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의 마지막 장면은 시점숏일까, 플래시백일까? 이건 어리석은 질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집에 돌아온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 부부는 마당에 앉아 밤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에 비친 달이 화면을 채우고 나면 잠시 뒤에 영화가 끝난다. 이 장면은 누가 보더라도 카메라가 두 사람의 시선을 대리하는 시점숏의 화면이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상상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이 장면은 누군가의 플래시백일지도 모른다. 한밤의 마당에서 언젠가 떠오른 보름달을 지켜보던 기억 속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억지스러운 상상일까? 무언가를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과 그의 눈에 비친 대상의 모습을 이어 붙일 때 영화는 두 장면이 동일한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연결의 약속을 전제한다. 다만 그 약속에는 분명한 근거가 없다. 숏이라는 이미지의 표면에는 명시적인 좌표와 시제와 주체의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가능한 사랑>의 결말에 나타난 보름달의 이미지가 두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의 대상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에 속한 과거의 흔적인지 구분할 근거가 없다.
시점숏과 플래시백을 구분하는 일은 왜 중요한 걸까? 두 장치는 이창동의 영화에서 유난히 비대칭적인 위상을 차지해왔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의 첫 영화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다른 하나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장치처럼 철저하게 억제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이창동은 시점숏의 작가다.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플래시백을 망각한 연출자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한석규)의 시선에 씌워지는 붉은 스카프에서부터 <버닝>에서 종수(유아인)의 눈에 들어오는 자취방의 작은 빛까지, 이창동에게 시점숏은 개인이 세계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처럼 느껴진다. “여러분은 사과를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단언하는 시인의 말(<시>)이 일러주듯 이창동의 영화에서 시선의 주인이 되어본다는 것은 세계에 잠재한 고통과 아름다움을 맨몸으로 만난다는 뜻이다. 이창동은 인간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의 주관성과 카메라 특유의 냉정한 객관성이 맺는 불화를 포착하고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과 신음을 듣는다.
시점숏의 반대편에 모호한 빈칸으로 플래시백이 남아 있다. 이창동은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플래시백을 배제하고 현재형의 화면에 몰두해왔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과거로 향하는 <박하사탕>에서조차 기억을 회고하는 단일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창동이 묘사하는 인간들이 이따금 과거에 겪은 경험을 말할 때 카메라는 그들의 목소리와 표정에 주목할 뿐 기억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창동의 인물은 오염된 과거의 상흔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눈앞에 주어진 현실의 빛에 시선을 빼앗기며 도착하지 않은 은총을 기다린다. 플래시백의 부재와 시점숏의 도착은 이창동이 선택한 피사체의 몸을 관통하는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이다.
시점숏과 플래시백은 모두 일인칭이라는 주관성의 세계에 속한다. 다만 이창동에게 있어 시선의 주관성(‘시점숏’)은 불투명한 세계 내부로 진입하는 특수한 회로처럼 작용하는 반면, 기억의 주관성( ‘플래시백’)은 결코 카메라의 언어로 옮길 수 없는 내밀한 영역처럼 다뤄진다. <가능한 사랑>은 뜻밖의 선택을 한다. 이 영화에서 이창동은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예지(조여정)의 카메라 앞에서 미옥이 오래된 이야기를 고백할 때마다 영화는 그녀의 기억 속으로 진입해 오래된 과거를 스크린에 펼쳐 보인다. 누군가의 시선을 대리하는 시점숏은 현실의 단면이 아니라 플래시백으로 재현된 과거 속에 나타난다. <가능한 사랑>은 모호한 형식적 실험이나 복잡한 이야기의 변모를 선보이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예지의 카메라가 미옥과 호석을 향하던 순간에 몇번씩 플래시백이 펼쳐지고 그 안에 세계의 내밀한 비밀을 마주하는 시점숏이 삽입된다. 플래시백과 시점숏은 <가능한 사랑>의 거의 유일한 형식적 장치이다. 이창동이 설정한 영화의 여정은 이 예외적인 장치의 침입에 답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가능한 사랑>의 플래시백은 어딘가 미묘하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한 사람이 재생하는 기억이라기보다 공모된 재현처럼 보인다. 플래시백을 점유하는 또 다른 주체가 화면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상상이 취미”라고 말하던 예지의 시선이다. 빛을 바라보던 시선의 아름다움으로 채워진 플래시백은 미옥의 서툰 각색처럼 보이기도, 예지의 빈약한 상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능한 사랑>은 시선과 기억이라는 주관성의 체험을 서로 나누려 한다. 영화를 촬영하는 일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닮았다면, 이는 ‘나’와 ‘타인’의 견고한 차이를 없애려는 열망으로 향한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열망을 실행하기 위해 이창동은 익숙한 시점숏과 어색한 플래시백을 한몸에 결합한다. 이것이 영화가 이상적으로 꿈꾸는 평등한 만남의 방식일 것이다.
