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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형상, 공간, 시간의 작음 - 숭고의 관점에서 본 <가능한 사랑>

사진제공 넷플릭스

이창동은 명실상부 숭고의 작가였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가 보여준 정동이란 숭고의 영역에 가까웠다. 불가역의 시간, 태생의 한계와 사랑의 미혹, 죽음의 부조리와 용서의 난해함, 허구로도 헤아리기 어려운 생의 고통이란 인간이 통제할 요량 없이 그저 겪어내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그 불가해함의 크기에서 우리는 무언가 거대한 것과 마주했다는 인상, 즉 숭고를 체감했다. 이때 이창동은 이미지를 의식의 중핵에 겹치는 일에 누구보다 능숙한 이였다. 거대한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편이 아니라, 거대한 것을 이미지 내부에서 다 설명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밀양>의 마지막, 신애(전도연)에게 비치는 햇빛의 명도와 경계 없음이란 언어로 갈무리될 수 없는 이미지만의 결정력이었다. 신의 비정한 평등함이라는 의식이 햇빛으로 치환됐다. <시>에서 치매로 진단받던 미자(윤정희)는 의사의 엄중한 말씨에도 불구하고 창가의 꽃을 바라보며 웃는다. 범상치 않은 진실의 태와 크기가 모호한 형상으로서 드러나는 순간들. 이때 감지되는 세계의 숭고가 이창동의 영화를 지배해왔다.

다만 <가능한 사랑>의 모호함은 너무도 작아졌다. 숭고하지 않게 되었다. 그 첫째 이유, <가능한 사랑>은 달의 형상성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달의 이미지가 종종 제시되긴 하나, 달은 너무 많은 텍스트를 머금어 당장이라도 땅에 떨어질 듯하다. <가능한 사랑>에서 달은 지엽적인 해석의 대상이지 하나의 온존한 형상으로 주어지지 못한다. 형상은 가능성의 문제다. 자크 오몽의 논지에 따르자면 형상 분석에 있어 우리가 영화의 이미지를 바라볼 때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시각적 소여(所與)의 설정이다. 이야기와 외따로 자립하는 이미지의 힘이란 보는 이에게 자신만의 의미를 생성할 여백을 만든다.

하나 <가능한 사랑>의 관객은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이 달에 대해 지닌 기억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경험했고, 이로써 그들이 달에 부여한 심상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대신 달 주변의 음영과 파장, 달이 본래 지닌 현상의 힘, 달이 위치한 높이 같은 것들은 부수로 밀려난다. 연출의 필력과 카메라의 조준이 지나치게 적확한 까닭에 소실되는 것들이 생긴다. 미옥의 과거가 예지(조여정)의 상상이든 아니든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이미지다. 아니, 주어진 텍스트다. 이 적확함은 이창동의 영화가 평소 지니고 있던 숭고와 충돌해버리고 만다. 이 불합치가 <가능한 사랑>을 온전히 긍정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이유다.

달이 아닌 달의 높이

불합치는 필연적이다. 애초부터 달은 이 품어야 할 심상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몰두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높이’다. 이 이야기의 원천은 ‘달’이라는 물체의 독립적인 특성보다 달이 지닌 ‘높이’의 특질, 그 높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물리적 위치에 더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밀양>의 저 높은 해가 햇빛의 발원지로서 구원의 지대를 밝힌 구도와 유사하나 의미는 여실히 다르다. <밀양>의 해가 아래의 어디에나 뻗치는 구원의 힘이었다면, <가능한 사랑>의 달은 땅 위 인간들의 시선을 어디에서나 빨아들이는 높이의 매개다.

높이가 <가능한 사랑>의 정수인 이유는 뚜렷하다. <가능한 사랑>의 이야기가 해고 노동자의 고공농성이라는 현실에서 파생됐다는 배경이다. 호석의 농성 시퀀스에 삽입된 <저 달이 차기 전에>가 지시하듯이 <가능한 사랑>의 모태는 2009년 발발한 쌍용자동차 파업 투쟁이다. <저 달이 차기 전에>가 기록한 옥쇄(철창)파업투쟁, 고공농성의 현실이 우리에게 각인한 것은 다름 아닌 높이의 두려움이었다. 고공농성이란 타인이 간섭할 수 없는 공간을 자신들의 장소로 점유하여 벌이는 투쟁이다.

