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31명에게 물었다. 어떻게 처음 감독을 꿈꾸게 되었는지, 데뷔작을 찍기까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돌아온 답을 엮은 이 책은 굽이마다 웃음이 터진다. 여기서 ‘웃기다’는 그들의 노력이 우습다거나 인터뷰가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글도 잘 쓰고 영화도 잘 만드는 사람들은 입담마저 이렇게 좋구나 싶은, 말 그대로의 재미다. 단편 <지리멸렬>을 내놓은 뒤 박찬욱 감독에게 “만나자”는 전화를 받은 봉준호 감독의 일화가 그렇다. 박찬욱, 이준익 감독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오직 시나리오밖에 없으니 시나리오를 열심히 쓰라”고 조언했다. 봉준호 감독은 “두 사람 모두 데뷔작으로 처참하게 망한 이들이라 딱히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충무로의 냉정한 현실을 처음 깨닫게 해준 소중한 기억”이라고 돌이킨다. 읽다 보면 웃음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다. 영화를 공부하러 미국까지 갔지만 투자를 거듭 거절당하고, 마흔여섯에야 <범죄도시>로 데뷔한 강윤성 감독은 투자사가 확정된 뒤에도 “정말 돈이 들어오는 거냐”고 몇번이나 제작부에 되물었다. 우연히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으로 데뷔한 변영주 감독은 첫 시사회를 마치고 꽃게집에서 술을 마시다 “정말 좋은 감독이 되고 싶어”라며 제 부족함에 엉엉 울었다. 실패가 되풀이되어도 영화를 놓지 못하고 버틴 사람들의 웃음 섞인 분투가 책 곳곳에 새겨져 있다.
데뷔를 한 후에도 누구 하나 수월하게 성공작만 만든 감독은 없다. 데뷔만 하면 탄탄대로가 펼쳐질 줄 알았던 순진한 시절을 지나 11년 만에야 두 번째 작품을 만든 감독이 있고, 데뷔작이 실패한 뒤 생계를 책임지던 아내가 임신하자 간절한 마음으로 두 번째 시나리오를 써내 성공을 거두고서야 자신이 정말 잘하는 일을 알게 된 감독도 있다. 세계적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조차 같은 시기에 데뷔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가 크게 호평받자 부러움과 함께 자신의 선택이 틀렸나 흔들렸다고 한다. 이 책은 감독을 꿈꾸는 지망생이나 영화계에 뜻을 둔 사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성공한 이들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이뤄냈다!”는 회고담도 아니다. 모두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영화가 아닌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고, 영화를 하는 것이 못 견디게 즐거웠다’는 이들의 고군분투기를 읽다 보면 손에 쥐는 것이 없더라도 뭔지 모를 꿈에 몰두하고 싶어진다. 그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외의 다른 일은 다 포기해도 괜찮았다는, 내가 나를 돕는 심정으로 매일 시나리오를 쓰며 버텨낸 31명의 이야기를 꼭 만나보시길.
그 시간을 지나며 분명해진 게 있다. 현장은 시스템이 있어야 오래간다는 사실이다. 프리프로덕션에서 충분히 준비하고, 프로덕션은 효율적으로, 포스트프로덕션 역시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걸 깨닫기까지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7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