예지의 카메라가 미옥과 호석에게로 향하면서, <가능한 사랑>의 화면은 복수의 점유자들로 흔들린다. 이즈음에 영화에는 기묘한 시청각적 복화술이 벌어진다. 이상한 불일치의 느낌이 발생하는 순간. 예지와 미옥과 호석이 함께 차를 타고 호석이 해고된 공장을 지나칠 때 카메라는 미옥이 앉은 조수석의 시점에서 뒷자리에 앉은 예지의 목소리를 듣는다. 한 장면에서 미옥의 시선과 예지의 목소리가 경계없이 뒤얽힌다. 호석이 아들의 생일케이크를 고르던 빵집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그곳에선 회사의 대량 해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호석의 아들과 같은 나이인 자녀를 위해 같은 케이크를 구매하고 있다. 호석의 행동과 몸짓은 호석의 것만이 아니다. 영화는 나와 타인의 경험이 무심코 뒤섞이고 공존하는 허구적 약속의 무대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 도입부에 새겨둔 단호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남의 것을 탐하고 훔쳐 내 것으로 만드는 장치다. 이것이 영화가 일방적으로 생산하는 불평등한 거래의 방식일 것이다.
이창동이 다루는 인간은 고통 속에서 동질성의 세계를 꿈꾼다.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는 비가 내리는 밤에 첫사랑이던 여자와 똑같은 비를 맞을 테니 다행이라고 말한다. <시>에서 미자(윤정희)는 손자의 성폭행으로 자살한 여고생을 향해 속죄하며 죽은 자와 같은 비를 맞으려 한다. 하지만 세계의 잔혹함은 인간이 완벽하게 동등한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시점숏은 세계와 연결되는 경로이면서 동시에 나와 타인이 똑같이 세계를 지각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기도 하다. <가능한 사랑>의 후반부, 호석의 플래시백 안에서 또 하나의 시점숏이 등장한다. 미옥의 기억 속 시점숏이 찰나의 빛이 건네는 아름다움을 증언한다면, 호석의 기억은 무심한 세계의 폭력을 일깨운다. 그는 지극히 평면적인 조명과 구조물로 채워진 옥상에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피해 도망치는 노동자 동료들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호석의 시점숏은 역설적으로 시점숏이 세계와 관계 맺는 특권적인 연결의 회로를 끊어내는 시선이 된다. 호석의 시선은 도망치는 타인들과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없다.
<가능한 사랑>의 화면은 뻣뻣하고 어색하다. 노골적이고 서투르다. 이창동이 그토록 강조하던 현실의 리얼리티와 아름다운 삶의 단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식적인 구도와 작위적인 설정으로 인해 화면은 질식할 만큼 억눌려 있다. 크고 작은 영화의 신호들은 모두 반복되거나 대칭을 이룬다. 예지와 미옥은 사랑을 말하며 달을 올려다본다. 호석과 상우(조인성)는 고기를 구우며 태권도를 한다. 어린 아들의 신발 끈은 처음과 끝부분에 똑같이 풀려 있고 보조출연자들은 매번 엇비슷한 모습으로 지나간다. <가능한 사랑>은 범용한 요소들의 집요한 반복과 대칭으로 채워진 영화다. 이창동에게 아름다움이 고유한 고통 속에서 희박하게 발견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지 않다.