<가능한 사랑>이 쌍용 사태에서 채택한 주된 이미지, 즉 상징적 앵글은 헬리콥터 시점의 부감숏이다. 이 장면이 보여주듯 높은 곳에 있던 투쟁자들은 더 높은 것들의 급습을 경험했어야 했다. 애써 지켜낸 장소의 높이와 시선을 너무도 쉽게 침범당한다는 피식자의 공포, 체포된 동료가 더 높은 어딘가로 붙잡혀 간다는 모순이야말로 이 사태가 작동시키는 불쾌감의 원흉이다. <가능한 사랑>이 품어야 할 숭고란 바로 이 높이가 주는 불쾌의 숭고여야 했을 것이나, 영화는 달에 대한 과도한 텍스트로 그 정수를 가린다. 미옥과 호석 부부가 상우(조인성)의 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2층으로 안내받는다. 지상에 딱 붙은 듯한 미옥의 집과는 다른 높이의 전경을 선사하는 위치다. 미옥은 만족한 듯 웃는다. 이것은 높은 곳이 당연한 자들의 희롱이다.

사라진 바깥

<가능한 사랑>이 모호함을 상실한 두 번째 이유는 외화면의 실종이다. 높이라는 주제의 근원을 탁월하게 다룬 전작 <심장소리>와는 달랐다. 주인공 소년 철이(김건우)의 아버지는 타워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 중이며 철이는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전도연)를 찾아 마을 이곳저곳을 달린다. 이때 카메라는 아들 철이만을 얕은 심도의 프레임에 담으면서 외화면의 개입을 내내 허락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철이가 어머니를 만나자 드디어 화면의 바깥이 열린다. 어머니는 저 높은 곳의 무언가를 보고 있다. 그 시선의 끝엔 고공농성 중인 남편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남편의 투쟁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며 그 이미지를 저 멀리에 남겨둔다. 높이의 폭력에 짓밟힌 투쟁자들의 이미지를 고정된 이미지로 지시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보여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가능한 사랑>은 정확히 반대다. 가능한 대개의 것을 보여준다. 호석이 짓밟히는 모습도, 투쟁자들을 비추는 헬리콥터의 시선도, 믿었던 후배가 저 멀리 창공으로 사라지며 절망하는 호석의 얼굴도 화면에 보여준다. <저 달이 차기 전에>의 이미지를 빌려 오면서까지 그리한다. 과거의 선예도가 높아질수록 호석이 패배했다는 사실, 그리고 호석이 아직도 그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아픔이 자명해진다. 이로써 <가능한 사랑>은 외화면의 가능성을 보호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때의 모습을 다면적 푸티지로 재현하는 하나의 트라우마적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모호함을 배태하는 외화면의 가능성은 닫힌다. 구조의 부조리는 정서적 체념으로 희석된다.

셋째, <가능한 사랑>은 높이라는 공간뿐 아니라 시제의 가능성마저 소거한다. 기록의 의미란 과거를 끝없이 현재로 갱신하며 지금의 이미지로 작동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가능한 사랑>은 과거를 과거로 파묻거나 기억과 과거를 교차하며 의도적인 혼선을 만든다. 미옥의 과거 시절이 등장하는 세번의 플래시백 앞에는 예지의 얼굴숏이 자리 잡는다. 반대로 호석의 과거 회상 직전엔 호석의 얼굴이 프레임을 차지한다. 영화는 이 플래시백의 주체들을 모호한 것처럼 설정하지만 기실 그렇지 않다. 이미 누군가의 얼굴에 소유된 것처럼 편집된 이미지는 혹자의 내면에 자리한 특정적 상상/기억으로 닫힌다. 호석의 투쟁 기록과 <저 달이 차기 전에>의 푸티지마저 한 남자의 심리적 아픔 속에 갇혀버린 주관적 과거로 진단받는 셈이다. <가능한 사랑>은 과거를 또 다른 의미로 해체할 현재의 가능성마저 좁혔다. <가능한 사랑>의 제목은 <가능한 사랑>이어야 더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달의 형상은 인물들의 상상/기억에 귀속되어 형상의 여지와 높이에 관한 근원적 심상을 잃으며, 고공농성의 공간마저 누군가의 구체적 트라우마로 치환된다. 요컨대 이 영화는 형상의 여백도, 공간의 여백도, 시간의 여백도 작게 그리고야 만다. 이 방기들은 도리어 영화의 모호한 숭고함을 소거한다. 불가해한 숭고이든 쾌의 숭고이든 불쾌의 숭고이든 끼어들 틈이 없다. 대신 <가능한 사랑>은 모호함이라는 글자를 반듯한 선들로 잘 그린 것만 같은 직선의 영화다. 부정할 길 없는 호연의 상당함에 헛헛한 마음을 품고 극장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사랑>에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연유다. 이 영화는 그들의 얼굴을 품기에도 너무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