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운 좋게 <가능한 사랑> 시사회에 초청받아 영화를 보았다. 2시간44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몰입한 시간이었다. 여러 겹으로 쌓인 이야기와 인물들 사이에서, 소아정신과 의사인 내 시선을 끝까지 사로잡은 것은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의 아들 철이였다.
철이가 처음 입을 여는 장면에서 나는 곧바로 임상가의 시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부모의 말을 메아리처럼 따라 하며 아이답지 않은 문어체로 읊조리는 모습은, 진료실에서 자주 만나는 자폐스펙트럼장애의 특징인 ‘지연반향어’(delayed echolalia)의 전형이었다. 지연반향어는 흔히 의미 없는 따라 하기로 오해받지만, 실은 예전에 들은 말을 덩어리째 빌려와 지금의 감정과 상황을 전하려는 아이 나름의 소통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들에게 그 반향어를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상황에 맞는 대답을 하도록 꾸준히 훈련시켜 달라고 당부하곤 한다.
영화 관람 이후 우연히 본 이창동 감독의 인터뷰에서 철이라는 인물을 설정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감독은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연작에 등장하는 관찰자의 시점을 영화에 녹여달라는 제안을 받고 이를 철이를 통해 구현했다고 밝혔다. 철이의 시선이 보통 아이의 눈을 넘어 초월적인 느낌을 주기를 원했고, 그래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아이, 즉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아이로 설정했다는 것이다(아스퍼거증후군은 2013년 DSM-5 이후 자폐스펙트럼장애로 통합되었다). 창작자의 의도로서 충분히 이해되는 선택이다. 다만 임상가로서 덧붙이자면 밖에서 보기에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한 아이들도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세계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흥미롭게도 철이의 지연반향어는 ‘관찰자’라는 극 중 역할과 맞닿아 있다. 어른들의 말을 흡수해 다시 들려주는 아이는 그 자체로 어른들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두 부부가 마주 앉은 식사 자리에서 네명의 어른이 서로를 탐색하며 말을 주고받는 동안, 철이는 가장자리에 앉아 조용히 모든 것을 지켜본다. 진료실에서도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아이가 며칠 뒤 그 자리에서 오간 말을 정확히 되뇌어 부모를 놀라게 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학교 운동장의 태권도 단체 시범 장면도 오래 남는다. 철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박자씩 늦게, 힘겹게 동작을 따라간다. 자폐스펙트럼 아이들 상당수가 운동 협응과 동작 모방, 다른 사람과 리듬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그 모습이 과장 없이 담겼다. 그 더딘 몸짓을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 그리고 예지(조여정)와 상우(조인성) 부부가 함께 지켜본다. 이후 별장에서 상우는 철이에게 태권도를 일대일로 가르쳐주고, 호석은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본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호석은 집에서 철이와 이렇게 마주 서서 태권도를 가르쳐준 적이 있었을까. 철이에게는 이것이 처음 겪는 경험이었을까. 반복적이고 구조화된 움직임을 한 사람이 차근차근 이끌어줄 때 아이들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임상에서 거듭 확인해온 사실이다. 따뜻한 장면이었지만, 아들이 다른 어른을 통해 배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호석의 미묘한 심정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훗날 상우와 미옥의 해변 장면을 떠올리면 이 순간은 한층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한다.
영화 속에서 철이는 상우의 호루라기를 불며 주변과 교감하고, 별장을 떠나면서 그 호루라기를 챙겨 온다. 이 행동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호루라기가 철이를 안정시키는 도구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이따금 코를 찡긋거리는 모습은 자폐스펙트럼장애에 흔히 동반되는 틱 증상으로, 이런 특성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디테일도 인상적이다.
관객에게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단연 상우와 미옥의 해변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장면이 별장의 CCTV에 고스란히 찍히는 동안 철이가 그것을 목격했는지를 영화가 끝내 분명히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리인과 철이가 그 부근에 있으리라는 짐작 때문에 관객은 숨 막히는 긴장을 느끼지만, 감독은 두 사람이 화면을 보는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기계의 눈과 어쩌면 그것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아이의 눈이 겹치는 이 순간, 철이는 어른들이 감추고 싶은 것까지 지켜보는 존재가 된다. 철이가 무엇을 보았는지, 보았다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이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분위기의 변화를 몸으로 먼저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기에, 철이의 침묵은 내게 더 무겁게 다가왔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부모들은 대개 지쳐 있고, 가장의 실직처럼 가정경제가 흔들릴 때 그 무게는 자폐나 발달장애 자녀를 둔 가정을 가장 먼저, 가장 깊게 짓누른다. 그런데 미옥과 호석은 생존의 벼랑 끝에서도 철이를 숨기지 않는다. 낯선 부부와의 식사 자리에도, 별장에도 아이는 늘 함께한다. 고치려 들거나 변명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곁에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이가 세상과 연결되는 가장 든든한 토대다.
철이를 보며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 속 만수(이병헌)의 딸 리원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영화는 모두 해고당한 가장과 흔들리는 가정의 이야기이고, 그 한가운데에 자폐스펙트럼 아이가 있다. 박찬욱 감독이 “예언자 같은 존재”로 설정한 리원이는 말 대신 첼로로 세상과 이어지며, 아이의 자립을 걱정하는 부모의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만수(이병헌)의 파국을 예고하는 상징으로도 기능한다.
두 영화에서 아이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나 단순히 ‘가족의 비극을 강조하는 장치’로 소비되지 않는다. 아이의 특성이 과도하게 설명되거나 신파적으로 포장되지 않은 채 그저 의연하게 가족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부모 역시 아이의 특별함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돌아볼 때 <말아톤>이 극복의 서사였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편견을 넘어서는 주인공의 서사였다면, 이제 자폐스펙트럼의 아이들은 가족의 일원으로 이야기 속에 담담히 자리한다. 극적인 극복의 서사 없이도, 한 가족의 일상 안에서 그저 함께 살아가는 아이.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료실 밖의 아이들과 가족들이 가장 오래 기다려온 변화라고 믿는다.
리원이가 첼로로 세상과 소통하듯, 철이는 조용한 눈빛과 호루라기로 자기만의 신호를 보낸다. 세상이 정한 소통의 기준과 다를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연결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존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저마다의 속도로 세상을 응시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두 거장 감독의 시선은, 우리 사회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 단계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신호다.