이창동은 왜 눈에 거슬릴 만큼 노골적이고 작위적인 선택들로 영화를 구성한 것일까. 달리 말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속한 곳은 죽은 자들이 머무는 범용한 비극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리키는 ‘죽은 자’는 해고당한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의 네명의 주인공은 모두 범용한 반복으로 전락하는 나쁜 세계의 단면에 사는 범용한 인간들이다. 그들의 비극과 열망은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고유한 아름다움도, 고유한 기억도, 고유한 시선도 위태롭다. 특별한 일인칭의 체험이 아니라 범용한 비인칭의 경험담이다.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특수함과 모두 똑같은 인간이라는 범용함이 교차하는 것, 이는 이창동이 결국 마주하고 직면해야 했던 질문이었다. 그는 장면 하나하나에 그 인물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존재하기를 요청하는 유일성의 작가이면서, 한 사람의 궤적으로 한국인 전체의 시간과 삶을 의인화하려 드는 범용성의 작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창동에게 은 그렇게 축적된 자기의 모순을 파고드는 파열적인 영화다.
예지가 호석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미옥이 벌거벗은 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무대인 상우의 별장은 세계의 나쁜 가능성으로 가득 채워진 곳이다. 어쩌면 그곳에선 미옥과 호석의 주변에 존재하던 나쁜 사건이 범용한 형태로 반복됐을 수도 있었다. 상우가 미옥의 벗은 몸을 성적으로 착취할 수도 있었다. 무슨 옷을 입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던 미옥은 범용하게도 자유를 읊조리며 벌거벗을 수밖에 없다. 예지와 인터뷰하던 호석이 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해 폭주할 수도 있었다. 참아둔 속마음을 말하면 모두 죽여버릴지도 몰라 두렵다던 호석은 범용하게도 상처 입은 기억을 돌아보며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절망을 느끼며 자해하던 호석이 미옥의 눈앞에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별장의 CCTV로 모든 것을 지켜본 철이가 부부의 고통을 고스란히 건네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옥과 호석은 나쁜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용한 비극의 가능성을 중단한다. 촬영 중인 영화를 멈추는 단호한 선택의 순간이다. <가능한 사랑>이 모든 영화적 아름다움을 포기한 뒤에 도착한 순간이다.
미옥은 다큐멘터리 촬영을 멈추고 밖으로 나선다. 도착지는 한곳이다. <가능한 사랑>은 자살한 동료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나서는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마 몇 차례의 비슷한 자살과 죽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토록 나쁘게 이어지는 범용한 비극의 반복을 누구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끝내는 것은 죽지 않고 집에 돌아온 가족의 모습이다. 호석과 미옥은 영화 속에서 몇 차례나 반복해서 집에 돌아온다. 그때마다 그곳엔 예지의 카메라가 끼어들어 있다.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 집에 돌아오는 일은 끝없는 촬영과 인터뷰의 한 부분에 속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지켜본 귀환은 다르다. 별장에서 돌아온 미옥과 호석은 오래된 집의 지저분한 냄새를 맡고 누추한 공기를 느낀다. 그때 삶의 범용함은 은총처럼 내려온다.
부유한 다큐멘터리 감독과 삶이 파괴된 해직 노동자 부부를 한편의 영화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이창동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현실의 내밀한 리얼리티와 고통 속에 생겨난 아름다움이 <가능한 사랑>에는 없다. 이것은 과거의 행복하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눈앞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수도 없는 죽은 육체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육체의 주인에겐 플래시백도 시점숏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의 임무는 그 불가능한 플래시백과 시점숏의 자리를 그들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현실의 실감으로 장면을 묶는 리얼리즘이 아니다. 이 영화는 언젠가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현실을 기다리는 우화다. 우화는 단순하고 커다란 교훈을 건넬 뿐이다.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사랑, 또는 영화의 체험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시점숏일까, 플래시백일까? 이제는 답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동등하게 공유한 시선과 기억이라면 모두가 가능하다. <가능한 사랑>은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는 달빛의 풍경에 시점숏과 플래시백이 나란히 틈입할 가능성을 노출한다. 미옥과 호석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주와 과자를 나누며 범용한 주관성의 시선과 기억을 나눈다. 이 숏은 서로 다른 시선과 기억의 주관성으로 두 사람을 연결 짓는 믿음을 바라본다. <가능한 사랑>의 마지막 화면은 시점숏과 플래시백이 동시에 가능한, 그러므로 두 사람의 사랑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다. 호석을 처음 만나던 날에 미옥이 느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이 순간에 되돌아온다. 그것은 내가 바라본 세계를 타인과 나눌 수 있다는 뒤늦은 믿음의 실현이다. 혹은 밤하늘에 떠오른 달은, 부부의 삶에 주어진 영화의 또 다른 형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