴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영화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새로운 주체들을 슬그머니 상기시키면서 빈자리를 상속한다. <암살자(들)>은 왜곡이 아닌, 비문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